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새로운 큰손 나타나다
KT, KTF 등 통신회사 충무로 진입
충무로를 주도할 새로운 자본의 출현인가, 콘텐츠 확보를 위한 일시적인 투자인가. 통신사들의 충무로 진출은 2005년 산업계의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다. 연초 SK텔레콤이 국내 최대의 매니지먼트 업체인 싸이더스HQ와 영화제작사 아이필름 등의 지주회사격인 IHQ에 144억원을 투자해 2대 주주가 된 데 이어 KT와 KTF는 싸이더스FNH에 230억원을 출자해 최대 주주가 됐다. 이후 SK텔레콤은 300억원 규모의 영상펀드를 구성하고 있으며, IHQ를 통해 YTN미디어를 인수하는 등 영화-미디어계로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다. KT 또한 콘텐츠 확보를 위해 770억원을 투자할 방침임을 밝혔다. 이와 관련해 최근 남중수 KT 대표는 “(싸이더스FNH처럼) 인수도 고려한다. 그러나 투자와 제휴도 진행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통신 관련 초대형 기업들의 충무로 진입은 DMB, 와이브로, IP-TV 등 새로운 통신 미디어를 활성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보인다. 양질의 콘텐츠를 확보해야 이들 새로운 통신 서비스가 활성화되고 치열한 경쟁에서도 활로가 열리는 탓이다. 지난 11월 SK텔레콤이 최대주주로 있는 TU미디어의 DMB망을 통해 아이필름의 <새드무비>가 상영된 것은 이러한 움직임의 상징적인 사건이다. 충무로는 이들의 막강한 자본이 멀티플렉스에 기반한 대기업 자본의 제한성을 극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일면 기대하면서도, 통신 미디어를 통한 영화 상영이 일반화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자칫 DMB 등이 가뜩이나 고사 위기에 놓인 DVD 등 부가판권 시장을 냉각시킬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통신사의 진입이 충무로의 득이 될지 해가 될지 여부는 2006년부터 드러나기 시작할 것이다.
4. 죽은 박정희가 산 영화인들을 무릎 꿇리다
일부 장면 삭제부터 명예훼손 공판까지, <그때 그사람들> 사태
‘그때 그 사람들’로 남고 싶은 걸까. 아니면 ‘그때 그 사람들’이 무서웠던 걸까. 1월31일, 법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지만씨가 낸 영화상영 금지 가처분 신청에 대해, 세 장면을 삭제해야만 <그때 그사람들>의 상영이 가능하다는 판결을 내놓아 영화계 안팎에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겼다. ‘사전심의는 위헌’이라는 1996년 헌법재판소의 뜻깊은 결정을 사법부 스스로가 망각하고 휴짓조각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법원은 영화의 도입부와 마지막에 부마항쟁, 박 전 대통령의 장례식 등의 다큐멘터리 자료화면이 배치됨으로써 “영화 속 ‘각하’를 실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묘사한” 것으로 관객이 오해할 수 있고, 이는 “고인의 인격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판결 배경을 밝혔다. 하지만 영화계 안팎에선 “사실인지 허구인지는 사법부가 아닌 관객이 판단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라고 비난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도 “일반 시민이 예술창작물의 내용을 향수,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원천 봉쇄한다는 점에서 실질적으로는 검열과 다를 바 없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그때 그사람들> 사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현재 박 전대통령 명예훼손 관련 공판이 벌어지고 있는 것. 11월24일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와 영화평론가 김영진씨가 출석한 가운데 재판이 열렸고, 내년 1월에는 조갑제 전 <월간조선> 편집장과 조희문 상명대 교수가 증인으로 출석할 예정이다. 재판 결과와 무관하게, 보수언론이 가세한 정치적 공방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또 되살아난 가위질의 망령으로 인해, 정작 관객과 행복한 만남을 갖지 못한 <그때 그사람들>의 상처는 아물지 않을 듯하다. 무지화면으로 대체된 3분50초는 여전히 무지한 한국사회에 대한 침묵 시위처럼 보인다
5. 영화제는 누구의 것인가
제10회 부천영화제와 제5회 광주영화제의 파행
영화제는 시민의 것인가, 시장의 것인가. 2005년 벽두부터 부천영화제는 코미디에 가까운 해프닝을 벌였다. 국내외 영화인들의 거센 항의에도 불구하고 부천시는 “시민과는 유리된 일부 마니아를 위한 영화제로 전락했다”는 자기 폄하와 함께 그동안 성공적으로 영화제를 이끌어온 김홍준 집행위원장을 해촉했고, 이어 김도혜, 김영덕 등 프로그래머들까지 해고함으로써 화를 자초했다. 입맛에 맞는 인사들로 기존 운영 인력들을 대체한 부천시는 프로그램보다는 이벤트 유치에 몰두했고, 그 결과 지난해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20%대의 낮은 좌석점유율을 기록했다. 반면, 대안영화제임을 알리며 같은 기간 열렸던 리얼판타스틱영화제는 짧은 준비기간에도 불구하고 60%대에 달하는 높은 관객 호응을 끌어냈다. 성공적인 영화제 개최를 위해서는 자율성 확보가 필요하다는 점을 부천영화제 사태가 일깨웠다면, 올해 광주영화제의 졸속 운영은 전문적인 인력의 필요성을 실감케 했다. 임재철 프로그래머를 일방적으로 해고한 김갑의 집행위원장은 이후 아놀드 슈워제네거와 메릴 스트립를 초청하고, “필름이 없다면 DVD를 틀어서라도” 제임스 카메론 특별전을 열겠다는 어이없는 발언으로 영화계 안팎의 빈축을 샀다. 관객과 언론의 외면 속에 5회 영화제가 초라하게 치러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2006년, 이장호 감독을 새로운 집행위원장으로 들인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원기를 되찾을 수 있을까. 최근 시 의회가 내년 예산 전액 삭감 결정을 내려 존폐 위기에 처한 광주국제영화제는 회생이 가능할까. 영화제를 관객에게 온전히 돌려주겠다는 반성과 혁신이 없다면, 두 영화제의 앞날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6. CJ, 쇼박스, 롯데 시대 열리다
멀티플렉스 체인 가진 대기업들 충무로에 완전 안착
‘충무로’라는 단어는 여전히 유효한가. 토착 영화자본의 자존심을 지켜왔던 시네마서비스가 지난해 말 CJ엔터테인먼트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감에 따라 한국 영화계의 투자·배급이 대기업 중심의 구도로 변모했다. CJ는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 사이 시네마서비스의 지분 40%를 가져갔고, 극장체인 프리머스의 지분 70%를 인수했으며, 미술·세트업체인 아트서비스까지 인수했다. 또 시네마서비스가 제작하는 영화들에 150억원을 투자해 더욱 두터운 ‘혈연관계’를 맺었다. 시네마서비스가 배급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투자의 상당 부분을 CJ에 의존함으로써 당분간 독자적인 행보는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다. 또 다른 토착 자본인 청어람 또한 자금사정 악화에 따라 <괴물> 등의 배급권을 쇼박스에 넘기고 투자·제작에 전념하고 있다.
반면, 그동안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롯데엔터테인먼트는 올해 <B형 남자친구> <강력3반> <새드무비> <나의 결혼원정기> 등을 투자·배급하면서 충무로에 안착했다. 이로써 CGV, 메가박스, 롯데시네마라는 멀티플렉스 체인을 갖고 있는 CJ, 쇼박스, 롯데 등 대기업이 한국 영화산업의 ‘빅 3’로 부상하게 됐다. ‘빅 3’ 안에서의 변화에도 눈길을 줄 만하다. 그동안 ‘절대지존’의 위상을 지켜오던 CJ가 부진한 틈에 쇼박스가 대약진을 한 것. 쇼박스는 <말아톤> <웰컴 투 동막골> <가문의 위기-가문의 영광2> 등으로 전국 3천만명 이상의 관객을 불러모으며, 12월 중순 현재 배급사 순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2006년은 쇼박스와 조직개편을 단행한 CJ, 좀더 능숙해질 롯데 등 대기업과 KT의 힘을 받은 싸이더스FNH, <광식이 동생 광태>로 독자 배급에 성공한 MK픽쳐스 등이 힘을 겨루게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