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레미 아이언스라는 이름은 일단 환청부터 일으킨다. “롤.리.타.” 사랑하는 요정의 이름을 그가 한 글자씩 발음할 때 그 더없이 청아한 음향은 최고급 와인처럼 한 모금씩 우리의 위장에 스며든다. 다음으로 떠오르는 것은 그가 가진 100%의 망연자실한 표정이다. 사전의 형용사 ‘망연(하다)’ 항목에 그의 초상화를 넣고 싶을 정도다. <M. 버터플라이>의 갈리마르가 연인의 진짜 성별을 알아차릴 때, <데미지>의 플레밍이 사련(邪戀)의 추억을 곱씹으며 추레한 모습으로 골목을 휘적일 때, <로리타>의 험버트가 소녀의 허벅지에 감싸여 저항을 포기할 때, 제레미 아이언스의 얼굴은 폭풍에 날아가버린 집터를 응시하는 이재민의 그것과 같다. 완강한 간격을 유지하는 그의 코와 입 사이에 걸린 감정은, 경악이나 당혹감과는 매우 다르고 회한과도 미묘하게 다르다. 그것은 오로지 신에게 완전히 농락당한 인간의 망연함이다. 여러 영화 속에서 제레미 아이언스는 한때 많은 것을 가졌으나 모조리 잃어버린 남자를 연기했다. 심지어 거상 안토니오로 분한 <베니스의 상인>에서는 말 그대로 전 재산을 실은 배가 침몰한다.
따지고보면 <베니스의 상인>에서 알 파치노가 연기한 샤일록은 고리대금업자이고 진짜 ‘베니스의 상인’은 안토니오다. 샤일록과 안토니오, 두 인물의 양면성은 영화의 기둥과 들보다. 수전노 샤일록은 얄미운 채무자의 빚을 목숨으로 받겠다는 냉혈한인 동시에, 반유대주의의 탄압 속에서 존엄을 지키려 몸부림치는 인간이다. 한편 안토니오는 로맨틱한 우정을 위해 재산과 안위를 거는 신실한 인간인 동시에, 유대인 대부업자 얼굴에 침을 뱉고 개종을 강요하는 인종주의자다. 법정에서 샤일록과 대립하는 안토니오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베사니오의 마음을 두고 포셔와 경쟁한다. 따라서 <베니스의 상인>에서 모든 ‘거래’의 중심은 안토니오다. 그는 재판에서 승리하지만 모험이 끝나고 쌍쌍의 연인들이 침소에 들면 홀로 남겨진다. 그렇게 우리는 또 한번 제레미 아이언스의 망연한 표정을 본다. 영국의 베테랑 배우 제레미 아이언스에게 <베니스의 상인>이 첫 번째 셰익스피어 영화 출연작이라는 사실- <햄릿>의 그림자가 드리운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의 목소리 연기를 빼면- 은 가벼운 충격이다.
우리의 짐작과 달리 제레미 아이언스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셰익스피어 영화 경력 말고도 몇 가지 더 있다. 그에게 없는 첫 번째 자질은 호기심이다. 기숙학교 시절 소년 제레미는 늘 연극에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소년은 무작정 기다렸다. 누군가가 다가와 “너는 신처럼 말하고 천사처럼 생겼구나. 부디 연기를 해다오”라고 부탁해야 연기를 시작하는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4년이 흐른 뒤에야 제의가 들어왔다. 더 일찍 불러주길 바랐다는 아이언스에게 상대는 왜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냐고 반문했다. 연극을 하고 싶다면서 학기 초마다 나붙는 지원자 모집공고조차 눈여겨보지 않는 소년이 그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이언스는 지적 호기심도 없는 편이다. 그는 TV영화 <라스트 콜>에서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를 연기하면서도 그의 소설을 읽지 않았다. 그러고보면 근작 <빙 줄리아>와 <킹덤 오브 헤븐>의 캐릭터들은 자신과 무관한 일을 알려고 애쓰지 않는 아이언스의 일면과 잘 맞아떨어진다. <빙 줄리아>의 나르시시스트 고슬린은 선하고 유능한 사업가지만,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거나 알려들지 않는다. <킹덤 오브 헤븐>의 티베리아스는 발리안(올랜도 블룸)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지만 자기 직분이 끝났다고 판단하자 술탄의 대군이 몰려오건 말건 동지에게 총총히 안녕을 고한다. “수고하시게. 나는 그럼 이만 사이프러스로.”
미성년자에게 성애를 느끼는 교수(<로리타>), 한 여인을 공유하는 쌍둥이 산부인과 의사(<데드 링어>), 남자를 여자로 알고 열애한 외교관(<M. 버터플라이>), 아들의 애인과 섹스에 탐닉하는 정치인(<데미지>), 아내 살해 혐의를 받는 귀족(<행운의 반전>) 등등. 비위 약한 배우라면 마다할 역이 즐비한 그의 선택을 보고 “특이한 것만 모으는” 취향을 유추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비주류적인 감성은 제레미 아이언스가 갖고 있지 않은 또 한 가지다. 27년째 안정된 결혼과 사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아이언스는, “글쎄. 그건 내가 아니라 감독의 생각이다. 나도 아주 당혹스러운 노릇이었다”라는 식의 대답으로 기자들을 김새게 만들곤 한다. <베니스의 상인>에서 베사니오와 안토니오의 키스에 대한 견해도 마찬가지. “의논 끝에 안 하기로 했는데 조셉(조셉 파인즈)이 촬영 때 갑자기 입을 맞추어 나도 놀랐다. 꼭 필요했던 연기 같지는 않다”는 것이 아이언스의 시큰둥한 설명이다. 그의 반골 기질은 훨씬 사소한 데에서 발현된다. 제레미 아이언스는 47살 되던 해에 모터사이클 과속으로 면허를 정지당했다. 또한 고집스런 애연가인 그는 얼마 전 하바나 시가 축제를 방문해 “나이가 나이인 만큼 담배를 줄이려 한다. 대신 시가를 늘리려고 한다”고 말해 환호를 사기도 했다.
야망 또한 제레미 아이언스에게 없는 재산이다. “커리어라는 것은 내게 징역처럼 느껴진다. 바닥에서 시작해 사다리를 한칸씩 기어오르고 겨우 은퇴했다 싶으면 잠시 뒤 죽는 것이다. 별로 내키는 일이 아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베니스의 상인>에서 격하고 화려한 연기를 자랑하는 알 파치노의 샤일록이 부럽지 않았냐는 질문에 대한 아이언스의 답은 단호하다. “샤일록은 한번도 내가 갈망하는 역이 아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어떤 역을 갈망하는 일 자체가 드물다.” 자연스런 결과로서 제레미 아이언스는 대부분의 배우에게 유용한 에너지를 제공하곤 하는 예술적 허영도 거의 없어 보인다. 아니, 허영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연기와 출연작을 습관적으로 깎아내린다. <베니스의 상인>을 관습적인 작품이라고 평하는가 하면, <킹덤 오브 헤븐>의 경험을 두고 “찍는 동안 즐거웠다. 그 이상은 말할 게 없다. 어쨌든 리들리 스콧 감독은 생애 최고작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라고 쌀쌀맞게 정리하기도 했다. 그가 수치로 매긴 작업의 평균 만족도는 40%에 불과하다.
흔한 오해의 하나로 제레미 아이언스가 귀족적인 배우라는 믿음이 있다. 하지만 아이언스 본인에 따르면 그는 극히 중산층적인 인간이다. 어린 시절 그가 희망한 장래 직업은 수의사였다. 런던에서 도시의 장점을 누리고 돈도 넉넉히 버는 한편, 주말이면 시골의 별장에서 전원을 즐기고 동물들과 함께하는 이웃 수의사의 라이프스타일이 부러웠기 때문이다. 연기학교를 졸업할 무렵 제레미 아이언스는 전국을 도는 레퍼토리 극단에 들어가지 않았다. 1년이면 6개월 동안 방방곡곡을 헤매고 벌이도 시원찮은 생활이 내키지 않았던 그는 런던의 웨스트엔드 무대 아니면 영화가 갈 길이라고 처음부터 정했다. 그리고 욕실 보수, 정원사, 길거리 가수 등의 일로 생계를 이으며 오디션에 응하기 시작했다. 아이언스는 단언한다.“나는 너무 중산층적이다. 가족과 집과 대출을 원한다.”
알 파치노가 연기하기 위해 사는 배우라면 제레미 아이언스는 살기 위해 연기하는 배우다. 그는 배우로서 성공을 즐기고 완벽주의자로서 갖는 만성적인 불만과 그에 따른 노력을 즐긴다. 여러 인터뷰에서 밝힌 대로 그 과정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묘한 무심함, 자신의 일이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다. 제레미 아이언스는 그것이 건강하다고 믿는다. 비판과 찬사에 관한 그의 특이한 견해는 사물과 삶을 바라보는 초점거리 긴 시선을 드러낸다. “비판은 칭찬보다 유용하다. 만약 당신이 좋은 목소리를 가졌다면 모두들 목소리가 근사하다고 칭찬한다. 그러면 당신은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고 망하는 거다. 하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다. 그래야 우리가 신이 되지 않을 테니까.”요컨대 자연인 제레미 아이언스는 한순간 누렸던 지복(至福)을 잃고 허망함으로 남아 있는 나날을 지새는 영화 속 모습과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과 없는 것을 명징하게 인식하는 성공한 배우, 노련한 남자다.
어떤 문장도, 그의 육성보다 더 아름답게 제레미 아이언스에 관한 글을 맺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리무진의 길이, 스크린에 비친 얼굴의 크기, 주변 사람들의 친절한 평가 등 온갖 사소한 요소로 인해 길을 잘못 들 수 있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것들은 내 일의 진정한 본성에 대해 계속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내가 무대와 영화에서 진실과 접점을 잃는다면, 나의 진정한 자아와 진정한 감정을 잊는다면, 이 비쩍 마른 183cm의 몸뚱이가 갖는 중요함과 하찮음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때 나는 길을 잃을 것이다. 나는 악기다. 가능하면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이길 바라지만, 그보다 못한 악기일 수도 있다. 내가 내는 음향이 순수하지 않고 내 자신의 중요성을 잘못 저울질해 오도될 때, 나는 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