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장동건이다. 6mm짜리 독한 담배를 피운다. 1mm짜리 담배는 목만 간질간질해져서 도무지 담배 같지가 않다. 나는 장동건이다. ‘씬’이다. 남북에 버림받은 기억을 안고 복수심에 불타는 남자, 한반도를 날려버릴 핵무기를 안고 남한으로 향하는 해적, 영혼을 잃어버린 누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남동생이다. 사실 ‘씬’은 주변에서 흔하게 살아 움직이는 인물은 아니다. 그가 겪는 감정의 폭이 지나치게 크기 때문에 처음엔 피상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인물의 내적 깊이보다는 외적인 매력에 더 끌렸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어느 날, 탈북자를 만난 적이 있는 영화 관계자를 만났다. 내가 연기하는 ‘씬’이라는 역할에 대한 설명을 듣더니, 탈북자분이 그 자리에서 왈칵 눈물을 쏟았다고 했다. 그도 ‘씬’과 비슷한 상황에 처해, 비슷한 감정을 가진 적이 있었다고.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갑자기 <태풍>과 ‘씬’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촬영 초반의 그 일은, 아마도, 일종의 계시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장동건이다. 완벽한 이미지를 믿지 않는다. 나를 표현하는 가장 쉬운 말을 사람들이 찾아 일반화시켜버린 수식어들이 있다. 그것들에 심취하거나, 그것들을 신봉하지는 않는다.
나는 장동건이다. 신뢰를 믿는다. 신뢰는 작품 선택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시나리오도 읽지 않은 상태에서 <태풍>에 출연을 결정했던 것도 순전히 감독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 그가 쓴 시나리오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설혹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곽경택 감독이라면 찍어가면서 작품을 발전시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신뢰만 있다면 무엇이든 수월하게 결정할 수 있다. 나는 장동건이다. 직선적인 것이 좋다. 인간관계도 중요하지만, 영화란 어차피 결과물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작업이다. 배우의 연기에 대해 직선적으로 말할 줄 아는 감독이 좋다. 배려를 해서 말을 빙빙 돌리는 것보다는, 정확한 의중을 전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곽경택 감독처럼 ‘아니면 깬다’고 확실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편하다. 그런 말을 들으면 일찌감치 마음속의 미련을 버리고 감독의 의도에 쉽게 다가갈 수 있다. 지나치게 배려하면 오히려 애매해지는 경우가 많다. 나는 장동건이다. 작품도 인연이라고 믿는다. <태극기 휘날리며> 이후 작은 영화를 하며 쉴 수도 있었겠지만, 단순히 휴식을 위해 매력적인 큰 영화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물론 영화의 규모가 작품의 선택기준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태극기 휘날리며> 이후에는 좋은 인연들이 연달아 찾아왔다. <태풍>은 물론이고, 첸카이거 감독의 <무극>도 그렇다. 그는 <친구>를 보고 나서 꼭 나와 함께 영화를 하겠노라 마음먹었다고 했다. 세계 영화사에 흔적을 남긴 명감독이, 두세 시간 동안 작품 설명을 하며 나에게 러브콜을 보내는 순간, <무극>을 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는 이미 머릿속을 떠난 상태였다. 남다른 감흥을 느꼈고, 처음 연기를 시작했던 때가 떠올랐다. 그날 밤엔 안 쓰던 일기까지 썼다. 나는 장동건이다.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할 때도 있다고 생각한다. <태풍> 같은 경우가 그런 편이다. 한국영화 사상 최대 규모의 영화를 만들다보면, 배우가 가지지 않아도 되는 부담을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다. 그런 경우에는 결과가 상당히 중요하다. 사실 배우 입장에서는 <해안선> 같은 작품을 할 때 훨씬 마음이 편하다. 사람들은 <해안선>이 대담한 결정이라고 걱정했었는데, 나는 편하고 부담없어 좋았을 뿐이다. 이를테면, <해안선>은 과정이 중요한 영화, <태풍>은 결과가 중요한 영화다.
나는 장동건이다. 공인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배우는 공인이 아니다. 그러나 공인과 같은 행동을 하기를 모두가 기대한다. 갑갑할 때가 많다. 배우가 인기를 얻고 하다보면 어느새 저명인사화 되는 경우가 있다. 여기저기 얼굴을 들이밀어야 하는 경우도 생기고. 어디어디 홍보대사 같은 요청도 들어오고. 거절하기 곤란한 순간들이 온다. 나는 끝까지 배우로만 남고 싶다. 저명인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물론 한명의 배우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친다. 공인과 맞먹는 파장을 지닌다. 하지만, 배우는 공인이 아니다. 나는 장동건이다. 마조히스트다. 배우는 마조히스트다. 자기를 학대한다. 하지만 그 학대는 자기 계발을 위한 것이다. 배역을 위해 자기를 학대할수록, 배우는 배역에 더욱 가까워진다. 나는 장동건이다. 적(敵)이 있다.내가 지금 가장 경계하는 것은, 매너리즘에 빠져서 안주할 가능성이다. 최근에는 그런 유혹들을 굉장히 많이 느낀다. 선택의 순간이 오면, 어떤 것이 좋은 선택인지를 따지기 이전에 어떤 것이 편한 선택인지를 따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게 바로 지금, 장동건의 적(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