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의 영화교양백서]
[김경의 영화교양백서] 낯 간지럽게 릴케를 다시 읽는 이유
2005-12-21
글 : 김경 (하퍼스 바자 피처 디렉터)

예전에 <한겨레21>에 ‘남편감을 구한다’는 천박하기 짝이 없는 구인 광고 형식의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서른 넘은 싱글 여성을 ‘발정난 암캐’ 취급하는 드라마 <결혼하고 싶은 여자>를 보고 화가 머리끝까지 났던 터라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이판사판 덤볐다. 그랬다가 나만 다쳤다. 지금도 교도소나 해병대에서 ‘그렇다면 내가 상대해 주지’ 식의 편지를 받고 있으니 정신적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

어쩌면 나도 영화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에 나오는 헬렌처럼 좀더 고상한 부류들을 자극할 수 있는 구인 광고를 내야했는지도 모른다. 갤러리 부관장으로 일하는 이 세련된 뉴요커는 릴케의 시구를 인용한다.

‘새로운 것 없는 관계를 맺는 것은 타성 때문만은 아니다. 새로운 경험에 앞서 오는 두려움과 수줍음 때문이다. 모든 걸 감수할 준비가 된 자만이 살아 있는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공교롭게도 여자가 여자 애인을 구하는 광고였다. 헬렌은 '스트레이트'지만 뭔가 다른 경험을 찾기 위해 그 광고를 냈고, 제 짝을 찾지 못해 엄마의 잔소리에 늘 시달리는 신세지만 그래도 어딘가에 자신의 교양과 지성을 받아줄 만한 상대가 있을 거라고 믿고 있는 <뉴욕 트리뷴>의 기자 제시카가 그 광고에 끌렸다.

남녀 관계 일색인 할리우드의 로맨틱 코미디를 비틀고, 동시에 심각하기 짝이 없는 동성애 영화를 유머러스하게 풀었다는 점에서 더욱 즐겁고 신선하게 다가왔던 이 영화를 보고, 나는 릴케의 시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다 좋은데 낯 간지럽게 릴케의 시를 인용한 것이 이 영화의 유일한 단점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 반대였다.

모든 골목길마다 아침을 향해 뒤척일 때,
아무것도 찾지 못한 육신들은
실망과 슬픔에 젖어 서로를 떠나 갈 때,
그리고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한 잠자리에 들어야하는
그 뒤엉킨 시간에 비 되어 내리는

고독은 냇물과 더불어 흘러간다.
- M. 릴케의 <형상 시집>, ‘고독’ 중에서

장정일은 젊은이들이 시를 읽는 것에 반대한다고 했다. “그저 한 권의 시집을 읽었다는 지적 허영과 교양인의 대열에 끼어 면피나 했다는 포만감만 남을 뿐이다.” 라는 게 장정일의 '생각'(<생각>이라는 단상집에서)이었다. 과연 그런 것일까? 그런데 왜 어떤 젊은이는 새 학기가 시작되면 공책 제일 앞 장에 릴케의 글(예를 들면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용기다. 아주 기이하고도 독특하고 불가해한 것들을 마주할 용기.” 같은 글귀)을 적고, 왜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관조의 나이에 든 노장들은 여전히 예이츠의 시를 읽을까?

어쩌면 클린트 이스투우드가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예이츠의 시를 인용한 건 장정일 생각에 가까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평범한 시골 아낙과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떠도는 사진가 사이를 연결시켜 줄 특별한 코드가 필요했을 것이고, 감독은 또한 그들의 통정이 보다 숭고해 보이길 바랐을 거다. 게다가 결코 예쁘다고 할 수 없는 중년의 여자도 아직 예이츠의 시를 외우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특별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상대가 예이츠 애호가라면 ‘생애 단 한 번 찾아오는 확실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거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

하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또 다시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예이츠의 시 ‘호수의 섬 이니스프리'를 매기(힐러리 스웽크)에게 읽어준 건 확실히 희망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희망 없이 누워있는 자들에게 삶을 관조할 수 있는 자만이 나누어줄 수 있는 작은 불씨 말이다.



나 이제 일어나 가리, 이니스프리로 가리.
거기 나뭇가지 엮어 진흙 바른 작은 오두막을 짓고
아홉 이랑 콩밭과 꿀 벌통 하나 벌 윙윙대는
숲 속에 나 혼자 살으리.

거기서 얼마쯤 평화를 누리리. 평화는 천천히 내리는 것
- 예이츠 '호수의 섬 이니스프리' 중에서

좋은 시는 지상의 지친 이들을 위무한다. 그리고 번잡한 일상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며 자주 잊어버리곤 하는 사물들의 모습과 삶의 의미를 다시금 발견하게 해준다. 토인비가 장 콕토와의 인터뷰에서 시를 '갱도(坑道) 속 함정에 빠져서 미칠 것 같은 불안 속에서 자기를 구출해 줄 다른 갱부들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는 사람에게 생기를 주는 희망'과 비교한 건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즘 들어 유난히 릴케의 시가 자주 눈에 띈다. 그러고 보니 오는 12월 29일이, 찾아온 친구를 위해 릴케가 장미꽃을 꺾다가 가시에 찔려 결국 패혈증인지 백혈병인지로 죽었다는 바로 그 날이다. 하지만 그 유명한 묘비명을 인용하지는 않겠다. 대신 끝으로 그의 기일을 맞아 릴케가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썼다는 시를 소개하려고 한다.

오라, 그대, 내가 인정하는 마지막 존재여,
육체의 조직 속에 깃든 고칠 수 없는 고통아.
정신의 열기로 타올랐듯이, 보라, 나는 타오른다
그대 속에서. 장작은 그대 넘실거리는 불꽃을
받아들이기를 오랫동안 거부했다,
그러나 이제 나 그대를 키우고, 나는 그대 속에서 타오른다.
- 릴케의 마지막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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