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미학의 가장 끝점_ <극장전>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가 나온 이후 조심스럽게 제기됐던 의견 중 하나는 홍상수의 영화가 매너리즘에 빠져드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 영화 <극장전>은 보란 듯이 한층 더 폭 깊은 미학을 선보이며 그 걱정들을 뒤로했고, 그 결과 올해의 영화 1위로 선정됐다. 대체로 호평들은 ‘영화’라는 매체의 존재론을 미학적 한 진경으로 펼쳐냈다는 점과 그것을 기존의 자기 방식만으로 구성해냈다는 점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극장전>은 그런 영화다. 영화의 운명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영화이며, 그 안에서 어떤 다른 걸 채워넣어도 달라질 수 없다고 말하는 영화다. <극장전>은 홍상수 필모그래피의 자축연처럼 보인다”(허문영), “홍상수의 <극장전>은 무시무시한 영화이다. 아무리 우스꽝스럽다 할지라도 이 영화는 죽음을 말하는 중이다. 그런 다음 죽느냐, 존재할 것이냐의 내기를 한다. 홍상수는 죽음 대신 존재를 선택한다”(정성일) 등이 대표적인 평이다. 자칫 영화에 대한 영화가 갇히기 쉬운 상투적인 표피를 벗겨내고, 무의미와 희극성 그 어딘가로 들어가 자리잡은 것이다. <극장전>은 올해 나온 어떤 영화에 비교해도, 영화의 미학이 나아갈 수 있는 가장 끝점까지 가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화끈하게 정치적이고 화끈하게 대중적인”_ <그때 그사람들>
올 한해 가장 독한 고난을 치르고서 개봉된 영화는 <그때 그사람들>이다. 개봉을 앞두고 법정 공방전까지 가야만 했고, 완성된 영화의 일부를 삭제한 채 개봉하는 우여곡절을 낳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 이유는 이 영화가 다른 누구도 쉽게 선택하지 않았던 소재, 한국 근대사의 역사적 하룻밤을 용기있게 담아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단지 시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세밀한 고증과 끈질긴 영화적 풍자로 축약해내는 것에도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야만의 심장을 꿰뚫은 야수의 심정! 풍자를 넘어 증언”(박평식)이라는 성취로 각광받았고, “박정희의 유령을 쫓아내기 위한 엑소시즘처럼 보인다. 아주 자극적인 역사적 사실을 아주 고질적인 정신병에 충돌시켜 아주 요란한 정치적 굉음을 내고 있는 이 영화는 그래서, 아주 화끈하게 정치적이고 아주 화끈하게 대중적이다”(남재일)라는 호응을 얻었다. 기형적 한국 근대사에 대한 영화적 맞장인 동시에, 대중이 보아야 할 매끈한 대중영화로서도 손색이 없음을 인정받은 셈이다. 김우형 촬영감독의 기술력과 주인공을 맡은 배우 백윤식, 한석규의 신들린 연기가 더해져서 이루어진 것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영화적인 너무도 영화적인 인생예찬_ <사랑니>
조용하게 완성됐지만 일부에서 크게 환호받은 올해의 영화가 <사랑니>다. 감독 정지우는 전작 <해피엔드>에서 백일몽의 시간을 빌려 치정의 윤리극을 만들어낸 바 있다. 그러나 영화적 완성도면에서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사랑니>가 30살 먹은 학원 여강사와 그 학원에 다니고 있는 남학생과의 러브스토리라고 알려져 있을 때까지만 해도 이 영화 역시 크게 주목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영화가 선보이자, 흔히 돌아다니는 연상연하 커플의 연애담이 아니라, 영화적으로 숨바꼭질하고 있는 이야기의 아름다움에 이 영화의 중심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랑니>는 느리게 숨쉬지만, 일상을 관조하는 영화도 삶의 단면을 통해 전체를 환유하려는 사실주의 영화도 아니다. 오히려 환상적 구도의 추상화에 가까운 <사랑니>는 인생과 사랑을 편협하게 바라보는 시각을 향한 단호한 비판이고 고통과 희열이 뒤섞인 삶의 복잡한 감흥을 노래하는 인생예찬이다”(김혜리), “관계라는 배열 속에서 변화무쌍한 특이성과 신비함을 갖는 사랑을 <사랑니>는 치아의 배열, 즉 치열에서 가장 늦되게 발달하는 사랑니에 빗대고 함수 속으로 밀어넣어 재배열시킨다. 누가 보든 이 기획은 사랑의 본질 운운하는 본질론이라기보다는 가히 구조주의적일 것이다”(김소영)라는 호평과 극찬은 그래서 나왔다.
금단의 영역을 향한 싱싱한 한방_ <용서받지 못한 자>
만약 이 영화가 영화과 대학생의 졸업작품이 아니었다면 조금 덜 평가받았을까? 꼭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남성성의 실체가 얼마나 보잘것없고 우스꽝스러운지를 똑바로 응시”(남동철)한다. 그것은 곧 “군대 내 자살에 대한 세밀한 주석이자, 한국 남성의 성장과정에 대한 날카로운 소묘”(신윤동욱)라는 의견과도 맞닿아 있다. 군대를 막 제대한 그가 대학의 졸업작품으로 아직 기억의 온기가 남아 있는 군대 이야기를 하겠다고 작정했을 때, 이미 사건은 시작됐다. 대한민국 남자들이 기억 한쪽에 밀어놓고 억지로 잠재우는 진실을 두들겨 깨운 것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었다. 개봉 즈음에 촬영 과정상의 문제로 육군본부로부터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 방해죄라는 이유로 고소당하기까지 했는데, 역으로 그건 이 영화가 그만큼 금단의 영역을 과감하게 건드렸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디테일과 에피소드를 조립하여 내놓은 유머, 그리고 주제에 대한 결기를 잃지 않는 고집이 잘 어우러진 영화다. 만약 <씨네21>의 설문 조사에 ‘올해의 신인감독’란이 있었다면 올해 그 자리에는 감독 윤종빈의 이름이 올랐을 것이다.
역사와 장르의 교배에 대한 성공적인 리트머스지_ <혈의 누>
장르적 심화나 횡단을 추구하는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진 한해였다. 그러나 성취감을 안겨준 영화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올해의 베스트 5 중에서 유일하게 장르영화로서 <혈의 누>가 올라 있는 것은 그 작품들 중에서도 이 영화가 가장 돋보인다는 평가에 다름 아니다. <혈의 누>는 구문물과 신문물이 소용돌이치는 조선의 어느 시대 외딴섬을 무대로 펼쳐지는 역사추리물이다. 전작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멜로드라마라의 감성을 스릴러물과 유사한 구조로 완성했던 감독 김대승은, 역으로 이번 영화에서는 추리물에 근간하여 멜로의 감정을 넣었다. 그럼으로써 사극이라는 시대 배경에 멜로의 정취와 추리소설의 스타일을 혼합하여 독특한 역사추리물을 선보인 것이다. “요즘 보기 드물게 정직하고 성실한 영화”(김봉석)라는 의견은 그 혼합의 세공술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지적이다. 한편으론, “근대적 기계장치로의 변화에 개입된 여러 요소들과 잔존하는 전근대가 <혈의 누>에서는 다른 질서, 다른 배열로 전환되지 않고 피와 눈물과 비가 뒤섞인, 착종된 미결의 상태, 시대로 남는다”(김소영)는 이론적 분석의 실마리도 제공했다. <혈의 누>는 장르적 요소를 역사 안에 어떻게 개입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준 일종의 성공적인 리트머스지 역할을 했다.
이스트우드의 백만불짜리 걸작
2005년 외화 베스트 5
<씨네21>의 기자들과 평론가들이 선택한 2005년 최고의 외화는 <밀리언달러 베이비>다. 연초 <뉴욕타임스>와 오스카를 강타했던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위대한 권투영화는 거의 1년이 지난 설문에서도 압도적인 지지를 통해 정상을 차지했다. 인생의 황혼을 맞은 트레이너 프랭키와 복서가 되기에는 너무 늙어버린 매기가 나누는 교감을 포착한 <밀리언달러 베이비>는 영화의 마지막 순간 프랭키의 쓸쓸한 뒷모습을 통해 인간다움의 본질에 대해 질문한다. 노장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태평양전쟁의 이오지마 전투를 다룬 <우리 아버지들의 깃발>을 후반작업 중이다.
2위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가 차지했다. 고레에다 감독은 17년 전의 끔찍한 실화에서 재연적 요소를 최소화하고 시나리오 없이 구성한 아름답고 차가운 미장센으로 관객의 가슴을 두드린다. 칸영화제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손에 쥐고 “이걸 집에 가져가도 되나요?”라고 물었던 열다섯살의 야기라 유야를 포함한 아역들의 생생한 연기는 어떤 기성배우도 흉내낼 수 없는 신비함과 슬픔을 자아낸다.
3위는 피터 잭슨의 오랜 숙원이던 <킹콩>이다. 1933년 <킹콩>을 기반으로 한 피터 잭슨의 <킹콩>은 타자의 영역에 서성이던 한 괴수를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승화시킨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 전체의 두배에 달하는 미니어처, 피터 잭슨의 트레이드 마크인 실사와 디지털의 절묘한 조합, 강력한 이야기 구조가 어우러지며 <킹콩>은 2005년의 대미를 장식한 최고의 블록버스터로 평가됐다.
4위는 허우샤오시엔이 오즈 야스지로에게 바치는 헌사 <카페 뤼미에르>다. <카페 뤼미에르>는 소시민의 세계에 집중했던 오즈 야스지로와 필름으로 역사를 써내려가던 허우샤오시엔이 도시라는 공간에서 재회하는 듯하다. 그것은 김소영 교수의 지적처럼 이 작품의 관심이 “희망이 아니라 역사적 조건 속에서 마치 삶을 살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카페 뤼미에르>는 선배에게 바치는 일방향적인 헌정앨범이 아닌 두 거장이 벌이는 숨가쁜 협연처럼 보인다.
5위는 알렉산더 페인의 재기 넘치는 로드무비 <사이드웨이>의 몫이다. 마일즈와 잭이라는 두 남자가 와인과 연애를 넘나들며 벌이는 길 위의 해프닝 속에는 오랫동안 숙성된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유머가 녹아 있다.
순위/
1. <밀리언달러 베이비> 2. <아무도 모른다> 3. <킹콩> 4. <카페 뤼미에르> 5. <사이드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