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아오야마 신지를 만나다 [1]
2005-12-29
글 : 이다혜
<유레카> 아오야마 신지 감독의 작품세계

아오야마 신지의 시선은 담담하고 고요하지만, 화면 속 사람들은 죽을 힘을 다해 “왜 살아야 하는가” “사랑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와 같은 문제에 매달린다. <와일드 라이프>에서 느닷없는 리듬으로 보는 이를 웃기는가 하면, <호숫가 살인사건>에서는 스릴러보다 공포영화에 가까운 장면들로 혼을 쏙 빼놓고, <헬프리스>를 통해 폭주할 수 밖에 없었던 어느 오후를 담담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각본, 편집, 연출을 동시에 할 뿐 아니라 음악을 직접 작곡하고 연주하는 그의 영화에서 느릿하지만 유려하기 그지없는 리듬에 몸을 맡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의 영화를 몇 페이지로 요약해 전달하는 것은 그래서 불가능한 일이다. 영화만이 가지고 있는 호흡과 리듬, 대사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그 풍부한 세계를 그는 체험적으로 느끼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서울독립영화제 특별전을 위해 서울을 찾은 그를 만나, 그의 영화들에 대해, 그의 삶에 대해 들어보았다. 머지 않은 미래에 그의 영화를 극장에서 자주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하며.

“내가 살아난 게 잘못인가.”

버스납치사건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버스운전기사 사와이가 홀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유레카>의 장면은 아오야마 신지 감독의 영화를 관통하는 명징한 의문부호에 연결된다. 아오야마의 영화에 유독 죽음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래서 당연해 보인다. 사람을 죽이거나 자살하거나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이. 대개의 사건은 사람이 죽는 일에서 촉발된다. 죽음은 모든 사건의 종착점이 아닌 시발점이 된다.

이는 아오야마의 관심이 전후 일본 사회에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전쟁에 패배하고, 쇼와 천황이 죽은 뒤의 일본사회에서 사람들은 살아가는데, 살아남은 이유를 스스로 납득하고 생을 이끌어가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게 아오야마의 생각이다. 95년에 있었던 옴 진리교 사건을 접하고 그가 접한 충격은 그 자신의 세대가 사건의 주역들이라는 것이었다. “옴 진리교 사건에 관련된 사람을 아는 사람들이 주변에 넘쳐났다. 왜 우리 세대는 이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었는가를 묻고 싶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시공간은 근미래이지만, 그 시공간의 사람들은 자살병에 걸려 생의 의욕을 잃고 있다. <유레카>의 등장인물들은 어렵게 버스납치사건에서 살아남았지만 살아남은 게 잘된 것인지, 자신의 생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 혼란을 겪는다. 자신의 내부에 갇힌 주인공들이 비로소 폭발하게 되는 계기는, 그의 속에 살고 있는 서부극의 형식으로 표현된다. 트라우마에 꽁꽁 묶인 채 소극적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에게 침입자가 찾아온다. 주인공이 속한 작은 공동체(혹은 관계)는 위협당하고, 주인공은 길을 떠나 침입자를 처단하지만 결국 깨닫는 것은 자기를 포박한 트라우마의 원인을 마주하지 않고는 평화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건이 해결된 마지막 순간에 주인공은 다시 길을 떠난다.

폭력적 침묵으로 가득 찬 데뷔작 <헬프리스>

95년에 만들어진 그의 데뷔작 <헬프리스>는 폭력적 침묵으로 가득 찬 영화다. 출옥한 야쿠자 야스오는 보스를 찾아 죽이고 싶어하지만 보스가 이미 죽었다는 말을 듣는다. 그는 (이미 죽은) 보스를 자기 손으로 죽이기 위해 길을 떠난다. 야스오와 아는 사이인 켄지는 야스오의 여동생을 잠시 돌봐달라는 부탁을 받는데, 병원에 입원한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영화를 만들던 당시에 아버지 또는 국가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정말 빚밖에 없었다.” 전쟁의 패배감으로 쇠잔해진 이들의 상처는 결코 치유될 수 없다. 켄지 역의 아사노 다다노부가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는 이 영화에서, 조용하게, 나른할 정도로 조용하게 시작된 오후는 시간을 더해갈수록 죽음으로 가는 폭주기관차처럼 변해버린다. 빚만 남기고 죽어버린 아버지 앞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분노의 끝을 보는 것뿐.

<헬프리스>

<헬프리스>에서 아오야마는 이후 그의 영화에 가장 큰 조력자가 돼줄 촬영감독 다무라 마사키를 만났다. “다른 일본인들과는 완전히 다른, 설명할 수 없는 첫인상”을 준 다무라 마사키는 <유레카> <쉐이디 글로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등 아오야마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함께 일했다. 아오야마는 다음 작품을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한 의논대상이 다무라 마사키라고 말하면서, 그와 다음 작품의 형식을 논의하면서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 찾아간다고 말했다. 다무라 마사키의 카메라는 <헬프리스>에서 시작된, 롱테이크가 많지만 때로 속도감 있게 폭주하는 리듬을 아오야마의 영화에 불어넣었다. 아오야마의 영화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리듬은 촬영과 음악, 그 두 가지에서 비롯된다. 유난히 긴 상영시간의 <유레카>에서 다무라의 카메라는 움직임이 많지 않은데, 인물들을 다그치지 않고 삶의 리듬 그대로, 노이즈가 포함된 세세한 순간 그 자체를 포착하는 데 성공한다.

2000년 칸 국제비평가협회상 수상작 <유레카>

<유레카>는 상영시간이 3시간37분에 달하는 작품으로, 2000년 칸영화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하면서 아오야마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안긴 작품이다. 버스운전사 사와이는 버스납치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다. 하지만 사와이도, 그와 함께 살아남은 나오키와 코즈에 남매도 살아남은 이후의 삶에 적응하지 못한다. 사와이는 무작정 집을 떠나 떠돈다. 나오키 남매의 어머니는 가출을 하고 아버지는 사고로 죽는다. 남매는 집에서 오도카니 살고 있다. 몇년 뒤, 이 슬픈 작은 마을로 사와이가 돌아온다. 그 무렵부터 마을에는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하고 사와이는 용의자가 된다. 사와이는 나오키 남매만 살고 있던 집으로 가 아이들과 살기 시작하고, 어느 날 남매의 사촌이라는 남자가 이들을 찾아온다. 다시 살인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한 어느 날, 사와이는 나오키 남매와 그들의 사촌을 싣고 길을 떠난다.

매일 같은 루트만 도는 버스를 운전하던 사와이는 이번엔 버스를 몰고 상처가 시작된 곳, 인질극이 벌어졌던 광장으로 간다. 오래된 서부극처럼, 빛바랜 세피아색 모노톤으로 시종일관 진행되는 이 영화에서 사와이와 남매는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길을 떠났으며, 상처의 시작점을 마주하고서야 귀로를 발견한다. 존 포드의 <수색자>를 참고했다고 아오야마가 밝힌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느릿하고 힘겹게 움직인다. 상처에서 회복되기까지, 고인 물처럼 멈추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을 그는 영상으로 표현해낸다.

<유레카>

<헬프리스>에서 켄지가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순간처럼 인물들이 길 위에 머무르는 시간이, <유레카>에서는 더욱 많아진다. 아오야마는 길 위에 있는 시간을 특히 공들여 찍는다. <쉐이디 글로브>에서는 주인공이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리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장면을 아무 설명이나 대사없이 오래 보여주는데(이 곡은 그 자신이 작곡하고 연주했으며 불렀다), 이런 순간이 영화마다 나온다. 주인공이 차에 올라타면 카메라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차에 올라타 드라이브를 즐긴다.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움직이는 과정을, 목적이 아니라 과정으로만 존재하는 그 시간을, 길이라는 장소를 아오야마는 자못 진지하게 응시한다. 시간을 멈추어버리는 듯한 이런 순간에서 아오야마 특유의 리듬이 생겨난다.

<차가운 피>는 옴진리교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작품. 종교 단체와 관련된 사건을 수사하던 소스케는 현장에서 총을 맞은 데다 범인에게 총도 빼앗긴다. 그는 형사 일을 관두고, 그의 아내는 그를 떠나버린다. 그러나 자신의 총이 연쇄살인에 이용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소스케는 범인과 총을 찾아나선다. 아오야마의 영화에서는 형사들이 등장한다 해도 사건의 수수께끼를 푸는 데 주력하는 것이 아니다. 좀더 중요한 것은 형사와 살인자가 서로의 내적 동기를 탐구하는 데 집중한다. <차가운 피>의 소스케는 범인 시마노를 뒤쫓으면서 뜻밖에도 사랑의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시마노의 옛 연인은 “사랑을 증명하는 것은 살인밖에 없다”고 말하지만, 소스케는 “죽는 것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 사랑을 증명하는 데는 그 두 가지 방법이 있어”라고 아내에게 말함으로써 평온을 찾는다.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장기적 낙관주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아오야마는 근작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에서 영상과 사운드가 일치되면서 날아오르는 듯한 순간을 포착해내는 데 성공한다. 죽음에 이르는 자살명이 만연한 근미래. 노이즈를 음악으로 만드는 뮤지션에게 한 할아버지가 손녀를 맡긴다. 자살병에 걸린 사람들이 그의 음악을 듣고 치유되는 것 같다며. 영화가 절정에 달하면 놀랍게도, 소리의 울림이 시각적으로도 전달된다. 과거와 현재가 겹치고 죽은 여자와 산 여자가 오버랩되며, 모든 것이 소리를 따라 진동한다, 울린다, 흔들린다. 연주에 열을 올리는 미즈이의 모습은 하늘을 나는 새에 오버랩된다. 소음 같았던 기타 연주는 점점 잦아들면서 마치 바람소리처럼 곱게 흐르고 마침내 멎는다. “누구도 다시 시작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은 그저 계속될 뿐이다.” <유레카>에 나왔던, 이 절망적으로 들렸던 말에서라야만 희망이 시작된다는 것은 영화에서 거듭해 다시 새로운 울림을 갖는다. 살아 있어도 괜찮아. 정말로, 살아 있어도 괜찮아.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는 것. 아오야마 신지의 영화에서 위안을 얻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사진 최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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