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왕의 남자> 감우성, 광대만들기 [2]
2005-12-06
글 : 이종도

남양주종합촬영소 하고도 한참을 더 들어가면 이명세 감독의 <형사> 촬영장이 나오고, 그 촬영장도 지나쳐 언덕배기로 올라가면 운당이라는 곳이 나온다. 조선시대 여관 같은 모습이다. 마당 위에서 누군가 하늘로 번쩍 뛰어올랐다가 가라앉는 게 밖에서도 보인다. 비 그친 뒤 쨍쨍한 하늘을 시원스레 날아오르는 저이는 누군가. 와이어를 달기는 했지만 선글라스를 끼고 줄 위에 앉았다가 훌쩍 뛰어올라 공중에서 방향을 전환하는(허공재비) 감우성의 재주, 보통은 아니다.

그럼 그렇지. 감우성이 줄에 쓸려 타들어간, 조금 과장을 하자면 너덜너덜해진 손바닥을 보여준다. 자칫 잘못하면 살점이 나가니 살얼음 걷듯 조심해야 하는 게 어름 아닌가. “중요 부위는 보호대를 했지만 보호대 범위를 더 넓혀야겠어요.”(감우성) 줄을 잘못 타면 삽시간에 중요 부위가 그 기능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게 권 선생의 설명이다. 참 무서운 얘기 아닌가, 남자들로서는.

6월1일 첫 촬영을 위한 테스트 촬영인지라 크레인이며 와이어 설비들이 들어섰고 제작 스탭은 물론 대역을 할 무술팀 트리플 에이도 감우성의 연습을 지켜보고 있다. 지난 연습 때 쳤던 줄 높이의 다섯배는 돼 보인다. 훨씬 유연하게 공중을 걷고 있는 감우성을 보니 갑자기 배가 고프다. 무릎보호대와 발목보호대를 차고 다시 나선 감우성이 매트에 떨어졌다. 점심시간이다.

도시락이 공수되었다. 감우성은 김치가 없어 퍽퍽해 못 먹겠다며 뚜껑을 닫는다. “지난해 겨울에 담근 김치가 너무 많이 남았는데 어쩌나.” 제작진 가운데 입심이 단연 뛰어난 이준익 감독은 한입으로는 밥을 먹고 다른 입으로는 감우성의 말벗이 되어준다. “그게 묵은지가 되는 거야. 차양을 위에 쳐서 서늘하게 하라고.” 배우와 감독이 나누는 대화가 점점 심도가 깊어진다. “복분자도 담갔는데 아주 색깔이 진해요.” “복분자에 붕어찜, 정력에 최고지.” 두 도사가 나누는 양생술을 보라. 이건 정말 사극영화다.

“<황산벌> 끝나고 아이템만 8개였다. 영화화할 수 있는 연극과 소설을 다 훑고 있는데 장원석 제작실장이 이 공연을 보고 오더니 좋다는 거야.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작가와 연락해 2월에 판권계약했지.” 감독과 잡담을 나누는 사이 감우성이 조선 후기풍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정 대표는 고증을 한다고 했지만 문헌은 고작 <연산일기>의 한줄이라고 한다. 공길이라는 광대가 입바른 소리를 했다 왕에게 쫓겨났다는 얘기라고 한다. 영화의 원작은 대학로 화제작 연극 <이>(爾)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학생들의 공동작업으로 김태웅씨가 쓰고 연출한 작품이었다. 2000년에 여러 상을 휩쓸었고 연희극의 재미와 동성애적 소재가 맞물려 큰 인기를 끌었다. 개그맨 전유성이 발벗고 연극을 홍보하기도 했다.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 종4품 벼슬까지 얻은 천민 출신 궁중 광대 공길, 공길에 대한 질투에 사로잡힌 녹수, 그리고 공길을 아끼는 동료 광대 장생이 뒤얽힌 희비극이다. 영화는 연극의 비장한 최후를 바꾸고 동성애를 덜어냈으며 왕과 두 광대 사이의 관계에 긴장을 더했다.

“사극이다보니 당연히 돈이 많이 들죠. 세트와 소품만 5억원 그리고 의상에 2억5천만원이 드는 등 과거 재현에 돈이 많이 들어갔어요. <불멸의 이순신> 부안 세트장을 다행히 활용할 수 있게 됐는데, 순제작비 44억원으로 차질없이 만들 수 있기를 바랄 뿐이죠.” 정 대표는 여름 촬영의 최대 적인 매미를 걱정했다.

각시탈을 쓴 감우성이 다시 줄 앞에 섰다. 광대 의상이 제법 잘 어울린다. 감우성이 부채를 흔들며 허공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자 모두들 입을 벌리고 다물 줄을 모른다. 새 우는 소리만 들린다. 새가 히히 호호 운다. 고요하다. 떨어지는 것은 날개가 있다고 했던가. 날개없는 감우성 거푸 추락한다. 장생 감우성의 뒤를 이어 치마 입은 이준기가 배꼽을 드러내고 요염하게 나온다. “부채로 중심 잡아, 부채를 안 쓰잖아.” 권 선생이 소리소리 지르지만 저 위에서는 전혀 안 들리는 것 같다. “아니, 할 수 있어.” 추락 뒤에도 씩씩하게 다짐을 해보지만 이준기의 어설픈 동작이 금세 나아질 것 같지 않다. 보다 못한 권 선생이 시범에 나섰다. 앉았다가 2m 이상 뛰어오른다. 줄에 스프링이라도 달린 것 같다.

감우성은 떨어졌다가 줄에 다시 도전했다가를 거푸 반복했다. 그때마다 카메라가 여러 각도로 쫓아다닌다. 드디어 네 번째 시도 만에 감우성은 와이어 없이 10여m가 되는 줄 위를 끝까지 걷는 데 성공했다. 모니터 앞으로 온 감우성의 표정이 밝아졌다. “비틀비틀 걸어가는 대목은 굳이 따로 안 찍어도 제가 최선은 다하는 모습만 보이면 자연스레 그 모양이 나올 거 같아요.”

이제 와이어를 대고 가본다. 줄 위에서 더 절도있게 걸었으면 좋겠다는 감독의 주문이다. 와이어에 달렸던 감우성이 연습을 마치고 내려온다.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스탭들이 땀을 닦는다, 부채를 쥔 손바닥을 주물러준다, 얼린 물을 갖다준다 하느라 부산해진다. 이준기도 질세라 감우성의 어깨를 주물러준다. “예술이네 예술이야 마사지 좀 해봤어?”(감우성) “태권도할 때 해봤어요.”(이준기)

모든 연습을 마치고 의상을 갖춘 뒤 두 배우가 줄 양끝에 올라 첫 장면을 테스트한다. “예끼,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올라오느냐” 하고 공길이 수작을 걸자, “저년 저 말 뽐새 보게. 내가 이 대가집 맏아들이다. 이 ***랄 년아” 하며 감우성이 즉흥으로 질퍽한 대사를 쏟아낸다. 웃음이 터진다.

감우성이 장어 잘하는 데가 있으니 한잔하자고 팔을 잡는다. 줄 타는 데 성공을 했으니 자축을 하는 걸까. 양수리에 집을 얻자마자 동네 어른들에게 인사를 하고 다녔는데 그때 소개를 받은 집이라고 한다. 식당엔 별게 없다. 바닥에 의자라고 내놓은 통나무 잘라놓은 것들이 전부다. 감우성과 감독은 이구동성으로 화투 치는 모양새네, 한다. 그러고보니 두 사람 모두 동양화를 전공했다. 양생술, 동양화, 공통분모가 적지 않다. 감우성은 모든 장어에 손수 소스를 바르고 뒤집고 굽고 자르고 사람들에게 먹기 좋게 내놓았다. 술이 빠질 수 없다. 두 도사의 세심한 선택은 역시 정력에 좋다는 장어 지라를 우려넣은 소주였다.

사진 씨네21·사진제공 이글픽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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