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미술로 미리 보는 <음란서생> [3] - 반가
2006-01-04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조선시대 한옥은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정말 한옥에 들어가 살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조근현 미술감독은 그것이 20세기 초반 함부로 지은 한옥 탓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하여 <음란서생>이 수백년 전 한옥을 다시 지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조근현 미술감독은 한옥 답사를 다니던 시절 눈여겨보았던 경주 양동마을로 내려가 150여채가 넘는 양반 가옥과 초옥을 살피고 ① 윤서의 집을 찾아냈다. 김대우 감독 눈에 들어온 집은 대청마루가 시원하고 족자 한점이 걸려 있는 어느 한옥이었다. 그 집을 기본으로 하여 실내는 흥선대원군의 사택이었던 운현궁에서 골라냈다. 중요한 공간 중 하나이기에 자극적이기보다 담담한 정서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이 집에서 조근현 미술감독은 <형사 Duelist>를 찍으면서부터 고심하던 문제 하나를 해결했다. “창호지를 사이에 두고 조명을 비추면 빛이 퍼져서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다. 창문을 뜯어내는 수밖에 없는데, 한옥은 현대건축과 달라 창문 크기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도 없다.” 때문에 그가 선택한 소재는 ‘샤’라고 불리는 인조견직물이었다. ‘샤’는 옆에서 보면 창호지와 구분하기 어렵고 빛을 그대로 통과시키는 직물. 부유한 조선 사대부는 비단으로 벽과 문을 발랐다는 기록도 있어 없는 물건을 가져다 썼다는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좋았다. 그 대신 운현궁 창호지를 뜯어내어 천을 붙이고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창호지를 복구하는 공사를 해야만 했다.

조선 제일 문장가로 담백한 선비였던 윤서는 의상팀한테도 묵직한 짐이었다. 기존 사극과 다른 옷을 입히고 싶었지만 난데없는 인상을 주면 안 됐고 강직하기에 사치를 부릴 수도 없었다. 그렇게 쾌자가 등장했다. 소매없는 겉옷이라 생각하면 맞을 쾌자는 조선 후기에나 사용됐지만 단아한 푸른 색조를 다치지 않으면서 변주를 시도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기 때문이다. 이 기본 형태는 의금부 도사 광헌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러나 광헌은 한복 원단에 가까운 윤서의 옷과 달리 현대적인 원단을 사용했다. 감독과 미술 관련 스탭들이 하나같이 말하는 광헌은 부유하게 태어나 외국 문물을 가까이 할 수 있었던 복받은 사대부다. 조근현 감독은 그가 “공부는 못했지만 그림 과외도 받고 하여 취미로 붓을 잡게 되었다”고 짐작한다. 그러므로 광헌은 생기 넘치는 녹색의 무관이다. 텍스처가 도드라지는 원단으로 연두색 옷을 지어입고 패턴 박힌 천을 뒤집는 파격도 시도했다.

② 광헌이 그림을 그리는 작업실도 처음엔 녹색이 감도는 방이었다. 조근현 미술감독은 민속촌에서 보았던, 붉은 목재를 쓰고 아기자기한 화단을 꾸며놓은 이국적인 한옥을 떠올리며, 푸른 화단이 놓인 광헌집 외벽을 상상했다. 그러나 영화는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어느덧 초목이 시드는 늦가을이 되었으니 마당에 푸른빛이 남아 있을 리 없었고, 작업실에서도 녹색을 걷어내야 했다. 다만 일본풍이 섞인 녹색비단보료는 살아남았다. 광헌이 소유한 부(富)는 반입식인 정빈의 처소와 비슷하게 입식과 온돌이 섞인 작업실 구조에서도 드러난다. 조근현 미술감독의 추리다. “지금으로 치면 강남에 사는 부유층에 해당하는 사대부들이 먼저 온돌을 시험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꺼번에 집을 뜯어고칠 수는 없지 않나. 아마 잠을 자는 장소는 온돌을 깔고 나머지는 중국처럼 입식이었을 거다.” 광헌은 그림그리는 무관이기에 중국에서 제작해온 탁자와 의자가 유용하기도 했다.

광헌과 윤서가 조우하는 공간은 의금부다. 김대우 감독과 조근현 미술감독은 조선 후기 사진 기록에 영감을 받아 의금부 감옥을 원형으로 설계했지만, 원형 감옥이 들어갈 만한 실내 세트가 없어, 곡선을 그리며 휘어지는 절충안으로 만족했다. 대신 ③ 고문실에 정성을 쏟았다. 넓은 판석으로 바닥을 깔고 쇠갈고리가 늘어진 고문실은 중세 유럽을 모방한 듯도 싶다. 그러나 조근현 미술감독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사진을 보았더니 고문실은 반지하처럼 낮은 장소에 지어진 듯 싶었다. 그래서 반단 아래에 방을 만들었고, 피를 씻어내기 쉽도록 돌을 깔고 도랑을 냈다.” 피에 젖은 고문기구와 그 피를 씻을 우물이 있는 이 방에서 윤서와 광헌은 자신의 진정한 마음과 대면하는 시험을 받게 될 것이다.

“시치미 떼는 영화의 느낌, 수묵담채화처럼 은근하며 대담하게”

조근현 미술감독 인터뷰

-<천군> <형사> 이후 또다시 시대극을 선택했다. 이유가 무엇이었나.
=한번 더 사극을 하면 제대로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극은 벽만 만들어선 세트를 지을 수 없다. 기둥이 보여야 하고 기둥을 잇는 들보가 있어서 윗부분까지 올려야 한다. 조명을 하기도 어려워서 프리 프로덕션 단계부터 미술과 촬영, 조명이 긴밀하게 협조할 필요가 있다. 이번 영화에선 그동안 쌓인 노하우와 함께 일했던 팀들이 커다란 에너지를 만들어냈다.

-<음란서생>을 어떤 톤의 영화로 만들고 싶었는가.
=영화를 준비하던 초반에 김대우 감독과 수묵담채화 한점을 보고 이런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선비들이 있고 가장자리에 건물이 걸쳐 있는 그림이었는데, 색이 연하고 군데군데 붉고 푸른 포인트가 있는 정도였다. 나는 이 영화가 시치미 떼는 영화인 것 같아 그런 분위기의 화면에서 엽기적이고 코믹한 대화가 흘러나왔으면 했다.

-일부러 고증에 얽매이지 않고자 하는 사극도 있지만 그 반대의 길을 선택했다.
=조선시대 사용했던 물건들이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근거도 필요했다. 사람들은 눈에 익은 소품이나 의상이 아니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단 한줄이라도 문헌이나 기록을 바탕으로 삼았다. <음란서생>을 보다보면 저것이 조선시대 의상의 색채가 맞나, 그때 쓰이던 물건인가 의아할 때도 있겠지만 모두 고증을 거쳤다. 순수하게 창작한 부분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내시관과 그곳에서 쓰이던 거세 도구 정도다.

-<음란서생> 촬영이 끝나가고 있다. 가장 보람있었던 기억은.
=배우들이 진짜 그 시대로 돌아가 연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고 말해주었을 때다. 흔히 영화가 픽션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필름이 돌아가는 순간만은 모든 게 진짜다. 그러므로 카메라에 세트의 두면만 잡힌다고 해서 나머지 두면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리얼한 연기가 나올 수 없다. 모든 스탭의 에너지가 한번에 담겨 구현되는 게 배우의 연기가 아닌가. 그런데 미술이 연기에 도움이 되었다니 내겐 큰 보람이다. 세트와 의상, 소품, 분장팀도 모두 좋았다. 구체적으로 주문하지 않고 믿고 맡겨도 좋은 팀들이었고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컸다. 상점거리 오픈세트만 해도 애초 <형사> 자재를 재활용하자고 말했지만 세트 제작회사 대표가 욕심을 내서 값비싼 자재로 다시 짓고 말았다. 그 회사, 아마 하나도 안 남았을 거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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