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연애>의 오석근 감독 [1]
2005-11-30
글 : 이영진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오석근 감독은 세 번째 영화 <연애>를 만들기까지, 지난 몇년을 털어놓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두달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상영되는 한국영화 7편을 소개하는 특집 기사 때도 그는 “그냥 세상 공부했다”는 모호한 답변만 흘렸을 뿐이다. 12월9일, <연애> 개봉을 앞두고 오석근 감독의 터전인 부산을 찾았다. <연애>는 생계를 위해 몸을 팔아야 하는 30대 주부 어진이 주인공이지만, 영화 속 그녀를 둘러싼 지옥 같은 세상이 허구의 고통 같진 않아서다. 자갈치시장 꼼장어집에 앉아 쓴 소주 없이는 듣기 어려운 과거사를 묻고 또 캐물었다. 혼자서 목구멍으로 넘긴 시원소주는 2차로 택한 선술집까지 합해 족히 5병은 돼 보였지만, 불편한 과거의 시간들은 자신의 취중언이 누군가에게 비수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그의 신중함 때문에 느리게 토해져 나왔다.

“누구라꼬?” 영화감독이라고 일러줘도, 좀처럼 믿지 않는 눈치다. 어디 부산 자갈치 아지매들뿐일까. 오석근(44) 감독을 기억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옷장사하던 차승재 대표가 뒷돈 대고 영화아카데미 동기였던 김태균 감독이 사장하던” 영화공장 서울 시절. 비디오용 영화로 만들었다가 졸지에 개봉까지 감행한 탓에 데뷔작으로 남은 16mm영화 <네 멋대로 해라>(1991)는 논외로 치자. 문성근, 김희애 주연의 <101번째 프로포즈>를 만든 게 벌써 12년 전의 일이다. 오석근 감독조차 “나도 그때 자세한 일들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 말할 정도다.

이 두편을 정말 한 사람이 만들었을까?

그러니 봤다고 하더라도 <101번째 프로포즈>의 흔적은 희미하다.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은 만년 대리 구영섭(문성근). 그는 주말마다 선을 보지만, 결과는 물어보나 마나다. 두꺼운 뿔테안경에 8 대 2 가르마. 외모는 딱지맞기 딱 좋게 생겼다. 이성을 만나본 적 없으니 매너도 꽝이다. 꿈인가, 생시인가. 그 앞에 어느 날 미모의 첼리스트 한지원(김희애)이 나타난다. 한지원은 결혼식날 죽은 옛 남자를 잊지 못하는 여자다. 구영섭은 매번 노래방에서 불렀던 심수봉 대신 차이코프스키를 듣기 시작한다. 그리고 “50년 뒤에도 변함없이 당신만을 사랑할 것”이라고 고백한다. 어수룩한 이 남자의 짝사랑은 101번째 프로포즈와 함께 현실의 순애보가 된다.

<연애>의 주인공은 30대 주부 어진(전미선)이다. 그녀는 매일 구슬을 꿰지만, 생계조차 잇기 어렵다. 집은 빨간 가압류 딱지투성이고, 아들들은 사정 모르고 반찬투정이다. 은행빚 독촉에 남편은 나 몰라라 죽은 사람처럼 누워만 있다. 선택의 길은 많지 않다. 전화방 아르바이트를 하던 그녀는 결국 술집에 나가게 된다. 그리고 술을 팔고, 웃음을 팔고, 몸을 판다. 욕지거리를 얻어먹는 건 물론이고 남자들의 억센 손찌검을 감당해야 한다. “이혼이라는 거 참 빠르더라고요. 법정에 가서 그냥 쾅쾅쾅. 11년 동안 살았던 사람이 남이 돼요. 좀 웃기죠?” 이혼 뒤, 그녀는 술집에서 만난 차민수(장현성)와 달콤한 연애를 시작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연애는 미친 짓’임을 깨닫는다.

오석근 감독이 10년 넘는 간극을 두고 만든 두편의 영화는 상극이다. <101번째 프로포즈>에서 사랑은 기적의 열매였다. 결혼은 사랑의 종착이었다. 세상은 사랑을 끝까지 방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더이상 <연애>에서는 마술 같은 사랑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사랑은 매번 속는 거짓말이고 눈속임이다. 살아내기 힘든 세상을 어떻게든 견뎌내기 위해 잠깐 복용하는 최면제일 뿐이다. 깨고 나면 세상은 더 쓰디 쓰다. 오석근 감독은 “<101번째 프로포즈>는 세상의 한쪽일 뿐이었다. 10년 넘어서 만든 <연애>는 또다른 한쪽을 본 것이고”라고 설명한다. 그의 개안(開眼)에는 메가폰을 놓았던 지난 10여년 동안의 사연이 있다.

영화계 복귀를 늦춘 인연, 부산국제영화제

그는 공식적인 데뷔작이라고 할 <101번째 프로포즈>(1993)를 끝내고 “보따리 싸서 도망치듯” 부산으로 내려왔다. 첫날 중앙극장에서 전회 매진이 됐고, 흥행은 평균 정도로 그리 나쁘지 않았지만, “내가 왜 영화를 하는지,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다. 유영길 촬영감독 앞에서 울어버렸던 일도 떠올랐다. “극중 영섭이 지원에게 반지를 끼워주는 장면이 있다. 컷을 나누지 않고 핸드헬드로 가기로 했는데 NG가 40번 넘게 났다. 결국 유 감독님 팔에 쥐가 났는데, 그걸 보고서 그냥 컷 나눠서 가겠습니다, 했다가 혼이 난 적이 있다. 울면서 레디 고 했다.”

부산에 내려와 밀어뒀던 결혼을 했고, 이듬해 1년은 일본을 오가며 신작 구상도 했다. 그러다가 이명세 감독의 <지독한 사랑>의 부산 촬영을 거들게 됐다. 서울로 올라가기 전, 워밍업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이명세 감독과는 <개그맨>(1988) 때부터 감독과 연출부로 인연을 맺어 이후 <첫사랑>(1990),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3)에서 함께한 사이. <깊고 푸른 밤>을 보고서 충격을 받았고, 영화를 찍기 위해 영화아카데미 4기로 들어갔고, 졸업 뒤 “마흔번 넘게 전화를 걸어” 배창호 감독의 연출부가 됐지만, “배창호 감독님이 배우로 출연한” 이명세 감독의 <개그맨>이 그의 첫 충무로 경험이 됐다.

박상훈 촬영감독을 비롯해, <연애>의 스탭들은 부산 출신이거나 부산에서 활동하는 인력들로 채워졌다. 송병준 음악감독 등 <101번째 프로포즈> 때부터 함께 작업한 동지들도 많다. 세트를 따로 지을 수 없어 <연애>는 술집장면 촬영 때는 시간에 쫓겼다고.

부산국제영화제와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그의 세 번째 작품은 더 빨리 세상에 나왔을까. 이명세 감독을 돕는 와중에 그는 이용관, 김지석 등 현 부산영화제 멤버들로부터 급한 전화를 받는다. “집행위원장을 맡기로 한 김동호 선생을 모시러 가야 하는데 차가 없다는 것”이었다. 주연배우였던 김갑수씨의 차를 몰래 몰고서 공항에 김동호 집행위원장을 마중 나간 그는 이어 만난 부산 시장과의 면담 자리에서 갑자기 영화제 실무를 책임질 사무국장으로 깜짝 소개된다. 주위의 설득 끝에 “1년만 하자”고 맘먹은 일. 연말이면 그는 사표를 제출했지만, 언제나 반려됐고, 메가폰 드는 일은 1년씩 유예됐다.

“밥보다 술을 마시는 날이 많았고, 집보다 사무실에서 잔 날이 많았던” 영화제 일. 기업과 국회와 정부부처를 다니면서 그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재미를 처음 느꼈고, “부산에 사는 게 자랑스럽다”는 시민의 말에 감격하기도 했지만, 정작 촬영현장의 생기를 맛보지 못한 공복을 채우진 못했다. “영화제를 하면서도 동료들에게 국장이라는 호칭보다 감독이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감독이 맞나 싶더라.” 1999년 말, 그는 세 번째 사표를 썼고, 그의 뜻을 받아들인 김동호 집행위원장은 2천만원이라는 개인 돈을 영화사 종자돈으로 쓰라며 내주었다.

영화제 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부산에 남아 회사를 차리지 않았을 것이다. “지역 문화인들이 갖고 있는 일종의 패배의식 같은 게 있다. 주류가 되지 못한다는. 그러면서 스스로 고립되어간다. 그러면서 지역에서는 거들먹거리고. 그런 풍토를 좀 바꿔보고 싶었다.” 누군가는 그에게 돈키호테라고 했지만, 그는 부산에서 영화를 만드는 게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봤다. “서울쪽과 네트워킹이 전혀 안 되면 문제겠지만, 그것도 아니었고. 또 부산 내의 인적 네트워크를 최대한 활용해보고 싶었다. 그때는 나라도 나서야 시작이 가능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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