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원래 이런 애였니?” <소름>을 촬영하는 동안에 장진영을 처음 봤던 이들은 그녀가 말도 없고 표정도 없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사석에서도 장진영은 한동안 그런 모습이었다. 그들은 요즘 또 한번 놀란다. 반가운 배신이랄까. <소름>의 선영에서 벗어나 원기를 회복한 장진영은 더이상 차갑거나 어둡거나 건조하지 않다. 환하게 웃음이 핀 얼굴로 먼저 인사를 건네고, 조금 무안할 때는 호탕하게 ‘하하하’ 웃어젖히고, 카메라 앞에서 건들건들 터프한 포즈를 취해 보이는 장진영은 아무 그늘 없이 해맑기만 했다. 누가 언제 ‘저주’를 이야기했느냐는 듯이. 자의 반 타의 반 깔깔하게 메말라 있던 감성에도 음악과 책으로 기름칠을 하고 있는 중이다. “저기요, 다른 음악 들으면 안 돼요?” 분위기 좀 잡아보겠다고 스튜디오에서 선곡한 음악에도 장진영은 다짜고짜 퇴짜를 놓았다. 그리고 핸드백에서 쓰윽 CD 한장을 꺼내 건넸다.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이었다.
<소름>을 찍는 동안 장진영은 많이 아팠다. 실은 지금도 영화를 보면 아프다. 몇달 동안 장진영과 함께 산 510호 여자 선영의 아픔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탓이다. 오죽하면 축제 분위기여야 할 시사회장에서 “이 영화를 보는 게 너무 힘들고 아프다”는 우울한 고백을 했을까. 처음 <소름>의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장진영은 손사래를 쳤다. 자신이 조금도 알지 못하는, 너무나 극단적인 삶을 사는 캐릭터라, 체현해낼 엄두가 안 났던 것이다. 별로 아름답지 않은 정사신도 맘에 걸렸다. 그런데 이해하고 연민하다보니, 어느 순간 빠져들게 됐다. “아이도 잃어버리고 남편한테 얻어맞고 살다보니 사랑에 대한 믿음도 없어지고, 황폐해진 거죠. 그렇게 기구한 여자들은 삶을 포기하게 마련이잖아요. 퍼질러 앉아서 술이나 마시겠죠. 그런데 선영은 달랐어요. 삶에 대한 의지가 아주 강하잖아요. 시퍼렇게 멍든 얼굴로 편의점 아르바이트도 나가고, 벗어나보겠다고 새로 이사온 남자도 이용하고. 정말 강한 여자예요.” 네 번째 영화 <소름>이 장진영에게 특별한 또다른 이유는 ‘함께하는 작업’으로서의 영화를 알게 해줬다는 것. 윤종찬 감독은 시나리오의 기본 틀만 남기고 현장에서 배우 스탭들과 디테일을 바꿔가는 식으로 진행했는데, 실제로 장진영이 애드리브한 대사를 많이 채택했다. “헷갈려? 뭐가 헷갈려?” 같은 장진영표 대사는 편집실에서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소풍날 장기자랑에 나설 용기는 없었지만, 늘 마음은 굴뚝같았던 소녀는, 아주 우연히 영화를 만났지만, 이제 제법 적극적으로 살고 있다. 뒤로 물러나 있다가는 경험해야 할 것들을 그냥 흘려보낼 것 같아, 한번 덤벼보기로 했다고. “다른 세상이 있더라구요. 예전에 유명해지기 전에는 남들한테 눈길 주거나 신경 쓰는 게 싫었거든요. 남들은 유명해지면 그렇다던데, 웃기죠. 전 지금 더 많은 걸 느끼면서 살아요. 길거리 걸으며 사람들 구경하는 것도 좋아하게 됐어요.” 자신을 구경거리 삼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그건 보통 경지가 아니다. 그만큼 목과 어깨에서 힘을 빼고, 삶이 묻어나고 사람냄새 나는 연기를 하겠다는 뜻이리라. 영화계에서는 <소름>으로, 방송가에서는 김건모의 뮤직비디오 <미안해요>로 인기를 모으는 중이라, 요즘 부쩍 ‘러브콜’이 잦지만, 별 동요는 없어보인다. “많이들 기대하셔서 선택에 부담이 돼요. 다음엔 밝고 행복한 영화하고 싶다고 여기저기 말해놨는데, 조만간 다시 일해야죠.” 정통 멜로도 로맨틱코미디도 슬슬 욕심이 나고, 자신의 “남성미를 과시할 수 있는” 액션물에도 출연하고 싶다고. 부천영화제에서 페스티벌 레이디라는 우아한 감투까지 썼던 장진영이 “집에 있으면, ‘뭐 먹을까’ 하는 고민으로 하루의 절반을 보낸다”며 소탈한 일상을 이야기하는 걸 보면서, “모든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는, 멋있는 연기자가 되고 싶다”는 바람에 토를 달아주고 싶어졌다. 고지는 멀지 않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