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사랑해, 말순씨> 찬반양론 [2] - 남다은 비평
2005-11-10
글 : 남다은 (영화평론가)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장 의아한 점은 이것이다. 왜 <사랑해, 말순씨>일까? 왜, <사랑해, 엄마>가 아니라 <사랑해, 말순씨>일까? 영화를 보기 전까지 별다른 사전 지식이 없었으므로, 나는 박흥식은 이제 엄마가 아닌, 엄마의 ‘이름’을 부르고 있구나, 했다.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고, 말순씨라고 부르는 것의 그 의미심장함. 아마도 그는 <인어공주>에서 매우 긍정적인 의미로 한 발자국 나아간 게 분명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난 뒤, 동일한 제목이 다른 의미로 다시 의아해진다. “사랑해, 말순씨”라고 말하는 자는 누구인가? 왜 하필이면, “사랑해, 은숙(주인공 광호가 짝사랑해 마지않던 여인)씨” 혹은 “사랑해, 내 십대의 추억”이 아니라, 말순씨란 말인가? 이 영화에서 말순씨가 다른 인물들에 비해 그다지 특별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음을 깨달은 순간, 나는 더욱 궁금해졌다. 단순히 관객 동원용이었나, 아니면 말순씨를 연기한 문소리 때문이었나. 우습지만, 이 이상한 제목에 대한 집착에서 이 글의 그림은 시작된다. 그러니까, <사랑해, 말순씨>라는 영화가 반드시 <사랑해, 말순씨>라는 제목을 달아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던가.

소년성장영화 클리셰의 반복

영화가 시작된 지 얼마지 않아, 나는 말순씨가 등장하는 장면이 교복을 입은 까까머리 소년의 장면에 양적인 측면에서 현저히 뒤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불길했다. 이건, 말순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또 소년의 성장기에 대한 이야기란 말인가! 최근 우리나라 소년성장기영화의 클리셰. 폭력적인 학교, 짝사랑, 성적 호기심, 도색잡지, 적당한 반항심, 그리고 박정희의 사진과 전두환의 목소리, 혹은 그들의 그림자. 19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를 배경으로 하는 <말죽거리 잔혹사> <친구> <해적, 디스코 왕 되다> <품행제로> 등에 반복 등장하는 이미지들. 이 영화들은 분명 과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들이 재현하는 시대성은 역사가 제거된 이미지이다. 사진과 라디오와 텔레비전에 갇힌 박정희와 전두환의 얼굴, 음성은 박제된 배경으로 소년들의 성장기에 일종의 면죄부를 주거나 연민을 느끼게 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소년과 역사는 만나지 않는다. 동일한 시절, 동일한 이미지로 돌아가는 이 감독들은 이 기형적인 성장기영화 속에서 소년과 역사의 성장을 멈추게 하는 역설적인 결과를 창조한다. 심지어, 나는 이 감독들이 두 권력자들의 이미지와 목소리를 아무런 사유없이 전면화하고 소비하는 과정에서 그 시대에 대한 자신들의 부채의식을 지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한다. 이건 최근 소년성장영화의 무언의 공식이었다. 그런 점에서는 <사랑해, 말순씨>도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그렇고 그런 소년의 성장기영화라는 전제를 인정하기로 하고, 그 틀 내부에서, 그 틀의 전형성을 균열할지도 모를 말순씨와 소년의 관계를 자세히 뜯어보기로 했다. 말순씨에게 집중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아마도 말순씨와 소년의 특별한 관계가 드러나는 순간이 있겠지. 단순히 아들에 대한 엄마의 모정이라든가, 엄마에 대한 아들의 애증이나 그리움 이외에 어떤 유대관계가 존재하지 않을까. 실제로 영화 속에서 아버지는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건, 이 자리를 말순씨가 차지하기에 그녀는 너무 구김살이 없고(그녀는 화장품 외판으로 생활을 책임지는 가장임에도 ‘아버지’ 같은 권위가 없다), 그렇다고 아들 광호가 차지하기에 그는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너무 어리다(광호는 철없는 말순에게 ‘아버지’처럼 충고하지만 그건 언제나 ‘처럼’일 뿐이다).

말순씨와 광호는 모두 아버지의 자리를 번갈아 맡으며, 그 자리의 주인이라고 믿어지는 누군가를 그리워하지 않으며(광호와 여동생은 단 한번도 아버지가 그립다는 말을 하지 않으며 말순이 병에 걸렸을 때도 그들은 아버지에게 편지하지만 답장은 오지 않는다), 그 자리의 권위를 지우며 공존한다. 그런데 영화는 안타깝게도 이처럼 흥미로운 조건 속에서 이 둘의 관계가 재미있어지는 순간들을 찾아내지 못했다. 말순씨와 광호가 친구처럼 싸운다거나, 함께 맥주를 마시고 취한 장면만으로 이들의 특별한 관계가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두 캐릭터와 그들의 조건은, 미약했으나 신선했던 가능성을 묻어버리고 뻔한 운명과 상황의 틀에 의존하기로 결정한다. 그 필연적인 상황이란 말순씨의 불치병, 그녀의 죽음,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예견되어 있었던 죽음이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없이 말순씨, 혹은 그녀와 광호의 관계를 다시 성장기의 철저한 틀 내부로 끌고들어올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이 지점에서 <인어공주>에 대한 미련, 상투성을 버린 관계에 대한 그리움 또한 잊기로 했다.

살아남아서 성장한 소년은 비겁하다?

그리하여 다시 성장의 이야기로 돌아와야 한다면, 이 영화의 흐름은 소년이 썼던 ‘행운의 편지’를 중심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어느 날, 소년 앞에 도착한 행운의 편지는 다른 누군가에게 부치지 않으면 불행을 몰고올 편지이다. 소년은 불행을 막기 위해 편지를 다시 쓴다. 그 편지의 수신자는 소년을 귀찮게 하던 다운증후군 친구 재명, 창피한 엄마, 소년에게 동경과 두려움의 대상인 같은 반 반항아, 그리고 몇몇을 지나, 마지막 수신자는 전두환. 그런데 그 편지가 수신자에게 전달되는 순간, 소년은 답장은커녕 그 편지의 존재감조차 믿지 않을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낸 것을 후회한다. 소년은 그들에게 다가올 불행이 걱정스럽다.

재명과 엄마와 반항아 친구에게서 멈춘 편지는 불행이 되어 돌아온다. 재명은 변태 짓을 일삼다 어느 날 갑자기 연행되고(그런데 감독은 굳이 재명을 다운증후군으로 설정하여 거기에 바보 같고 변태적인 이미지를 부여한 이유가 무엇일까), 반항아 친구는 급우의 돈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퇴학당하고, 엄마는 결국 죽는다. 그리고 소년이 청와대로 편지를 보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전두환만은 멀쩡하다. 나는 여기서 뜬금없이, 그 편지의 발송, 돌아옴의 의미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영화는 혹시 끊임없는 편지의 흐름을 당대의 억압적 권력에 대한 알레고리로 상정한 것이 아닐까. 그 권력의 언어, 실체없는 위협의 호명에 답하는 순응적인 인간들은 살아남고, 권력의 부름을 거부한 세 사람은 처벌받았다는 것일까. 그래서 감독은 실체없는 권력에 굴복한 소년의 살아남음을 통해, 지금 우리의 이 비겁한 살아남음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상상은 끝없이 이어졌지만, 영화의 방향은 점점 다른 쪽을 향하고 있었다. 소년의 죄의식은 자신이 편지를 다시 써서, 타자에게 그 불행을 전가하며 스스로의 불행을 지연시켰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특정한 ‘그들’을 수신자로 정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소년은 그들의 불행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과 별개로, 영화의 후반 엄마에게서 멈춰진 편지를 다시 누군가에게 써 보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영화가 소년의 죄책감을 행운의 편지와 연결시키는 과정에서 소년이 진정 지녀야 할 죄의식을 지우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소년은 재명이 연행되는 순간, 재명의 마지막 구원의 요청에 답하지 못했고, 친구의 무죄를 목격했음에도 끝까지 변명해주지 않았으며, 엄마에게서 일찍이 시작되었던 병의 그림자를 알아채지 못했다. 영화는 소년의 죄의식은 어떤 외부적 힘, 행운의 편지에서 시작되기보다 소년 내부에서 시작되어야 함을 모른 척하고 있다. 왜? 그건 소년이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외부의 힘에 의해 상처를 겪으며 성장하는 것이 이 시대, 소년성장영화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화의 후반부, 퇴학당한 친구가 학교 창문을 깨며 뚝뚝 피를 흘릴 때, 엄마가 화장실에서 뻘건 피를 쏟을 때, 두려움 가득한 소년의 눈빛은 의미심장하다. 타자의 몸에서 흐르는 피, 타자의 상징적인 죽음. 영화는 기어이 주변 인물들 중에서도 상징계의 경계에 선 자들, 장애인, 피를 쏟는 병자 엄마, 그리고 끊임없이 법과 충돌하는 존재를 죽이고서 소년을 상징계의 주체로 인도한다. 혼자 살아남은 소년은 과연 이 무지막지한 죄의식을 어찌할 것인가? 영화는 여기서 마지막 판타지 혹은 꿈장면을 삽입한다. 죽은 엄마와 떠나간 재명, 퇴학당한 친구, 동생, 고향으로 돌아갔던 첫사랑 은숙이가 집 앞 마당에 모여 평화롭게 웃고 춤을 춘다. 희생되었던 타자들이 모여 소년의 죄의식을 쓰다듬고 소년의 성장통을 축하해준다. 난데없이 등장한 이 장면 하나로 영화는 소년의 죄의식을 말끔하게 봉합하고 있다. 이제 <사랑해, 말순씨>의 말순씨는 곧 재명, 퇴학당한 친구, 소년의 성적 환상을 채워주던 은숙씨 혹은 그 시절이어도 상관없다. ‘말순씨’는 특이성을 가진 그 누군가가 아니라, 소년의 성장을 위해 기꺼이 희생당한 모두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 이름을 부르는 자가 소년이라는 사실뿐이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소년은 교복을 고쳐 입고 모든 상처가 아문 얼굴로 우리를 향해, 영화 속 누군가가 아닌, 영화 밖 우리를 향해 말한다. “저, 이제 3학년이에요.” 그 순간, 그의 이기적이고 폐쇄적인 성장에 어떤 식으로든 공모한, 영화 밖 우리 중의 하나가 된 나.

성장기의 고통을 박제하지 말길

덧붙이며, 우리는 영원히 성장한다. ‘성장기영화’가 아픈 건, 현실의 타락한 내가 그 시절의 철없는 순수함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그건, 세상 모든 것을 가슴에 새겼던 그때 그 정신과 육체와 마음의 예민함을 여전히 잊을 수 없기 때문에,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아픈 것이다. 그러니 제발 피 흘리는 과거를 반복 박제하여,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쉬운 선택으로 만들지 않길. 성장기를 추억의 신화에서 꺼내길. 아픔과 고통의 그 순간을 정면으로 대면할 자신이 없다면 결코 다시 돌아가지 말길.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