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아침 기온이 올 ‘가을’ 들어 가장 낮은 ‘0도’를 기록했다는 지난 15일, “‘얼어 죽을 놈의’ 가을일세”하며 시덥지 않은 농담 따먹기로 겨울을 실감하다가 한 친구가 대뜸 이런 말을 했다. “나도 농촌 총각 붙들어서 결혼이나 해버릴까?” 옆구리가 시린 계절, 짝 없는 과년한 처자의 싱숭생숭한 마음을 모르지 않지만, 농촌 총각을 잘 알지도 못하는 서울 여자가 난데없이 웬 농촌 총각? 의아하던 차에 요즘 가장 잘 나가는 두 남자 배우가 지고지순한 농촌총각으로 등장하는 영화 두편이 입길에 올랐다. 바로 황정민 주연의 <너는 내 운명>과 정재영 주연의 <나의 결혼원정기>이다.
지난 9월 개봉한 <너는 내 운명>과 23일 개봉하는 <나의 결혼원정기>에서 두 배우는 각각 서른 여섯과 서른 여덟 살이 되도록 결혼을 못한 농촌 노총각 역을 맡았다. 하지만 늦게나마 일단 제 짝을 찾자, 여자의 직업(티켓 다방 아가씨)도 국적(북한)도 불문하고, 건강(에이즈)도 신분(탈북자)도 상관없이 일편단심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며 극적인 해피엔딩을 이끌어낸다. 물론 농촌 총각을 그런 식으로 그린 영화나 드라마는 예전에도 많았다. 하지만 정상급의 남자배우들이 출연하는 대중적인 영화라는 점에서, 이 두 영화는 농촌 총각에 대한 판타지를 좀 더 대중적으로 자극하는 것 같다.
농촌 총각과 결혼하겠다던 친구는 자신의 뜬금없는 발언에 대해 이런 분석을 곁들였다. 문장을 약간 다듬어 요점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여자도 독립적인 인격체로 존중받을 수 있는 시대에 사는 것이 기쁘지만, ‘남자한테 기대거나 사랑에 목매달면 안 된다’는 자의식이 가끔은 좀 버겁다. 게다가 어차피 기댈 생각도 없지만 남자들이 노골적으로 ‘너 나한테 기댈 생각 말아라, 쿨 하게 만나고 깔끔하게 개인 플레이 하자’는 식으로 나오면, 오만정이 떨어지고 허전해지는 마음을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럴 때, ‘짠~’하고 스크린 속에 등장해, 헌신적으로 한 여자만 사랑하는 농촌 총각들을 보면 닭살을 타고온 몸에 퍼지는 감동을 걷잡을 수 없다는 부연 설명이 뒤따랐다.
개인적으로 그런 남자를 무지 밝히고 이런 영화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영화배우 정재영이 지난 11일치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던 것처럼, 영화 속에 등장하는 순진무구하고 지고지순한 농촌 총각의 이미지는 허구다. 오히려 두 영화에서 주인공의 친구로 등장하는, 적당히 여자도 밝히고 잇속도 챙길 줄 아는 ‘조연’ 농촌 총각들의 모습이 21세기 농촌 총각의 현실에 좀 더 가깝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연 농촌 총각들에게 자꾸 순진무구와 지고지순의 굴레를 씌우는 것은,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이 동양의 여자들을 순결과 순종의 울타리에 가뒀던 것과 같은 맥락이 아닐런지. 여기에 헌신적이지 않은 현실 속 남자들에게서 잠시 도피하고 싶어진 도시 여자들의 기대심리가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면서, 농촌 총각들은 ‘현실은 여전히 도시 여자들로부터 외면받지만, 영화와 상상 속에서는 점점 더 허구적인 이미지에 갇히는’ 모순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까닭에, 농촌 총각의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정형화시키고 그들을 타자화하는 시선에 ‘살짝’ 우려를 표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