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사운드’라는 이름으로 10편의 영화를 소개한다. 이 리스트는 한국 영화사에서 미학적 또는 기술적으로 최상이자 최고에 도달한 사운드 모듬이 결코 아니다(그렇게 완벽한 평가를 받는 사운드는 세계 영화사에도 몇편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이 리스트는 현재 충무로의 사운드 슈퍼바이저들이 자부하고 아끼는 사적인 베스트 목록에 가깝다. 그러므로 화려한 비주얼과 영화 규모만으로 덩달아 사운드 퀄리티까지 평가하게 되는 우리의 습관을 무색게 할지도 모르겠다(개봉일순).
월향검에서 사람 소리가? <퇴마록>
감독 박광춘 사운드 슈퍼바이저 이규석 제작연도 1998년
PC통신 판타지 소설을 영화화한 퇴마사들의 이야기인 <퇴마록>의 사운드는 과거 한국영화들에서 레퍼런스를 찾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완전히 새로 창조해야 하는 몇몇 사운드 가운데 가장 공들여 디자인된 것은 월향검의 소리. 이규석은 <퇴마록>의 월향검을 <스타워즈>의 광선검처럼 이 영화의 시그니처 사운드, 즉 영화를 대표하는 소리라고 판단했다. 칼이 가진 금속성 사운드와 움직임을 표현하는 이펙트 ‘슉슉’을 기본으로, 비주얼만으로 표현되기 어려운 칼의 자아와 감정을 나타내기 위해 사람의 목소리를 덧입혔다. 때로는 과격해지고 때로는 처량해지는 칼의 다양한 감정을 목소리로 연기한 사람은 이규석 본인이다. 보는 눈이 많을수록 민망한 작업이라, 밤늦게 혼자 녹음실에 남았을 때만 마이크를 부여잡고 온갖 신음을 테스트한 다음, 동물 소리와 섞었다. 월향검이 매섭게 날아와 덤비는 절정의 고음은 효과를 내줄 만한 소스를 찾지 못해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대목. 여자의 비명을 쓰려다가 “사람의 캐릭터가 너무 많이 들어가 있어서” 고민하던 와중, 한 연출부 스탭이 갖고 놀던 피리 모양의 아이스크림 막대에서 사운드 소스를 얻었다. 디지털사운드 시대 초기에 DTS 방식으로 작업되었으며, 이규석 본인에게는 “사운드 이펙트에 관한 개인적인 관심과 노력이 극대치에 있을 때 완성된 영화”다.
달려드는 발소리는 타악기 소리, <인정사정 볼 것 없다>
감독 이명세 사운드 슈퍼바이저 오원철 사운드 디자인 이성진 제작연도 1999년
1주일이라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짧은 후반작업 기간 때문에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사운드 부분은 두 녹음실이 나눠 맡았다. 다이얼로그 및 ADR, 믹싱은 라이브톤에서, 사운드 소스 및 디자인 작업은 웨이브랩에서 했다. 당시 웨이브랩 소속이던 이성진과 박준오는 모두 영진위 출신으로, 이명세 감독과 전작을 작업했던 경험과 친분이 있어 감독의 특별한 요구없이 자유롭게 작업했다. “작품마다 자기 영화에서 유난히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 이성진이 말하는 이명세 감독의 연출 스타일. <인정사정…>에서는 연기나 비가 자주 등장한다. “쓸데없이 등장하는 게 아니라 미학적인 의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지나치기보다 맞춰주려고 노력했다.” 빗물 소리 대신 나뭇잎을 흔들어서 빗소리를 만들고, 차창 와이퍼에 부딪히는 빗물 소리에 디테일을 가했다. 만화적 과장이 섞인 장면들에는 카툰 사운드를 편집해넣고, 우 형사(박중훈)와 장성민(안성기)의 마지막 결투신에서는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고속화면에 개성을 주고자 타악기 소리를 소스로 발소리를 디자인해넣었다. 리얼한 사운드와 만화적 사운드가 입체감 있게 편집된 <인정사정…>에서 이명세 감독은 5.1채널을 처음 접하고 “패닝을 많이 이용하고 싶어”했다는 후문이다. 타이틀 시퀀스가 떠오를 때 팔방에서 터지는 총소리도, “몇 바퀴 돌려보자”는 감독의 제안으로 완성된 사운드다.
음산함은 주변의 소리에서, <소름>
감독 윤종찬 사운드 슈퍼바이저 이성진 제작연도 2001년
낡은 아파트 문틈으로 비어져나오는 비정상과 광기의 심리를 소름끼치게 그려내는 영화인 <소름>은 비주얼과 스토리만큼 사운드에서도 관습을 벗어난 새로운 공포영화다. 전형적인 과장을 원하지 않았던 감독의 성향은 이성진의 취향과도 맞았다. “실제 존재하는 소리를 변형해 공포감을 만들고 싶다는 게 내 의지였다.” 전기 노이즈, 새의 날갯짓, 열쇠뭉치 소리, 고철의 두들김 소리, 고양이 울음 등 주변에서 흔히 들리는 소리들로 <소름>은 시종 긴장을 이끌어간다. 사운드의 볼륨이 아닌 적절한 시공간 배치로 최대 효과를 내고자 했고, 불가피하게 화들짝 놀라게 해야 할 대목에서도 그 흔한 버추얼 이펙트 사운드 ‘쾅!’ 대신 사람 목소리를 녹음한 소스에 사자 울음 소리를 믹스해서 ‘우왕!’을 썼다. 당시 폴리를 맡았던 박준오의 디자인 작업물인 ‘우왕!’을 야간 작업 중 예상치 못한 순간에 듣고 놀란 이성진은 그날의 귀가를 서둘러야만 했다. “<소름>의 사운드가 좋았던 건 동시녹음의 힘도 있다. 오세진 기사의 녹음이 워낙 잘돼서 클리닝을 많이 하지 않아도 쓸 수 있을 정도였다. 현장 연기를 100% 살린 셈이다.” 두 주연배우가 물가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8분짜리 장면은 순수하게 동시녹음 소스로만 갔는데, 추운 겨울날 오세진 기사는 잠수복을 입고 물에 잠겨 붐마이크를 들고 있었다 한다.
나비 소리의 비밀은 백열등, <나비>
감독 문승욱 사운드 슈퍼바이저 김용훈 믹싱 박상균 사운드 디자인 황진수 제작연도 2001년
“나비 소리가 굉장히 중요해요.” 망각바이러스에 관한 모호하고 차가운 SF <나비>의 감독 문승욱의 요구가 그러했다. “관객은 나비가 날면 으레 스르르릉, 하는 차임벨 소리를 떠올리지만 나비는 소리가 없다.” 황진수는 감독이 말한 ‘중요한 나비 소리’를 디자인하기 위해 고심했다. 폴란드 영화학교 출신에 “사운드에 대한 시각과 애정이 남다른” 감독이 굉장히 디테일한 작업을 요구한 터라 <나비>는 사운드 소스 작업에만 한달 넘게 걸린 작품이다. 나비 사운드는 프리믹싱 과정에서 폴리 소스부터 재작업했다. 애초 작업해놓은 사운드를 버리고 폴리룸에 들어간 황진수의 시야에 백열등이 들어왔다. 필라멘트가 끊어진 몇개의 백열전구를 손가락 사이마다 끼워 흔들어보니 뭔가 야릇한 소리가 나는 것도 같았다. 볼륨이 너무 작아 마이크 안으로 잘 들어가지 않는 소리를 갖은 방법으로 내서 녹음하고, 믹서 안에서 증폭시킨 다음 차임벨을 섞어 디자인했다. SF적인 사운드를 원한다는 요구까지는 들어줄 수 없었다. 촬영된 비주얼은 현실에 가까운데 무작정 미래적인 사운드를 붙이면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드 이펙트 사운드는 트릭 정도로만 쓰고 전반적으로 감추고 가자고 설득했다. 디테일한 현실과 모호한 비현실이 사운드로 표현된 <나비>는 미국 와인컨트리영화제에서 베스트 사운드 디자인상을 수상했다.
전문 밴드의 연주를 녹음한 거라고? <와이키키 브라더스>
감독 임순례 사운드 슈퍼바이저 김석원 음악 현장 녹음 및 믹싱 김석원 제작연도 2001년
김창섭이 추천하고 김석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우리나라에 몇 없는 음악영화 중에서도 블루캡이 사운드 완성에 ‘상당한’ 정성을 들였다고 자부하는 영화다. 이는 김석원의 개인적인 애정과 열정이 작업과정에 많이 녹아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장식없는 영화의 연출톤을 맞추기 위해 성우(이얼)의 밴드 연주는 현장감과 현실감을 지녀야 했다. 그렇다면 배우들의 비전문 연주 사운드를 촬영현장에서 녹음해 쓸 수는 없는 일. 김석원은 기획단계에서부터 참여, 녹음과 믹싱과 공연장면 촬영 등에 관련된 사항을 임순례 감독과 상의했다. 음악 사전녹음을 결정하고, 그는 전문 밴드를 섭외하고 낙원상가에서 악기를 대여받고 성균관대 노천극장과 강당을 녹음 장소로 정했다. 녹음 현장을 찾아와 연주를 지켜본 배우들은 현장에서 플레이백되는 음악에 맞춰 연주와 노래 연기를 했고, 김석원은 김상범 편집기사의 편집실까지 들락거리며 사전녹음한 음악과 배우들 연기의 싱크가 맞을 수 있도록 프레임 편집 작업을 도왔다. “사운드적으로 엄청 잘됐다기보다 음악영화에서 음악 처리가 아주 잘돼서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영화 내용도 좋아하고. 내가 과거에 그런 생활을 조금 한 적도 있어서. (웃음) 너무 주관적인 애정이라 주변에도 잘 얘기 못했던 영화다.”
모든 공간감을 인식한 사운드, <복수는 나의 것>
감독 박찬욱 사운드 슈퍼바이저 김석원 앰비언스 및 사운드 이펙트 김창섭 제작연도 2002년
류(신하균)는 청각장애인이다. <복수는 나의 것>은 바로 그 설정 때문에 사운드의 활용 폭이 특히 넓었던 영화다. 일단 류의 공장. 엄청난 볼륨의 사운드가 공간을 압도하게 해달라고 감독이 주문했다. 귀마개를 하고도 괴롭게 일하는 사람들과 귀마개 없이 태연히 일하는 류를 대비시키기 위함이었다. 김창섭은 지속되는 소리는 노이즈에 불과할 뿐 공간을 압도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콰광’ 하는 찍어내리는 듯한 소리를 반복해 집어넣었다. “효과가 좋았던 것 같다.” 병든 류의 누나가 내는 신음 소리에 옆방 소년들이 일제히 자위행위를 벌이는 장면도 사운드 연출이 독특한 대목이다. 수신이 잘되라고 아이들이 라디오 위치를 이동시키면 카메라는 그 움직임에 따라 소년들의 방에서 벽으로, 다시 옆방의 누나로 막힌 공간을 뛰어넘어 이동한다. 라디오 소리와 누나의 신음 소리도 같은 방향과 속도로 패닝된다. 이 장면을 카메라 이동은 물론 사운드 연출까지 구상하고 촬영한 박찬욱 감독은, 이때 들리게 될 위층의 정사 소리를 아예 촬영현장에서 따로 따다 녹음실에 넘겼다. 박찬욱은 사운드에 대한 계산과 활용이 남다르다며, 두 사람은 “그와 작업하면 일단 우리가 많이 배운다”고 똑같은 말을 덧붙였다. 어떤 면에서 <복수는 나의 것>은 “사운드를 멋있게 쓸 줄 아는” 감독과 작업하면 나올 수밖에 없는 베스트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