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vs 건달]
중년의 아저씨가 본 <타인의 취향>, 이 영화는 누구의 취향?
2001-08-01
글 : 고종석 (저널리스트)

첨에 뭘 본담, 하고 주춤거리는 내게 안정숙 여사는 <쥬라기 공원3>나 <타인의 취향>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그녀가 흘리는 눈웃음은 늘 내 마음을 산란하게 한다. 나는 <타인의 취향>을 골랐다. 그 영화가 내 취향에 맞을 거라는 예감이 엄습해서가 아니라, <쥬라기 공원3>가 너무 복작거릴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타인의 취향>도 한갓지지는 않았다. 적어도 내 전후좌우로는 빈자리가 눈에 띄지 않았다. 커닝을 하기 위해 집어든 팸플릿에는 <타인의 취향>의 감상 포인트가 등장 인물들의 내면을 암시하는 배경 음악들과 (영화 속의) 연극장면들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런 고전적 기호들을 해독할 감각기관이 없는 나는 이 영화를 그냥 산문적으로 보기로 한다.

‘타인의 취향’이라는 제목에는 속임수가 없었다. 정말, 취향들에 대한 영화였다. 그 취향들은 성(동성애, 프리섹스)에서 기호품(마리화나)과 애완동물(개)을 거쳐 그림과 벽지에 이르고 있었다. 우선 동성애. 나는 동성애자는 아니지만(이 비겁한 커밍아웃 봐라, 이성애자들의 눈이 무서운 거다), 동성애의 권리를 옹호한다. 아니 나는, 누군가의 말을 훔치면, 남자의 몸에 갇힌 레즈비언이다. 나는 내 몸 안에서 여성성을 느끼고, 여자 친구들과 있을 때 편안하다. 다음, 프리섹스. 나는 프리섹스주의자는 아니지만(이 졸렬한 커밍아웃 봐라, 아내와 자식들의 눈이 겁나는 거다), 섹스가 인간의 기본권 가운데 하나라는 데 동의한다. 영화 속에서, 보디가드가 직업인 프랑크는 자기가 30년 동안 300명의 여자와 자봤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운전기사 브루노는 자기 몫의 셈을 해본다. 그 결과 25년 동안 50명의 여자와 자봤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아직 해제 시점에 이르지 않은 기밀이다. 그 다음, 마리화나. 나는 마리화나를 피워본 적이 없지만(이 치사한 커밍아웃 봐라, 마침내 법의 칼날이 두려운 거다), 마리화나 소비의 합법화를 지지한다. 영화 속에서, 웨이트리스 마니는 부업으로 마리화나를 판다. 그걸 알고 타박하는 애인 프랑크에게 마니가 대꾸한다. 마리화나가 술보다 더 해로워? 담배보다 더 해로워? 마니의 주장대로 마리화나가 술이나 담배보다 덜 해롭다면(나도 그렇게 알고 있다), 술과 담배를 묵인하는 사회의 마리화나의 규제에는 뭔가 엽기적인 데가 있다. 이번에는 개. 나는 개를 키우지 않지만(이번 커밍아웃에는 비겁함이나 졸렬함이나 치사함이 없다), 개 키우는 사람들이 더러 부럽다. 그들이 개와 나누는 교감이 부럽다. 운수가 닿아 언젠가 단독 주택에서 살게 된다면, 한두 마리 키워보고 싶기도 하다. 물론 브리지트 바르도 같은 인종주의적 견권(犬權) 옹호자나 동물해방전선의 투사가 될 생각은 없다.

개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개고기를 즐기는 것도 취향은 취향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다소 고약한 취향이라고 생각한다. 개고기를 즐기는 것이 ‘사내다움’이나 문화적 주체성의 징표로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하긴 지금도 그럴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면 진저리를 치게 된다. 먹을거리가 부족해 개고기라도 먹어야 하던 시절이라면 몰라도, 다른 먹을 걸 두고 굳이 개고기를 즐기는 것을 고상한 취향이랄 수는 없다. 개고기를 즐기는 당신은, 개고기가 소고기나 돼지고기와 뭐가 다르냐고 물을 것이다. 다르다. 사람과의 감정 교류 폭에서, 개를 일반적으로 돼지나 소와 비교할 수는 없다. 그걸 경험주의자의 편견이란다면 더 할말은 없지만. 아무튼 개의 눈을 보고도 그 개의 고기를 입에 넣을 수 있는 사람이 나는 이물스럽다. 개고기를 꺼리는 것이 예컨대 바르도의 몰취향한 극우 문화제국주의와 내통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개고기를 먹는 것이 범죄는 아니므로 나는 그 취향을 존중한다. 그러나 내게도 눈살을 찌푸릴 권리쯤은 있다.

다른 취향에 대한 관용은 사회를 숨쉬게 하는 산소탱크다, 라고 이 영화는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영화 속에서 파리 출신의, 명문대학 출신의 비서 베베르와 그의 보스 카스텔라(그는 시골 출신의 자수성가한 CEO인 듯하다)가 화해하는 것도, 카스텔라가 그의 아내 앙젤리크(그녀는 자신의 취향을 남에게 강요하는 취향의 독재자이자 바르도를 닮은 견권 옹호자다)를 떠나는 것도, 카스텔라와 연극 배우 클라라가 우여곡절 끝에 사랑을 시작하는 것도 이 취향의 동력학을 통해서다. 건전한(!) 메시지다.

<타인의 취향>은 중년의 영화다. 중년의 카테고리를 벗어난 등장인물은 카스텔라의 아버지(노년!)와 조카(소년!)뿐이다. 그 중년의 등장 인물들 가운데 하나가 슬프게 말한다. 여배우 나이 마흔이면 실업자나 다름없다고. 마흔 넘어서 실업자였던 경험이 있는 나는 그러나 그 절망을 실감하지 못한다. 내가 아줌마 배우가 아니라 아저씨 글쟁이여서 그럴 것이다. <타인의 취향>은 감칠맛나는 영화다. 그러나 나는 자극적인 초고추장을 갈구한다. 이 영화는 아무래도 타인의 취향, 안정숙 여사의 취향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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