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연애>의 오석근 감독 [2]
2005-11-30
글 : 이영진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창립작 <이클립스>의 실패, 자존심은 구겨지고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라이트 하우스라는 영화사를 차렸고, <이클립스>라는 제목의 카지노 딜러와 마약 수사관의 사랑 이야기를 창립작으로 택했다. 영화진흥위원회로부터 제작지원을 받기도 했고, 당시 명필름에서 프리 프로덕션 비용을 감당해줬다. 그러기를 2년. “욕심이 생기더라. 영화의 스케일이 애초 계획했던 것보다 점점 커졌다.” 프로듀서를 맡기로 했던 친구와 시나리오를 함께 썼지만, 정작 결과물은 자신이 봐도 신통치 않았다. 투자를 하기로 했던 곳에서도 시나리오를 보고서 곤란하다며 모두들 고개를 저었다. “동료들과의 반목도 생겼고, 더이상 민폐 끼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회사를 접었고, 동료들은 떠났고, 빚만 남았다. 은행과 카드회사에서는 빚 독촉 전화가 하루에도 몇 십번씩 쏟아졌다. “자존심이라는 게 아주 못된 놈이다. 나를 새카맣게 태우더라고. 상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되는 건데, 꿀리지 않겠다는 그 자존심 때문에 일이 더 꼬여만 갔다.” <연애>의 어진은 2차를 나가자고 잡아끄는 동료들에게 “미안해. 난 그런 짓은 도저히 못할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자 날아드는 지혜(오윤홍)의 고성. “그런 짓이 뭔데? 가랑비나 소낙비나 젖는 건 다 똑같은 기다!! 웃기네…. 이 언니 진짜 웃기는 언니 아이가.”

자존심이 밥먹여주지 않지만, 그것마저 놓으면 “모든 사람들이 내려다보는 것 같은” 냉담한 시선을 견뎌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속으로 이런 꼴 보려고 지금까지 살아왔나”를 수백번은 되뇌였던 오석근 감독은 그때 “얼마나 떨어져야 나락(那落)에 닿을지 두려웠다”고 말한다. “이게 사는 거가, 어? 빚쟁이 새끼들 때문에 무서워서 집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문 닫는 아들을 보며) 저 새끼들. 내 보는 표정 봤제? 죽자! 다 같이 죽자!” <연애>에서 어진의 남편은 자격지심에 괜스레 아내와 자식들 앞에서 식은 밥상을 엎고, 끓는 욕지기를 쏟아낸다.

오석근 감독에겐 맘놓고 분풀이할 상대도, 등 붙일 집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흔 넘어 부모님 집에 들어갈 수도 없는 일. 그렇다고 여관에 갈 돈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열살 먹은 아들에게는 멀리 일하러 간다는 거짓말을 하고 그는 짐을 싸 결국 부산의 한 암자에 들어갔다. 지긋지긋한 세상을 도망쳐 빠져나왔지만, 끈질긴 세상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가만있으면 누가 밥주나? 일 거들다보니 자연스레 귀동냥을 하게 되더라.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 맘 편한 사람들이 아니다. 다들 세상에서 잡을 끈이 없어서 찾아든 사람들이다.”

절망의 끝에서 찾은 희망, 다시 영화 속으로

자신보다 더한 절망 앞에서 사람들은 위안을 얻곤 한다. 꾹 봉했던 그의 입도 서서히 열렸다. 자신의 사연들을 조심스레 스님에게, 또 암자를 찾은 사람들에게 한줌씩 덜어놓기 시작하면서, 자기 혐오로 단단하게 굳어져버린 자존심 또한 서서히 덩어리진 채 가라앉기 시작했다. “조용하게 앉아서 참선하고 절했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 세상 공부할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던 중 그는 부산에서 만들어진 영화 <오구> 소식을 듣는다. “내가 하고자 했던 일을 이윤택 그 친구가 하는 걸 보고서 내 일처럼 기뻤다”는 그는 자청해서 부산영화제 프로모션 일을 돕게 된다.

촬영기간 석달 동안 부산에 상주하며 <연애>에 몰두한 전미선(오른쪽). 오윤홍, 윤다경 등은 걸쭉한 사투리를 신경 쓰느라 감정선 잃기를 여러 번 했다고. 김지운 감독의 누나이기도 한 연극배우 김지숙은 옷 벗고 노래하는 장면을 위해 한달 동안 밥을 굶어가며 군살을 뺐다.

원기를 회복한 그를 세상으로 한 발짝 다시 불러들인 건 사연 많고, 인연 깊은 영화 친구들이다. 차승재 대표(싸이더스FNH)로부터 당시 <연애는, 미친 짓이다>라는 이름의 시나리오를 받아들었던 것도 이때다. “2년 전에 승재가 연락을 해와 둘이서 만나 해운대 백사장에서 캔맥주를 마시는데 나보고 그러더라. 다른 친구들은 서울에서 다 잘하고 있는데 넌 여기서 뭐하고 있냐고.” 며칠 뒤엔 김태균 감독까지 부산에 내려왔다. “김태균 감독, 독실한 크리스천이 됐잖나. 술잔 기울이다 말고 나 잘됐으면 좋겠다고 기도까지 해주더라니까.”

한달음에 읽은 <연애>의 한 대목도 오석근 감독의 재기를 부추겼다. “우리 친구할래요?”라는 민수의 말에 조금씩 마음을 연 어진이 결국 또 한번 수치와 모멸을 당하는 장면을 보고서 그는 혼란을 느꼈고, 어떻게든 어진을 통해 헝클어진 자신의 삶을 추슬러보고 싶었다. “어진은 민수와의 모든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 그 자리에 나간다. 민수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받아들이는 건 연애와 관계를 믿었던 어진이 스스로를 파괴하고 산화하려는 일종의 의식 같은 거였다. 그런데 어진은 영화에서처럼 그 순간 완전히 미련을 거두지 못한다. 사람 감정이라는 게 어디 쉽게 끊어낸다고 될 일인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와니와 준하> 등을 썼던 서신혜 작가가 쓴 시나리오에서 가장 바뀐 부분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점이었다. 원 시나리오는 작가가 직접 전화방 아르바이트를 하며 쓴 것이라 대사와 상황이 구체적이었고 생생했다. 다만 “직접적인데도 불구하고” 그가 보기엔 절실한 울림이 부족했다. “수컷들의 정액 냄새를 견뎌야 하는 여성의 처지에 대한 묘사”는 뛰어났지만, “어진을 제외한 모든 인물과 세상에 가위표를 치는 흑백논리”에는 거부감이 들었다. “답답했다. 창도 문도 없는 좁은 공간에 갇힌데다 덫에까지 걸린 쥐를 들여다보는 심정이었다.”

그는 송민호 작가와 함께 각색하면서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어진의 심리를 따라가는 영화이지만, 비루한 삶을 살아내는 다른 인물들에게도 조금은 애정을 나눠주면 해결될 듯싶었다. 그 과정은 그러나 쉽지 않았다. 어진이라는 인물에게서 애정을 덜어내기 전, 그는 어진이 “생계 때문에 꼭 술집에 나가서 몸을 팔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부딪혔다. 어진이 택한 길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에 대해 묻고, 또 물었다. “결국 내가 얻은 답은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다만 내가 어진의 삶을 두고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가 하는 의문만이 돌아왔다.”

<연애>의 어진은 그래서 울지 않는다. 대신 카메라는 그녀가 흘렸을 법한 눈물의 흔적이나 소리들을 채집한다. 유난히 자주 들리는 뱃고동이며, 똑똑 물 떨어지는 샤워기며, 동그랗게 물을 머금은 빨래집게까지 신파의 줄거리이되 영화는 타인에게 눈물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석근 감독은 어진 역을 맡은 전미선에게 아예 “감정표현을 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다 아는데 소리내서 울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플 때마다 슬플 때마다 항상 감정을 내비치는 것은 아니잖나.” 대신 그는 미소만을 부탁했다. 기쁜 미소, 슬픈 미소, 아픈 미소. 그때마다 <연애>는 어진의 찢어진 가슴을 열어 핏줄을 기타줄 삼아 단조로운 비탄을 들려준다.

“심심하면 홈쇼핑이나 보고 그러는데 눈에 들어오는 건 가격이 너무 비싸고 가격이 적당한 건 눈에 안 들어오고, 그런 거죠 뭐.” 어진이 무심코 민수에게 흘리는 전언처럼, 삶이란 그런 거다. 치러야 하는 희생은 크지만, 되돌아오는 건 조금의 소득밖에 없다. 오석근 감독은 그 조금을 두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삶을 버텨낼 힘이라고 말한다. “<연애>의 에필로그는 사족 같아 보일 수 있다. 미선이도 무슨 감정으로 노래를 불러야 하느냐고 묻더라. 하지만 놀이터에서 아이들과 함께 시소를 타는 전 장면에서 영화를 끝내긴 싫었다. 그녀의 삶은 바뀐 것이 없지만, 그래도 그녀는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블루 벨벳>을 보면 남자주인공이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 등장할 때 뭐 큰 사건이 없는데도 훌쩍 커버렸다는 느낌이 들지 않나? <연애>의 마지막 장면도 그런 느낌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영화만들기는 계속된다

네 번째 영화를 만들기까지 오석근 감독에게 몇년이 필요한지는 모른다. 하지만 “부산에 와서 누구든 쉬고 가라”는 의미에서 차승재 대표가 “사우나에서 고심 끝에 지어준” 이름을 단 필름나루에서 그는 쉼없이 영화작업을 해나갈 계획이다. 송민호, 한결 등 자신이 가장 어려웠던 시절 함께했던 후배들과 함께. <연애>를 만들면서 그동안 마음의 빚을 졌던 인연들을 새기면서. “부산에서, 부산이니까 가능한 영화를 모색하고 싶다. 아무래도 A급 배우들이 나오고 대규모 자본이 들어가는 영화는 아니겠지. 개인적으로는 해외쪽과 합작을 통해 만들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구상 중이다. 그게 언제 완성될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는 이제 안다. 냉혹한 현실의 벼랑이 그에게 허락하는 보금자리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그런 긴장이 외려 그에게 새로운 영화적 길을 모색하게 만들어줄지도 모를 일이다. 출발로 치면, <연애>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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