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이누도 잇신 감독을 만나다 [2]
2005-11-12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사진 : 오계옥

노인을 통해 역사와 현재를 말한다

<히미코의 집>
<터치>

<금발의 초원>은 20대의 꿈을 꾸는 80대 노인의 사랑 이야기다. <시니바나>(2004)는 양로원에 들어간 노인들이, 마지막 열정으로 은행금고를 터는 이야기다. <히미코의 집>(2005)은 게이 노인들이 모인 집에서 벌어지는 이해와 용서의 이야기다. <시니바나>가 영화사의 제의로 만들어진 영화라 해도, 이누도 잇신의 영화에서 일관되게 ‘노인’이 중요한 상징으로 등장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누도 잇신의 영화에서, 노인은 역사의 체현자로서 존재한다. “영화에서는 주인공의 시간이 보인다. 거기에 노인이 등장하면, 단지 그 인물의 시간만이 아니라 영화의 시간이 확장된다고 생각한다. 그가 살아온 만큼의 역사가, 그 영화에 더해지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영화의 폭이 넓어진다. <금붕어의 일생> 역시 1년2개월을 통해, 금붕어의 긴 역사가 보인다.”

역사는,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증명이다. 역사를 통해, 현재가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누도 잇신은, 자신의 영화 속에서 집요하게 ‘역사’를 말한다. 그것은 결국 일본의 현재를 말하는 것이다. “일본영화는 일본 관객과 너무 멀어졌다. <살인의 추억>을 좋아하는데, 그 안에서 다루는 정치 이야기는 외국인이 봐도 전해지는 것이다. 요즘 미국영화는 재미가 없다. 아메리칸 뉴 시네마 때에는, 그들도 자신의 미국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단지 세계에 팔기 위한 영화와 영화제를 위한 영화밖에 만들지 않는다. 좋은 영화는 자기가 사는 나라에 대한 충실한 리포트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일본이 포기한 부분을 보여주고 싶다”

이누도 잇신은 영화제를 위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아니다. 그는 지금의 일본을 보여주는 영화를 원한다. 단순한 리얼리즘의 태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의 리얼리티란, 단지 일상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분명히 생각이란 것도 존재하고 있다. 그걸 비추는 것 또한, 판타지 역시 리얼리티다.” 광고에서 숙련된 이누도 잇신의 영화는, 스타일리시하면서 유연하고 섬세하다. 좋아하는 영화들 역시 그렇다. “소학생 때는 빌리 와일더를 좋아했고, 뒤에 마카로니 웨스턴과 샘 페킨파를 좋아했다. 나이가 들면서는 오즈 야스지로가 좋아졌다. 가족, 부부애를 보여주며 거리감, 고립감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구로사와 기요시처럼 70년대 미국 공포영화도 좋아한다. 아메리칸 뉴 시네마에서, 액터즈 스튜디오에서 배운 알 파치노, 로버트 드 니로, 로버트 듀발 같은 배우들이 연기를 대하는 태도 같은 것을 좋아한다.” 그런 다양한 열정이, 작은 사랑 이야기에서도 한없이 깊은 여운을 만들어낸다. 그러면서도 결코 ‘역사’와 ‘현재’를 잊지 않는다.

이누도 잇신은 지금의 일본이 노인 같다고 말한다. 철없는, 자신만을 내세우는 노인. “일본에 노인과 젊은이가 있다면, 오히려 노인이 젊은 일본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일본은 너무 늙어버렸다. 게다가 노인으로서의 존재증명을 하려고 발악하는 것 같다.” 앞으로 60년대의 청춘을 그린 영화, 모녀의 이야기, 고양이를 키우는 여성 만화가를 그린 영화 3편이 예정되어 있다는 이누도 잇신. 그가 앞으로 만들고 싶은 영화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젊었을 때의, 청춘을 그린 작품이다. “꿈과 실패, 좌절이 있는, 지금의 일본이 포기한 부분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 노인의 현명함이 바라보는, 꿈과 열정 그리고 좌절이 펼쳐지는 이야기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이후 작품들

<히미코의 집>에서 <터치>까지

아시아인디영화제에서 상영한 <히미코의 집>은 게이 노인들만 살고 있는 공동체에 들어가는 여인의 이야기다. 어머니를 버리고 유명한 게이 바 히미코의 주인이 된 아버지를 증오하는 사오리. 죽어가는 아버지를 돌봐달라고 온, 아버지의 젊은 남자 애인. 결코 이해하고 싶지 않은 공간 안에서, 사오리는 다른 세계를 만나게 된다. 5년간 시나리오 작업을 한 <히미코의 집>은 전형적인 이누도 잇신 표 영화다. “처음엔 내가 좋아하는 닐 사이먼의 연극처럼 웰 메이드로 가고 싶었다. 그런데 계속 고치면서, 그러면 거짓말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포기했고, 결국은 다른 영화가 되었다.” <히미코의 집>은 대중적으로 친근한 영화는 아니다. ‘메종 드 히미코’라는 기묘한 공간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충돌하면서 정서적인 울림으로 가득한 자장이 만들어진다. 전작들이 다소 판타지적인 터치로 이해와 사랑을 말했다면, <히미코의 집>은 리얼하고 치밀한 터치로 이해와 용서라는 주제를 파고든다. 해답보다는 그 문제 자체를 지켜보라는 듯이.

<터치>의 원작 만화
<터치>

아다치 미쓰루의 걸작 만화 <터치>. 81년부터 연재된 <터치>는 ‘소녀들이 보는 소년만화’이며 ‘열혈만화를 끝장낸 만화’로 한 시대를 풍미한 걸작이다. 그로부터 2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워낙 원작의 열혈 팬이 많아서 거의 고치지 않았다고 이누도 잇신은 말했다. 하지만 “소녀만화가 일상을 재미있게 그린다면, 소년만화는 영웅이 등장하는 비일상을 그리는 것이 많다. 아다치 미쓰루는 일상을 소년만화에 끌어들였다”고 예리하게 말하는 이누도 잇신이 그려내는 카즈야와 타츠야, 그리고 미나미의 일상은 정말 궁금하다. 또한 이누도 잇신은 <히미코의 집>을 막 끝내고 피곤한 상태였지만,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의 나가사와 마사미가 캐스팅되었다는 말에 당장 수락했다고도 했다. <금발의 초원>과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이케와키 지즈루의 매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던 이누도 잇신이, 청순한 나가사와 마시미의 매력을 어떻게 그려냈을지도 주목된다. 만인의 연인 미나미의 이누도 잇신 버전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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