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흥식 감독의 세 번째 영화 <사랑해, 말순씨>가 오는 11월4일 개봉한다. 자잘한 우연들을 통해 남녀의 만남을 이뤄내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시간여행이라는 판타지 구조를 통해 구질한 모녀관계를 긍정적인 현실로 이해하고자 하는 <인어공주>에 이어 1980년을 배경으로 한 14살 소년의 성장기 <사랑해, 말순씨>는, ‘나도 80년대에 소년이었다’는 문장으로 서두를 뗀 많은 성장영화들과 궤를 같이하는 뒤늦은 편지다. 그 소년들에게 똑같은 모양의 상처를 남긴 시절을 자신만의 디테일하고 온기어린 손길로 매만진 박흥식 감독의 <사랑해, 말순씨>에 대해 영화평론가 심영섭과 남다은이 각각 지지와 비판의 의견을 보내왔다. 그리고 감독에게 직접 이 영화를 왜, 어떻게 만들고자 했는지 물었다.
심영섭이 <사랑해, 말순씨>를 지지하는 이유
인간에 대한 조용한 연민이 빛난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말순씨는 왜 한마디 유언도 없이 토끼 같은 자식을 남기고 죽어가는 걸까? 폐병으로 숨을 거두면서 말기암 환자도 아닌 말순씨의 입에서 ‘광호야, 너 밥하는 거 알지? 우리 광호 찬물에 손 담글 때마다 손 시려서 어떻게’ 한마디만 해주었어도 플러스 관객 50만, 이 대사 받고 광호가 한번만 더 울었으면 100만. 그런데도 박흥식 감독은 왜 그냥 밥하는 광호와 동생에게로 직행했을까? 고작해야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때처럼 아카시아 꽃잎을 뜯으며 ‘엄마 죽었다 아니다’ 꽃점을 쳐보는 소년의 시린 마음과 노란 조등만이 후미진 길거리 골목에 빠꼼하다.
느리고 편안한 박흥식표 리얼리즘
이게 바로 박흥식의 영화 세상이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처럼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강제로 퇴학 당한 아이가 학교 유리창을 몽땅 깨놔도 소년의 손에 쌍절곤은 없고, <효자동 이발사>처럼 시대를 그리지만 죽은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이 감독이 어깨에 각 세울 줄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마시라. 광호의 꿈에 나오는 1대3 대결의 멋들어진 액션 신처럼, 사실 얼마든지 멋부리고 콧물 눈물 넣자면 세련되게 맛깔스럽게 장면 장면 뽑아낼 수 있는데, 그걸 그냥 안 하는 게 바로 그이다. 연출만 보자면 소박함이 지나쳐 겸손해 보이기까지 하는 사람, 그게 바로 박흥식이다. 인간에 대한 박흥식의 태도이다.
풀들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한 박자 느린 박흥식표 리얼리즘은 그래서 보고나면 편안해지고 위안이 된다. 구원은 아니어도 치유의 힘이 생겨난다. <인어공주>를 보면서 나는 손과 말은 억세졌지만 여전히 꽃무늬 원피스를 좋아하는 내 어머니를 떠올렸고,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를 보고나서는 간절히 ‘나도 남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보았다. 인생이 늘 비가 내리는 진창은 아니라고, 또 다른 대궁 위에서 피어날 장미를 기다리는 편이라고. 그가 이 말을 하기 위해 희생하는 것은 호화롭고 재기 넘치고 신파적이고 세련되고 고급스런 가장 영화적일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박광수식 리얼리즘보다 사람들의 세세한 주름에 한뼘 더 가 있고, 이창동식 리얼리즘보다 한뼘은 더 환한 이러한 박흥식표 리얼리즘은 보는 이를 때론 편안하게 때론 정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용솟음치는 슬픔과 삶의 비애에 몸을 맡기게 한다. 그런데 <사랑해, 말순씨>는 이러한 일상성에 역사성을 더하려는 그의 속내가 비쳐지는 첫걸음을 뗀다. 한국영화 역사상 초유라는 거창함도 없고 실제로 처음도 아니지만 여전히 박흥식다운 태도로 말이다.
‘아줌마’를 포옹한 소박한 판타지
행운의 편지가 입 속의 검은 잎처럼 온 나라를 돌림한다. 겉으로는, 제목만 보아도 사람들에게 행운을 준다는 편지지만 사실 속을 보자면 모월 모시까지 주변의 몇몇 사람에게 답장을 안 하면 나쁜 일이 일어난다는 일종의 협박편지나 다름 없다. 125호 편지를 받은 사람은 단조로운 글 베끼기의 노동을 감수하면서 그 불행을 126호에게 전가시켜야 한다. 나라의 가장 높으신 어른이 유고를 당했는데 축구를 했다고 벌을 서고, 얼마나 오래 그 자리에 걸려 있었는지 얼굴 자국이 벽에 새겨질 정도로 지워지지 않는다. 오래된 나랏님의 죽음과 새로운 권력자가 등장하는 그 시기. 행운의 편지와 아버지의 부재로 상징되는 80년대에 대한 은유는 <사랑해, 말순씨>의 전반에 광범위한 뒷배경으로 남아서 결국 소년에게 끝끝내 자신의 삶에 불어닥친 역사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이 영화에서 감독은 광호의 삶과 80년대를 직렬로 연결시키지 않는다. 이 시점에서 자신의 불행에 대해 전형적인 미신적 사고를 하는 광호와 그 뒤편에 점점이 박힌 역사적 장치를 연결시켜야 하는 쪽은 오히려 관객의 몫이다.
1980년의 그 짧았던 봄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끝날 광호의 이른 봄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해할 수도 없고 관심도 없었던 그 역사성은 영화의 특정인이 아니라 결국 모든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고야 마는 것이다. 전라도 사투리를 지웠던 광호의 첫사랑 누나는 황급히 광주로 내려갔고, 돈 벌러 사우디로 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는다. 시도 때도 없이 “바~알길을 돌리려고 바람 부는 대로 걸어도”를 읊조리던 이웃집의 재명이 형은 어디론가 끌려가고, 손가락이 없다는 이유로 학생들의 타자가 되었던 철호는 퇴학을 당한다. <살인의 추억>에서 <효자동 이발사>까지 <사랑해, 말순씨>의 역사성은 새로울 것은 없지만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삶의 구석구석에 행운의 편지가 풍기던 불운이 날선 불안감으로 서서히 삶을 마모시켜갔던 그 시절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곤 마침내 깨닫게 된다. 1980년대 후반,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행운의 편지를 받았다.
그 흐린 삶의 개울물 한가운데 박흥식의 판타지가 흘러간다. <나도 아내가…> 때부터 늘 박흥식의 영화를 지키고 있는 이들 판타지는 삶에는 마법이 필요하다는, 아니 마법이 아주 쬐금은 있을 수 있다는, 감독의 태생적인 온기에서 흘러나오는 감로수같이 보인다. <나도 아내가…>에서 설경구가 펼쳐보이는 마술로 시작해 <인어공주>에서 20대의 어머니를 만나는 아찔한 상상력까지. 이번 <사랑해, 말순씨>에서는 광호에게 몽정을 일으키는 성적 판타지로 등장하는 이러한 장치는 광호 자신의 삶에 유일한 탈출구가 된다. 그리고 그 판타지 장면에서만은 박흥식 감독은 자유자재로 자신의 영화적인 역량을 시험해보는 것 같다. 처음 영화를 찍어보는 사람처럼 틸트 숏을 쓰고 카메라를 거꾸로 돌리고, 컷을 쪼갠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너무 소박한 판타지들. 그러나 그것이라도 있어야 살아가는 삶의 모습과 참 많이 닮아 있는 게 바로 박흥식의 판타지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박흥식의 영화에서 가슴 깊이 전기가 흐르는 시점은 늘 그의 여성들을 볼 때다. 뽀글뽀글한 파마 머리에 맨손으로 쥐를 때려잡고, 아이가 먹다 남긴 밥을 주워 먹는 어머니. 세수할 땐 눈썹이 없는 얼굴이 드러나고 아마도 화장품 외판을 하며 수도 없이 그 지워진 눈썹에 분칠을 해야만 했을 어머니. 버스를 타면 잽싸게 엉덩이만 비비고 앉아 남는 자리에 아들을 앉히고 싶어하는 어머니. 다른 사람들이 ‘누구냐’고 물어본다면 모르는 사람이라고 시치미를 떼고 싶은 그 여자도 사람이라는 거다. 사우디에 가서 남편이 없는 빈자리를 그저 술 한잔의 시름과 곗날 막춤을 추는 것으로 때우는 저 여자는 분명 어딘가 수도 없이 본 얼굴을 지녔다. 그건 <인어공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주인공 연순(고두심)은 목욕탕에서 때를 밀며 시도 때도 없이 침을 뱉는데, 알고보면 그건 바다에서 자맥질하던 시절부터 습관이 몸에 밴 것이다.
박흥식의 여성들은 가장 매력없는 ‘노동하는 여성’으로 탈근대의 시대를 살아나간다. 다소 중성적이고 남성성이 외화되면서 가족 이기주의와 모성의 신화에 함몰되어가는 그 ‘아줌마’라는 계층, 여성적 매력을 잃어버린 불가촉천민을 가장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것도 그이다. 사실 노동하는 여성이 고달픈 까닭은 그런 그녀를 아무도 도와주지 않기 때문이다. <인어공주>의 아버지는 나쁜 아버지는 아니지만, 가족들에게 뒷모습으로 남아 있는 이삿짐 뒤켠에 세간살이와 함께 실려가는, 말 그대로 그 자신이 이 가족에게는 ‘짐’인 아버지이다. 광호의 아버지는 아내가 죽어가는데도 끝끝내 사우디에서 돌아오지 못한다. 그들도 어쩔 수는 없고, 여자들도 어쩔 수 없이 아줌마가 되어가고. 그 어쩔 수 없는 것을 알게 되는 나이가 되어 박흥식의 영화를 보면 볼수록 그의 영화는 촉촉해진다.
이 영화를 보면 건강해진다
그래서 <사랑해, 말순씨>가 왠지 <개 같은 내 인생>이나 <아빠는 출장중> 같은 영화들과 매 다를 바 없는 약호화된 성장 영화의 공식을 너무 뻔히 그렸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은 모성주의의 신화에 여성을 가두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를 도저히 미워하지 못하겠다는 지점에 이르게 만든다. 그건 인간에 대한 조용한 연민, 혹은 그 인간을 위로하고픈 그의 소년 같은 진심 때문이다. 또 그 진심을 그저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그의 낮은 자세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사랑해, 말순씨>를 보고나면 건강해진다는 이창동 감독의 말은 참으로 정확하다고 본다. 여기에 은유란 없다. ‘사랑해, 말순씨.’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며 사랑한다고 부르는 여기에 다른 것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아마 세상의 모든 감독들이 오즈 야스지로를 꿈꿀 때도, 나루세 미키오로 남을 사람이 박흥식이다. 모든 감독들이 <400번의 구타>를 만들려고 할 때도 <사랑해, 말순씨>를 만들 사람이 박흥식이다. 소년성과 일상성. 박흥식의 미덕이자 한계인 ‘작은 풀들로 가득한 세상’, 한번만 이쁘게 봐주자고 어쩔 수 없이 또 이렇게 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