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스크린 속 나의 연인] <에비타>의 마돈나
2005-11-10
<에비타>

미국의 팝계에서도 도발적 섹시함과 성의 자유분방한 표현으로 천박하다고까지 했던 마돈나. 그런 그가 1995년 영화에 출연한다는 발표 직후, 미국 연예계가 떠들썩했던 기억이 난다. 나 역시, 출연 영화가 <에비타>이고, 맡은 배역이 다름 아닌 아르헨티나의 국모 ‘에비타’라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르헨티나 정부의 엄청난 항의가 이어졌다. 부다페스트의 대주교는 마돈나의 교회 입장을 금지하기까지 했다.

‘에비타’는 이미 1976년 세계적인 뮤지컬 작곡가 엔드류 로이드 웨버에 의해 뮤지컬로 만들어졌다. 뮤지컬 <에비타> 역시 큰 이슈가 되었는데 정치적 배경을 소재로 한 뮤지컬이 그간 브로드웨이의 불문율과 달리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울지 마오 아르헨티나여(Don’t Cry for Me Argentina)’라는 곡으로 유명세를 탔고, 1981년부터 수 년 간 브로드웨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작품이다. 20년 가까이 영화로 기획되면서 켄 러셀에서 올리버 스톤, 메릴 스트립에서 미셀 파이퍼에 이르기까지 내로라라는 감독과 영화배우의 이름이 거론됐지만 정작 영화로는 만들어지지 못해 더욱 그러했다.

‘에비타’라는 이름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에바 페론’을 존경의 뜻으로 불렀던 이름이다. 사생아로 태어난 그가 삼류 나이트클럽의 댄서를 거쳐 영화배우로 데뷔했던 1944년, 극적으로 후안 페론을 만나게 된다. 민중 혁명으로 후안 페론이 대통령에 추대되면서, 아르헨티나의 퍼스트 레이디가 된 에바. 그는 소외당한 민중들 편에 서서 기금을 모으고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하면서,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한 나라의 영부인이자 부통령의 역할까지 수행했다. 그러다 1952년 암 말기 진단을 선고 받고서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고작 그의 나이 33살이었다.

설도윤/뮤지컬 제작자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에비타를 마돈나는 어떻게 연기할까? 대사 없이 노래로 이루어진 오페라타 형식의 영화라는 점에 막연한 기대감을 가진 나는 개봉 첫 날 스크린 속의 에비타를 만나기 위해 일찌감치 극장에 자리했다. 어린 시절에서 앳된 처녀의 모습으로 나타난 마돈나는 실제 나이와는 상관없이 자연스러웠고, 시골뜨기 처녀가 클럽 가수 아구스틴 마갈디를 꼬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진출하면서 사진작가, 군인, 권력의 실력자 등 많은 남자들을 상대하는 모습에선 연민의 정을 느끼게 했다. 광장에 모인 수많은 지지자들 앞에서 ‘울지 마오 아르헨티나여’를 부를 때는 우아하고 아름답기까지 했다. 마돈나의 노력과 끼가 백분 발휘되며 에비타의 이미지를 재현해 낸 장면 장면이 나의 가슴을 움직였다.

사실, 너무나 도발적이고 유니섹슈얼한 이미지 때문에 ‘스크린 속 나의 연인’으로 마돈나를 소개하기에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에비타>에서 만난 그는 아직도 나의 마음 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다.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들이 에비타로 이름 붙인 갖가지 상품들을 개발하고, 칼 라거펠트, 존 갈리아노 등 세계 유명디자이너들에 의해 ‘에비타 룩’이 새로운 유행으로 생겨나고, 그에 관한 책들이 출판되는 등 에비타의 인기는 여전히 식을 줄 모르고 있다. 이 역시 마돈나가 <에비타>에서 보여준 강력한 이미지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자유분방하고 자신 있는 모습으로 이제 40대 후반으로 치닫고 있는 마돈나. 그녀를 <에비타>처럼 영화에서 다시 만날 수는 없을까?

설도윤/뮤지컬 제작자(설&컴퍼니 대표)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