배두나를 생각하면 스푸트니크호가 떠오른다. 저 바깥세계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어 인간이 쏘아올린 최초의 인공위성 말이다. <플란다스의 개>의 현남, <고양이를 부탁해>의 태희, <복수는 나의 것>의 영미, <굳세어라 금순아>의 금순, 그리고 <린다 린다 린다>의 송. 영화에서 배두나가 연기한 소녀와 여자들은 우리가 낯선 존재로 편 가르기 일쑤인 대상들- 외국인, 장애인, 어린이, 동물- 과 수월하게 친구가 되곤 했다. 그녀들은 불행한 표정으로 거리를 헤매는 사람들을 두려움보다 호기심으로 바라보았고, 다른 언어를 쓰는 상대에게 마음을 건네고 받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만약 우리가 미지의 어느 먼 별과 교류하고 싶다면 배두나에게 편지를 맡겨 보내는 편이 좋을 거야, 라고 나는 상상하곤 했다. 그녀라면 흰 새처럼 자유로운 그 손을 아득한 암흑 속으로 흔쾌히 뻗을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일까? 배두나가 한국영화에 출연하지 않은 지난 2년 동안, 나는 그녀가 어디로 배낭여행이라도 떠난 느낌이었다. 일본에서 영화를 찍었다는 소식이, 대학로에서 연극 <썬데이 서울>을 공연한다는 뉴스가, 주말드라마 <떨리는 가슴>이 이따금 그림엽서처럼 날아왔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그녀의 근작 <린다 린다 린다>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즈음 배두나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생애 열 번째 영화 <괴물>을 찍고 있는 그녀는 부산영화제를 방문하기 직전 서울에서 토요일 오후의 몇 시간을 허락해주었다. 당장이라도 어디론가 떠날 수 있을 만큼 커다란 가방을 멘 배두나의 얼굴에는 엷은 화장기가 있었다. “메이크업 안 하시는 편이 예쁜데”라고 아쉬워하자, 어느새 스물일곱살이 된 그녀가 “이제는 아니에요”라고, 콧노래를 부르듯 대답했다.
-1999년 <링>으로 스크린에 데뷔한 이후 매년 영화를 한두편 개봉했는데, 지난해와 올해는 처음으로 개봉작이 없는 기간이었습니다.
=<괴물> 현장에서도 예전의 내가 어떻게 했나 기억나지 않아 신선하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했어요. 난 워커홀릭이에요. 5, 6년간 일없는 생활을 한 적이 없었어요. 한 작품 홍보할 때는 이미 다음 작품을 촬영 중인 것을 당연히 여겼죠. 그런데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를 찍고 나서 혼자 생각했어요. 이제 나의 1기는 진짜 끝났다고. 쉬면서 신선한 나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데 막상 노는 법을 잘 모르겠더라구요. 꽃꽂이, 제과 제빵을 배운 것도 취미 생활을 원래 즐겨서가 아니라 허전함을 메우기 위해 닥치는 대로 집중한 거예요.
-연극배우 김화영 선생이 배두나씨 어머님이십니다. 엄마가 배우라는 사실은 어린 여자애에게 어떤 추억을 남겼나요?
=엄마를 따라다니며 자연스럽게 연습실 출입을 했어요. 하도 조용한 아이라 연극 시작부터 끝까지 분장실에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대요. 명동 엘칸토 소극장에서 엄마가 <유리동물원>을 공연할 때는 첫 대사가 “톰, 일어나서 세수해”였는데 여러 번 들어서 그랬는지 분장실에 있던 다섯살 먹은 제가 대사를 따라하는 소리가 객석까지 들려 관객이 한바탕 웃었대요. 남들은 아, 엄마가 연극배우니까 딸이 영화배우를 하는 것이구나 생각하겠지만, 저한테는 그런 경험들이 역효과였던 것 같아요. 저는 오히려 어려서 본 엄마와 배우들이 너무 대단하고 위대하게 느껴져서 배우란 타고난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인상이 강하게 남았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지난해에 연극무대에 선 것은 원초적 공포와 대결한 일생일대의 도전이었어요. 태연한 척 홍보하고 다녔지만 사실 힘들어서 죽고 싶었어요.
연극을 통해 “기술적으로 나를 ‘팽창’시키기”
-오빠와 남동생 사이에 낀 외동딸이잖아요. 그런 경우 매우 여성적인 성격을 갖게 되는 사람도 있고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 없이 자기를 형성하는 사람도 있던데요. 가족 안에서 두나씨의 역할은 어떤 것인가요?
=보살핌을 받는 역할이요. 제가 “우리 두나”라는 말을 되게 좋아해요. 그 말을 들으면 안심이 되고 그렇게 기분이 좋아질 수가 없다고 했더니 누군가 “넌 보살핌을 받는 체질이구나” 하더라고요. 하지만 누가 지나치게 챙기면 굉장히 불편해요. 코디네이터들이 부채질해주는 것도 제발 하지 말라고 부탁해요. 받으면 나도 그만큼 해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요. 지금은 제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는 이미지지만 (웃음) 데뷔 전에는 아주 여성적인 성격이라 카메라 앞에 서는 건 상상도 못했어요. 굉장히 무심하고 서늘한 애였어요.
-그건 놀랍네요. 왜냐하면 지금껏 많은 배우의 사진촬영을 지켜봤지만 배두나씨만큼 카메라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셔터의 리듬과 몸의 움직임이 조화로운 모델은 기억에 없거든요. 그래서 당신은 영화매체에 맞는 배우라는 생각입니다. 미세한 움직임의 재미, 중얼거리는 자연스런 대사가 특징인데, 그건 영화만 살릴 수 있으니까요.
=연극이 제일 안 맞을 수밖에 없는 게, 무대에서도 저는 자꾸 영화를 찍거든요. 감정을 크게 표현하기보다 최대한 작게 표현해 관객이 상상하도록 하는 걸 좋아해요. 그런데 연극은 가장 크게, TV는 중간의 연기가 필요하고 영화는 작게 연기해도 되잖아요. 그래서 제겐 영화가 유리해요. 제 얼굴의 느낌도 사진이나 영화나 필름이 더 잘 맞는 것 같아요. 브라운관이나 디지털에는 안 어울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 <썬데이 서울>에 도전했습니다. 앞서 말한 유년기의 두려움과 정면대결했다는 의미 외에, 기술적으로는 배우로서 어떤 훈련이라고 생각했는지 궁금합니다.
=나를 단련시키기 위해 연극을 했다고 말하기는 왠지 창피해요. 너무 개인적인 작업처럼 들리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니까. 하지만 사실 도움이 많이 됐어요. 기술적으로 나를 ‘팽창’시키기, 관객에게 연기로 친절히 설명하기 등등. 저의 연기는 무척 불친절하거든요. (그녀의 블로그 제목은 ‘불친절한 두나씨’다) 엄마 표현인데, 연기하면서 각을 잡고 포를 뜨듯 관객에게 하나씩 친절하게 놓아줘야 한대요. 연기의 덩어리를 마무리짓는 각운이 깨끗해야 한다는 것도 잘 몰랐고요. 그런 부분들을 훈련했어요.
-영화뿐 아니라 일일드라마, 주말드라마, 연극을 꾸준히 소화하는 모습이 배우로서 일종의 커리큘럼 같은 것을 짜서 스스로를 훈련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어쩌다보니 드라마 <학교>, 영화 <링>으로 무명, 조연 시절 없이 남보다 편하게 주연이 된 경우잖아요. 과분했던 만큼, 혹독하게 연습하고 선생님들과도 부딪혀봐야 한다고 생각해왔어요.
-기본적으로 성실하시군요.
=열개 중 서너개를 알면 그것에 대해 좀 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 열개 중 아홉을 알고 하나를 몰라도 난 잘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저는 후자예요. 데뷔한 지 6, 7년 된 지금도 저는 아직 공부 중이고 게다가 여배우는 서른부터라고 생각하고…. 어머, 이러다 정말 서른 지나면 어떡하죠? 진짜 잘해야 돼! 부담 만빵! (웃음)
-요리나 사진이나 배우기 시작하면 끝장을 보려고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겠네요.
=우리집 강아지 남주(<괴물>의 배두나 캐릭터 이름이다)가 닭고기 묻은 개껌 하나 주면 사람이 나가건 들어오건 아랑곳없이 30분을 매진하거든요. 친구가 저더러 남주 같대요. 이런 기계(자신의 카메라를 가리키며) 하나를 사면 며칠을 한눈팔지 않고 심하게 집착해요. 그러다 진이 빠지면 조금 쿨해지죠. 영화도 찍을 때는 미쳤다가 개봉하면 미련이 거의 안 남아요. 어릴 때는 지우개를 엄청 모으다가 이제 많이 모았다 싶자 몽땅 친구들 나눠줘서 엄마한테 잔소리 듣기도 했어요. (웃음)
“<린다 린다 린다>는 나의 외전”
-신작 <린다 린다 린다> 이야기를 하죠. 예전에 어떤 인터뷰에서 영화들을 ‘내가 아님 안 될 영화’, ‘나한테 와줘서 고마운 영화’, ‘내가 하면 다를 영화’로 분류한 적이 있어요.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의 <린다 린다 린다>는 어떤 의미였나요?
=언젠가 일본 모리오카영화제 다녀온 봉준호 감독님이 ‘천재적인 젊은 일본 감독이 널 캐스팅하고 싶어하니 나중에 잘 해보라’고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 이야기를 하셨어요. 그래서 호의를 품고 야마시타 감독의 전작 <후나키를 기다리며>를 봤는데 엉뚱한 유머에 반해버렸어요. <린다 린다 린다>는 저의 ‘외전’이라는 느낌으로 찍었어요. 그런데 그 영화 꼭 <고양이를 부탁해>의 과거 이야기 같지 않아요?
-송은 아무 생각없이 못 알아듣고 ‘하이’(응) 했다가 말려든 일에서 결과적으로 멋진 인생의 체험을 하는데, 두나씨도 그런 경험이 있나요?
=송은 배두나 저 자체였어요. 영화를 찍는 동안 한국인이라곤 나밖에 없었고 말 못 알아듣는 틈바구니에서 어떻게든 껴보려고 적응해보려고 한달 반 동안 열심이었거든요. 도쿄에서 한 시간 거리의 한 학교에서 촬영하며 근처 숙소에서 지냈으니 유학생 송의 처지와 똑같아서 몰입하기 쉬웠어요. 마지막 장면이자 마지막 촬영분이었던 공연을 찍고는 후련함과 희열에 많이 울었어요. 내 집이 아닌 곳에서 촬영한다는 것이 참 외롭고 두렵기도 했고, 극중 밴드 멤버들과 정말 친구가 됐거든요. 늘 박자가 뒤처지던 드러머 역의 마에다 아키가 무대 위에서 멋지게 성공하는 순간 감격의 눈물을 흘렸죠. 제가 원래 시니컬해서 콘서트에서 가수들이 울면 ‘뭐지?’(미간에 의혹에 찬 주름을 잡아보이며) 하던 사람인데 그 기분을 알겠더라고요. 배운 것도 많아요. 같이 작업한 일본의 젊은 배우들은 한다면 하는 면이 있더라고요. 기타를 내가 연습한다고 얼마나 치겠냐는 의구심이 있을 법도 한데 나는 기타리스트가 될 거라고 그냥 믿어버리고 24시간 기타를 끼고 살며 정말 그렇게 만들어요. 그걸 보고는 귀국해서 <괴물>의 남주 역을 위해 일주일에 세번 어깨가 부서지도록 양궁 연습을 했죠.
-존경하는 선배로 윤여정, 고두심 선생을 자주 말씀했습니다. 배우로서 배두나씨의 존경심은 한 세대를 건너 위쪽으로 가는 것 같은데, 바로 윗세대엔 교감이나 동경이 약한가요?
=그건 아니고요. 윤여정 선생님을 존경하는 이유는 일일연속극에서 모녀로 분하면서 직접 그분을 겪었기 때문이에요. 좋아하는 배우라면 심은하 언니, 전도연 언니 많지만 그분들을 제가 겪어본 적은 없잖아요. 바로 윗세대 언니, 오빠들과 같이 한 작품이 제겐 별로 없기도 했구요. 윤 선생님은 카리스마도 대단하지만 상대방에게 영감을 주는 분이에요. 지금 어느 정도 연기를 한다 하지만, 저는 나 하나 챙기기가 바쁘고 상대 배려하기가 참 힘들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상대가 그분의 눈만 봐도 몰입할 수 있게 만드세요. 그래서 바로 존경하기로 정하고(웃음) 크리스마스 카드에 ‘선생님처럼 훌륭한 배우가 되고 싶어요’라고 소심하게 써서 갖다드렸어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절 부르셔서 ‘내 딱 한마디만 할게’ 그러시잖아요. 떨었죠. 그런데 ‘너는 지금도 나보다 더 훌륭한 배우가 될 수 있어. 순수하니까’, 그러시는 거예요. 감격의 눈물이 그렁해서 ‘아니어요, 선생님!’ 소리쳤죠.
-아닌 게 아니라 당신은 참 눈물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게 마음이 연약해서 잘 운다기보다 바탕이 백지 상태라서 어떤 감정적 자극도 곧장 울음, 웃음, 선명한 표정으로 연결되는 느낌입니다.
=저는 인생의 쓴맛 단맛 보고 경험을 해야 연기를 한다는 생각에 동조하지 않아요. 살인을 해봐야 살인자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그나마 제가 순수하고 백지 상태인 게 다행스러워요. 어린애들이 원래 상상도 잘하고 상상을 현실화하잖아요. 저도 살짝 그래요. 연기할 때 극중에 당면한 상황만 갖고 울거나 웃어요. 과거의 개인적인 슬픈 기억을 끌어내 우는 게 불가능해요. 모든 걸 진짜로 할 수밖에 없으니 피곤한데 그러니까 제겐 ‘백지’가 필요해요. 상처가 생기면 면역이 생길 테고 그만한 일이 닥쳤을 때 큰 감흥이 없겠죠? 저는 예쁜 건 너무 예쁘고 슬픈 건 엄청 슬프고 맛있는 건 엄청 맛있는 극단적인 성격이에요. (마침 매니저가 사온 빵을 보고) 우와, 맛있겠다!
“사진은 연기처럼 정답이 없어서 재밌어요”
-조영남씨가 <고양이를 부탁해> 살리기 운동에 앞장섰을 무렵 배두나씨가 전 부인인 윤여정 선생의 젊은 시절과 닮았다고 한 적이 있어요. 봉준호 감독님도 맥락은 다르지만 <플란다스의 개>의 현남이 부인과 닮았다는 말을 했고요. 두분을 직접 아실 텐데 공감가세요? 아니면 사람이 나이 들면 불가피하게 잃어버리는 요소가 두나씨에게 강해서, 듣는 말일까요?
=특히 조영남 선생님은 윤여정 선생님과 제가 걸음걸이, 어깨의 굽은 각까지 똑같다고 하셨어요. 봉 감독님 경우는 누구나 한번쯤 가지고 있을 법한,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없어지는 부분을 제가 <플란다스의 개>에서 표현했기 때문일 거예요. 그런데 그런 말들이 사실 엄청난 칭찬이에요. 얼마나 사랑했으면 결혼했겠어요. 그런데 그토록 사랑했을 때 모습을 닮았다는 건 그 캐릭터가 몹시 사랑스럽다는 뜻 아닐까요. 결혼할 나이에 가까워진 요즘엔 가끔 얼마나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면 결혼해서 24시간 365일 붙어 있나 의아해요. 전 아무리 좋은 친구도 종일 같이 있는 건 힘들거든요. 근데 한 친구가 안심시켜주더라고요. 결혼하면 절대 24시간 안 붙어 있고 오히려 서로 덜 마주친다고. 후후.
-새로운 사랑의 기회를 스쳐가는 젊은 이혼녀를 연기한 <떨리는 가슴> 1, 2회를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사실 진짜 성인 연기라는 느낌은 그 작품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레이, <최종병기 그녀>의 치세 같은 ‘요정’의 이미지가 진했는데, <떨리는 가슴>에서는 비로소 그 나이만큼 살아온 여성처럼 보였거든요. 드라마 직전에 연극을 한 영향도 있을까요?
=어머, 그래요? 너무 잘됐다! 제가 지금 주력하고 있는 부분이 그거예요. 최대한 현실적이 되는. 하하하. 제가 현실적인 것을 별로 표현한 적이 없고 항상 꿈꾸는 상태로 영화를 찍었잖아요. <괴물>에서도 감독님과 2년에 걸쳐 남주를 어떻게 표현할까 의논했는데, 봉 감독님이 원하시는 것도 비슷해요. 최대한 <플란다스의 개>와 멀게.
-<떨리는 가슴>의 몇몇 대사도 기억나요. 실연한 두나가 술에 취해 언니네 집에 갔을 때, 식구들이 곡절을 묻자 “몰라. 몰라, 비밀이에요”라고 대꾸하잖아요. 그때 똑같은 대사를 두번 하는데 눈물을 삼키면서 하는 두 번째에는 보는 사람도 같이 울컥했어요.
=내가 진심으로 울지 않았다면 절대 관객도 눈물이 나지 않았을 거예요. 관객이 바보예요? 저도 관객으로서 배우의 진심이 와닿을 때 울어요. 문근영양이 울면 저도 따라 울어요. 그래서 항상 연기는 진심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른 방법을 모르기도 하지만.
-배두나씨의 일하는 스타일은 귀족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부잣집 딸 같다는 말이 아니라 구애받는 데가 없어 보인다고 할까요. 흔히 여배우들은 예쁜 이미지에 불가피하게 애착하는 경우가 많고, 살면서 겪는 자연스러운 사건도 족쇄로 작용하다보니 벽을 두르기 쉽잖아요. 공교롭게 소녀 가장인 경우도 많고요. 그런데 두나씨는 본인 마음에 드는 배우가 되는 것 외에 소속사나 다른 필요에 생활이 강제되는 느낌이 거의 없고 그래서 귀족적으로 느껴집니다.
=데뷔할 때부터 사실 그런 부분 때문에 어느 정도 어필을 했던 것 같아요. 저는 제가 가진 것을 소중히 생각하고 아주 허황된 욕심이 없어요. 역으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제 행동과 일상을 더 궁금해하는 것 같아요. 패션지에서 라이프스타일 따라하기 칼럼을 제안받았 때는 조금 뿌듯했죠. 저는 다른 모델들과 같이 화보 촬영할 때마다 예쁜 옷은 다른 모델 다 입히라 그래요. 내가 그 화보로 부귀영화를 누릴 것도 아니고(웃음), 어차피 내가 예뻐봤자 얼마나 예쁘겠나, 또 예뻐서 뭐 하나 싶어요.
-취미 말이 나왔으니 사진 이야기를 할까요. 카메라도 많이 모았고 디지털로 시작해 아날로그 사진의 매력에 빠져 있다고 들었습니다. 박찬욱 감독님도 단골 카메라 가게에서 배두나씨가 무거운 수동 카메라를 사갔다는 말에 놀랐다고 하시더군요. 촬영감독님에게서 확대기도 빌려갔다면서요? 사진이 당신에게 주는 기쁨이 뭔지 궁금하고, 또 사진을 배우면서 피사체로서 자신에 대해 다르게 느끼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사진은 독학해요. 밤이면 바바라 런던의 두꺼운 책을 읽다가 잠들어요. 사진은 찍어도 찍어도 잘 모르겠고 연기처럼 정답이 없어서 재밌는 것 같아요. 기계를 좋아해 혼자 매뉴얼 없이 카메라를 만지며 터득하는 일도 좋아하고요. 모델로서 내 자신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죠. 예컨대 동영상 편집을 직접 해보면 편집하는 영상물 안에 있는 사람이 저 상태로 1, 2초만 더 버텨줬으면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그러면 나중에 스스로 인터뷰나 드라마를 할 때에도 편집을 신경 쓰게 되고 마음가짐이 달라지더라고요. 그와 마찬가지로 사진을 찍다보니 왜 포토그래퍼들이 날 모델로 좋아하는지 알겠어요. (무척 쑥스러워하며) 우하하, 자화자찬하는 것 같네. 저는 모델이 최대한 포즈를 안 취하고 심지어 카메라를 의식 안 하는 게 좋더라고요. 구도도 단순하고 포즈도 없고 표정도 극단적인 것보다 심플하면서 내면이 보이는 표정이 좋아요. 그런데 그런 면에서는 제가 좀 탁월하지 않을까. (웃음) 그닥 예쁘진 않지만.
“<괴물>은 내게 실험적인 작품”
-여러 감독님과 일했지만 <복수는 나의 것>의 박찬욱 감독님과는 연극 <썬데이 서울>의 인연도 있고, 봉준호 감독님과도 두 작품째입니다. 배두나씨가 제일 좋아하는 두분의 영화는 어떤 작품이죠?
=박찬욱 감독님의 <올드보이>랑 <친절한 금자씨>를 아직 못 봤어요. 감독님이 ‘너 너무하는 거 아니니?’ 그러세요. (웃음) <공동경비구역 JSA>를 좋아해서 다섯번 봤지만 순수한 개인적 취향을 물으신다면 <복수는 나의 것>! 봉 감독님 영화는 <살인의 추억>도 훌륭하지만 저는 <플란다스의 개>가 더 좋아요. 워낙 여백의 미를 좋아하고 사건, 사고가 없는 이야기에서 디테일을 찾는 것이 어려우니까요. 나를 웃게 하는 영화들을 좋아하는데, 저와 봉준호 감독님은 유머의 코드가 맞는 것 같아요.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의 토드 솔론즈 감독도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스무살 때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를 봤는데 너무나 충격적이고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이, 제가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님과 봉준호 감독님의 감성을 좋아하는데 그 두분이 또 토드 솔론즈를 좋아해요. 심지어 야마시타 감독님은 토드 솔론즈 감독과 대담한 사진도 갖고 있더라고요. 내게 달라고 졸랐죠.
-사실 봉준호 감독님의 <괴물>은 정색하고 계약한다기보다 자연히 당연히 합류한 작품인 것 같은데요. 시나리오로 읽었을 때와 촬영이 60% 진척된 지금 영화의 느낌 차이가 있습니까?
=확실히 봉 감독님은 콘티북까지 나와봐야 알 수 있어요. 워낙 그분도 불친절해서 시나리오에 자신의 디테일을 절대 남겨두는 분이 아니거든요. 박찬욱 감독님은 정확히 콘티대로 찍는 분이고 봉준호 감독님은 가끔 콘티를 새롭게 그려오세요. 봉 감독님 콘티북은 거의 만화책이에요.
-박희봉(변희봉), 박강두(송강호), 박남일(박해일), 박남주(배두나)의 <괴물>의 가족 구성과 괴물에 잡혀간 어린 현서(고아성)를 구한다는 비장한 목적이 마치 <반지의 제왕>의 반지원정대를 연상시키던데요.
=그렇지 않아도 봉준호 감독님이 영화 시작할 때 그랬어요. ‘나는 지금 절대반지를 모르도르에 버리러 가는 프로도의 심정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샘이 되어주세요.’ 제가 원래 감격을 잘하는지라 ‘감독님, 너무 멋있어요! 샘이 되겠어요!’ 그래놓고 요즘 샘은커녕 내 촬영분 많이 끝났다고 가끔 안 들여다보기도 하고. (웃음) 그래도 계속 현장에 있을 거예요.
-더러는 자기 촬영분을 제외하면 밴에 틀어박혀 있는 배우들도 있는데 두나씨는 현장에서 내내 스탭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고 여기저기 간섭하고 거의 중견 영화인의 향기가 난다고 들었거든요.
=누가 그래요? 봉준호 감독님이죠? 아무도 저를 여배우로 안 봐줘요. 매니저 오빠들은 저를 쉬게 하고 싶어하지만 제가 들어가 갇혀 있는 걸 진짜 싫어하거든요. 호기심이 많다보니 어디 가서 참견하는 걸 그렇게 좋아해요.
-<괴물>이 배두나씨에게 어떤 영화로 남을 것 같나요? 관객 입장에서 보자면 충전 이후 재회하는 첫 영화인데요.
=내가 이 작품을 2년이나 기다렸다는 점을 생각하며 보는 사람들은 ‘쟤 저거 하려고 2년 기다렸냐?’ 할 수도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저는 예전 나의 만화적이고 독특한 캐릭터를 많이 죽여서 배두나 스타일이 아니라고 사람들이 생각할 정도로, 스스로 나 지금 뭔가 연기 하나 안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어요. 저에게는 그런 부분에서 실험적인 작품 아닐까요.
“지금은 내게 모험의 시기”
-저는 언제나 배두나씨의 손에 시선을 빼앗깁니다. 손이 예쁘다는 말을 자주 듣지 않나요? <튜브> 도입부의 카드를 뒤집는 장면에서 당신의 손은 무슨 독립된 생물체 같아요. <복수는 나의 것>에서 수화하는 손도 표현적이었어요. <고양이를 부탁해> <복수는 나의 것>에서 담배를 쥔 손가락도 그랬고요.
=아무도 내 손에 관심이 없는걸요. (웃음) 사실은 저, 그래서 손을 앵글에 올리는 걸 좋아해요. 특히 클로즈업 찍을 때 얼굴에 손이 많이 가 있죠. 너무 여우 같나? (웃음) 지금도 말하면서 손을 많이 쓰잖아요. 반지는 안 껴요. 옛날에 무척 소중한 반지 잃어버린 뒤부터. 매니큐어도 안 하고요.
-배두나씨 마음에 꼭 들었는데 제작이 안 된 시나리오가 있나요?
=많아요. 항상 내가 참 좋다 싶은 시나리오들은 다 제작이 안 돼요. 하하. 하나 꼽으라면 정지우 감독님의 <두 사람이다>. 아주 재미있어서 꼭 만들어졌으면 했어요.
-기사를 보고 다른 기자의 말을 들어보면 함께 작업한 강동원, 김동완씨 같은 젊은 연기자들이 배두나씨의 조언을 무척 신뢰하고 따르는 것 같던데요.
=동원이는 데뷔작인 <위풍당당 그녀>를 할 때 제게 믿음을 가져서 저에 대한 신뢰도가 높은가봐요. 시나리오 볼 때 ‘이걸 선택하면 두나 누나가 실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는 말에 감동받은 적 있어요. 나를 그렇게 믿어주다니! 김남진 오빠나 다른 사람에게도, 연기야 제가 조언할 자격이 없지만, 작품 선택에 대해서는 의견을 질문받은 적 있어요. 그럴 경우 그 사람 입장에 서서 정직하게 말해주죠.
-그렇다면 본인은 동료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합니까?
=아니, 전 안 구해요. (웃음) 남이 뭐라고 해도 내가 아닌 건 아닌 거고, 할 수 있는 건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요. 언젠가는 한 배우가 완전 신인인데 주연 제의를 받았다고 하기에 하지 말랬어요. 넌 아직 극을 끌고나갈 연기력도 문제있지 않느냐고. 일단 무지 연기 잘하는 선배들 틈에서 매력을 따먹어라. 그렇게 몇편 하며 힘이 붙었을 때 작품을 이끌어가야지 네가 지금 주인공 하면 작품이 앞으로 나아가질 않는다고요. 그런데 정작 나는 남들이 말릴 때도 ‘아냐! 난 할 수 있어!’ 우긴답니다. (웃음)
-<괴물> 이후의 행보에 대해 상상하고 있습니까?
=<괴물>은 내년 7, 8월에 개봉해요. 다들 괴물이 일종의 비유라고 생각해서, 이를테면 송강호 오빠가 괴물 같은 남자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진짜 괴물이 나오니까 반전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다음 출연작이나 연기 스타일에 관한 저의 확고한 생각은, (잠깐 사이를 두고) 없고요. (웃음) <괴물> 개봉을 앞두고 있으니 시기가 제일 중요할 것 같아요. 지금은 저로서는 뭘 해도 신선한 상태고 꼭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더라도 다르게 표현하는 모험의 시기거든요. <괴물> 개봉 전에 드라마를 할까 해요. 저처럼 너무 마니아적인 애는, 가끔씩 대중의 즉각적인 반응을 볼 수 있는 드라마를 하면서 소통을 해주는 게 필요해요.
-생일이 (10월11일) 코앞이네요. 보통 생일을 어떻게 지내나요? 이번에는 특별한 계획이 있나요?
=지난해 생일에는 오사카에서 <튜브> 홍보를 했어요. 늘 그런 식으로 일을 하면서 외로움을 달래는 편이고요. 내 생일 축하하는 자리라는 것이 너무 민망해서 어린 시절 빼고는 한번도 생일파티를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이번 생일에는 서울에 있고 촬영은 없을 거예요. 전날인 10일에 <괴물> 포스터 찍거든요. 작은오빠(박해일)는 잘됐다고 술마실 궁리부터 하지 뭐예요. 포스터 찍고 ‘우리가 술을 먹어줄 테니’ 함께 생일을 맞이하자고 하기에 ‘됐거든!’ 그랬어요. (웃음) 극중에서 작은오빠랑 저랑 별로 사이가 안 좋아요. 선물 얘기요? 없죠, 물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