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왕의 남자> 감우성, 광대만들기 [1]
2005-12-06
글 : 이종도

전북 부안 세트장에서 촬영 중인 <왕의 남자>(감독 이준익)는 광대를 위한 영화다. 연산군 시대를 웃음으로 누빈 광대 장생(감우성)과 공길(이준기)은 줄타기부터 접시돌리기까지 재주도 비상했지만, 그 못지않게 정치판을 우스개의 소재로 과감하게 끌어들이면서 저잣거리의 놀이마당을 격상시켰다. 그걸 알아본 이는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정진영)이다. 당쟁에 염증이 난 연산군, 왕마저 놀릴 줄 아는 광대의 자유가 부럽다. 그러나 광대를 궁으로 끌어들인 것에 중신들이 격분하고, 장녹수(강성연)가 광대를 질투하면서 광대들의 운명에 광풍이 몰아친다.

<왕의 남자>는 <황산벌>과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뒤를 잇는 사극이지만 이들 사극보다 품이 더 많이 든다. 바로 배우를 광대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병역비리로 장생 역의 장혁이 물러나면서 공동제작사인 이글픽처스와 씨네월드는 근심이 더 많아졌다. 대안은 도회적인 분위기의 감우성이었다. 감우성은 왜 자신을 사극의 주인공으로 생각했느냐고 감독에게 진지하게 물었고, 고민 끝에 테스트 촬영을 해서 잘 맞으면 해보겠다고 용기를 냈다. 제작자와 감독은 선택하기 전엔 모든 것을 의심하되, 선택했으면 모든 것을 걸고 가는 배우가 감우성이라고 말했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 광대수업을 받는 감우성을 세번 따라다녔다. 한나절은 족히 넘을 시간 동안 그가 흘린 땀과 쏟은 열의를 지켜보았다. <왕의 남자>는 남양주종합촬영소와 용인민속촌 등에서 20% 분량을 찍고 부안 세트장으로 이동했다. 올 겨울이면 최초의 정치개그를 시도한 광대 감우성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과수원길을 지나니 비포장 자갈길이 나온다. 왜 이런 깊은 시골까지 와서 줄타기를 배우는 걸까. 조선 후기 프로페셔널 공연예술가들이라 할 남사당의 고장이 바로 안성이기 때문이겠지. 이제 막 광대길에 들어설 감우성은 파마머리에 선글라스, 트레이닝복 차림이다. 재즈 뮤지션이라면 모를까, 서양 클래식은 아니고, 광대쪽은 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양수리 집 마당에 줄타기를 가르치시는 권원태 선생이 줄을 매주셨어요. 이제 줄이 겁이 안 나요.” 역시 선글라스에 찢어진 청바지 차림으로 서 있는 이가 권 선생인 것 같다. 스승과 제자 차림새가 퍽 닮았다.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물어봤더니 감우성이 천연덕스레 농담으로 받는다. “그래서 (영화 안 하겠다고) 물려보려고….”

줄타기를 시작했다. 처음 줄을 타자마자 앞으로 7m나 갔다는 신화적인 얘기가 돌았는데 사실인 것 같다. 한손에 부채를 잡아 중심을 잡으면서 조심스레 가는 발걸음이 뒤뚱거리긴 하지만 자연스러워 보인다. 권원태 선생은 중심을 잡은 뒤에 움직이라고 신신당부다. “중심이 옮겨진 다음에 부드럽게 움직이니까 아까랑 천지차이잖아. 어깨를 살랑살랑 흔들며 무게 잡아. 고개는 시선을 멀리 봐야지.”

<왕의 남자>는 광대의 자유를 부러워한 왕 연산군, 왕의 자유를 부러워한 광대 공길, 광대의 자부심으로 먹고사는 장생, 세 남자의 이야기다. 광대의 재주엔 풍물, 살판(땅재주 놀이), 버나놀이(접시 돌리기), 덜미(인형의 목덜미를 쥐고 하는 인형극), 덧뵈기(탈놀이), 어름(줄타기) 등 여섯 마당이 있지만 <왕의 남자>는 어름에서 시작해 어름으로 끝난다. 살얼음 걷듯 걸어야 하니 이름이 어름이다. 여기에 광대놀이의 역동성이 있고 광대의 비장한 운명이 있다. 힘든 대목은 대역을 쓴다 해도 감우성이 집에 줄까지 놓고 타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어느새 감우성 윗도리는 땀범벅이다.

잠시 짬이 나서 권 선생이 가져온 글러브와 공으로 야구를 했다. 사회인 야구팀의 구원투수라는 감우성은 어깨를 보호해야 한다며 평소 구속의 반으로 던졌다. 볼은 예쁘게 글러브 안으로 빨려들어왔다. 공은 빠르지만 제구가 안 되는 투수가 있는가 하면, 구속은 빠르지 않지만 제구력이 좋은 투수가 있다. 아마 그는 후자일 것이다. 연기자도 이렇게 둘로 나눌 수 있지 않으랴. 감우성은 속도는 빠르지 않지만 꾸준하게 <결혼은, 미친 짓이다> <알포인트> <거미숲>에서 믿음직스러운 연기를 보여주지 않았던가. 골목야구에서 배운 실력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공이 정확하고 공 끝도 묵직하다. 묻지도 않았는데 감우성이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 5번 타자인지를 얘기한다. 화가이자 야구선수이며 배우이자, 이제는 광대 지망생.

장생 역의 감우성이 쉬는 사이 공길 역의 이준기가 줄을 탔다. <발레교습소> 출신의 신인배우다. “공길이는 마지막에 한번 타니까 (많이 연습하지 않아도) 괜찮아”라며 제작자 정진완 이글픽처스 대표가 이준기의 어깨를 가볍게 해준다.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권 선생 말대로 키가 커서 그런지 감우성보다는 균형을 잘 못 잡는다. <왕의 남자>는 정 대표의 이글픽처스로서는 창립작품이고, 공동제작자이자 연출가인 이준익 감독으로서는 <황산벌>에 이은 2년 만의 사극이다.

“쫙 펴주세요, 상체를. 그렇지 폼이 예뻐야지.” 권 선생의 잔소리가 쉴새없다. 칭찬은 인색하다. 처음 줄 타는 사람치고는 놀라운 실력인데 말이다. “진도는 그렇게 잘나간다고 볼 수 없고….” 감우성이 줄을 타다 말더니 직접 해보라고 한다. 그럼 어디 타볼까. 줄의 높이는 지상에서 50cm쯤 될까. 그런데도 아찔하다. 이런, 세 발자국도 못 갔다. 몇번을 다시 올랐지만 처음 두 발자국이 최고 성적이다. 발바닥이 다 아프다. 이때 이준기가 변명을 한다. 물론 제작자랑 감우성 들으라고 하는 얘기다. “무술도 배워야지, 악기도 배워야지, 인형극도 해야지, 그리고 전 가세가 기울어 집에 줄 매달 공간이 없어요.”

권 선생은 김민중이라는 중학교 다니는 제자를 줄에 올려 시범을 보여준다. 사뿐사뿐 걸어가는데 어깨는 계속 직선을 유지한다. “키가 크면 ‘뽀대’가 안 나와.” 감우성이 금세 소년의 동작을 따라해본다. 권 선생은 감우성이 이준기에 비해 자세가 훨씬 더 좋고, 많이 늘었다며 처음으로 칭찬을 한다. 감우성의 오리 궁둥이도 몸에 안정감을 준다고 덕담을 한다. 그럼 오리 궁둥이도 아니고 키도 멀대같이 크기만한 이준기는 어떻게 하나? 넉살 좋게 받아치는 이준기. “그래서 전 살판에서 승부를 보려고요….” 두 배우는 이 연습이 끝나면 따로 흩어져 각기 여섯 마당을 바삐 준비해야 한다. 연산군(정진영)도 말타기를 해야 하고 육갑(유해진), 칠득(정석용), 팔복(이승훈) 등 다른 광대들도 여섯 마당을 조금씩 걸쳐야 한다.

사진 씨네21·사진제공 이글픽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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