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호의 아들이라는 그림자
2세 배우들이 ‘아버지의 아들’로 불리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겠지만, 김희라에게는 <마부> <아빠의 청춘> 등으로 유명했던 아버지 김승호의 그늘이 워낙 크고 짙었다. 김승호와 작업했던 많은 감독들은 아버지가 타계한 직후 배우의 길로 들어선 아들 김희라를 향해 “아버지를 넘어서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하기 때문에 앞으로 많이 힘들어질 거라며 걱정 어린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는 것이 김수용 감독의 회상이다. 김희라는 자신이 배우가 된 것이나 연기하는 방식에 아버지의 영향이 “전혀 없었다”고 잘라 말하지만, 그가 2001년 오랜 침체 끝에 악극 <아빠의 청춘>(아버지의 대표작을 각색한 작품)으로 연기 활동을 재개하려 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김희라를 배우로 데뷔시키고 많은 작품을 함께한 임권택 감독은 그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이해를 보여준다. “김희라군은 용모와 체격이 좋아서 연기자로서 훌륭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배우로서도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아버지가 명배우였고 스타였지만 그만큼 좋은 환경에서 자라지 못하고 고생을 많이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살아온 삶 자체가 여러 환경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런 체험이 영화에서도 깊고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었던 것 같다.”
1970년 한해에만 서른편 가까운 작품에 출연하는 기록(자신은 26편이라고 기억하고 있지만, 개봉 기록에 근거한 자료에는 29편으로 나타나 있다)을 세우기도 했던 그는 1990년대에 접어서면서 부진을 겪는다. 액션에 어울리는 외모와 연기 스타일이 액션의 퇴조와 함께 길을 잃은 것이거나, 반대로 “아무 역할이나 잘 소화해냈다는 것이 오히려 단점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는 김수용 감독의 이야기로 그 원인을 미뤄 짐작할 뿐이다. 1994년 <증발>은 그런 만큼 김희라가 배우 인생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자신의 정치적 성향이나 견해와 무관할뿐더러, 박정희 대통령과 선친과의 각별했던 관계를 생각하면, 더더욱 출연하기 힘들었을 작품이지만, 그는 신상옥 감독의 지명도와 프로젝트의 규모를 믿고 베팅하기에 이른다. “처음엔 이 영화로 세계적인 배우가 되나보다 생각했다.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이라도 받을 줄 알았고, 그런 기대 때문에 미국 촬영에 자비를 들여 날아다닐 만큼 정성을 다했는데, 결과가 기대에 못 미쳤고, 정계에서 욕도 많이 먹었다.” 그간의 부진을 씻을 기회로 삼았던 <증발>은 국내에 제대로 선보이지도 못했고, 이후 김희라는 정치와 사업으로 무게 중심을 옮겨갔지만, 거듭 실패를 겪으며 건강을 잃었다. 쉰이 되면 아버지처럼 죽는 줄만 알았고, 그래서 ‘단명 공포’에 시달렸다는 그는, 쉰을 넘긴 뒤로 한동안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삶을 살았다.
다시 스크린 앞으로
불화로 12년간 헤어져 살았던 아내 김은정씨가 곁으로 돌아오면서, 김희라는 당뇨와 혈압과 뇌경색 등으로 약해진 몸과 망가진 삶을 추스렸고, 배우 활동을 재개하는 것까지 고려하게 되었다. 영화를 다시 시작한 건 순전히 “우리 앵벌이 마마(부인 김은정씨를 가리킴)가 하라고 해서”라지만, 그의 마음엔 아직도 “내가 가고자 한 길에서 일인자가 되고, 세계와 겨루고 싶은” 욕망이 자리잡고 있다. 김희라가 옛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반골 기질’에 매혹돼 상도 삼촌 역으로 제일 먼저 그를 떠올렸다는 최호 감독은 “건강과 가정사와 사회적 포지션에서 큰 격변을 겪으셨는데, 이젠 배우로서의 삶에 집중하실 수 있길 바란다. 배우 김희라가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다”고 전한다. 이 작품을 선보이고 나면 많이 바빠질 것 같다는 덕담에 “구라치지 말라”고 무심한 척 대꾸하던 김희라는 자신이 바라는 건 흥행이나 인기가 아니라고 했다. “좋은 세상에 좋은 후배들 키울 수 있는 학교 하나 만들고 싶다. 우리 민족의 뛰어난 예술성, 그 자부심을 후배들에게 심어주고, 새로운 예술을 창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다. 한류라고 자만하고 주접떨 때가 아니다. 그보다 더 심오한 예술을 보여주고 가르쳐야 한다.” 얼마 전부터 전북과학대에서 방송영상을 전공하는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헤어지려는 길, 남포동 거리에서 허름한 차림새의 취객이 그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선생님, 영화 잘 봤습니다. 반갑습니다.” 모자까지 벗어들고 꾸벅 인사를 하며 성큼성큼 다가오는 발걸음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마치 어제 개봉한 영화를 보기라도 한 것처럼 친근한 인사말을 건네던 그는 김희라의 오랜 공백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무려면 어떠랴. 서민의 친구였고 시대의 반영웅이었던 그는 이미 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는데.
캐릭터별로 보는 출연작
김희라의 다양한 분신들
100편을 훌쩍 넘는 김희라의 출연작 중에서 대표작 몇편을 꼽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아래 작품들은 작품성이나 연기력을 기준으로 가린 것이라기보다는 김희라라는 배우가 가진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는 취지에서 골라보았다.
▶백수건달: <꼬방동네 사람들> 1982년 배창호
주인공을 중심으로 본다면, 김희라는 그저 안성기-김보연 커플의 재결합을 막는 훼방꾼이겠지만, 그의 역할은 그렇게 단순하게 치부할 수 없는 복잡한 사연이 있다. 부인이 벌어먹이는 무능한 가장이며 술고래인 그는 아내에 대한 사랑은 나름대로 극진한 편인데, 아내의 전남편, 그리고 자신의 어두운 비밀을 아는 누군가의 등장으로,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연적의 멱살을 잡는가 하면, 술을 권할 줄도 아는, 인간미 있고 익살맞은 건달 혹은 탕아.
▶빨치산: <짝코> 1980년 임권택
전쟁이 끝나갈 무렵 처음 만나 이후 수십년 동안 쫓고 쫓기는 경사와 빨치산의 이야기. 추적과 도피로 온 세월과 에너지를 쏟은 이들은 늙고 병들어 갱생원에서 마주하게 되는데, 가족도 재산도 청춘도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어진 이들 사이엔 묘한 우정과 연민이 싹트기 시작한다. 악명 높은 빨치산으로 ‘짝짝이코’를 가졌다 해서 ‘짝코’라 불린 사내의 패기만만하던 삶이 도망자의 창백한 공포에, 노년의 회한에 물들어가는 과정을 인상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악당: <시라소니> 1979년 이혁수
김희라가 연기한 흔치 않은 악당 캐릭터. 처음에 시라소니 역할을 원했던 김희라는 당시 인기 상승 중이던 이대근이 주인공으로 낙점된 것을 알고, 그 반대편에 선 악독한 일본 깡패를 연기하기로 하고, 한 쪽 눈동자가 하얗게 보이는 공포스런 분위기를 연출하는 등의 설정에 공을 들였다고 한다. 시라소니에게 눈을 잃었기에 그에게 더욱 복수의 날을 세우게 된다는 히스토리를 스스로 만들어낸 셈이다. 채석장에서 벌이는 이대근과 김희라의 마지막 결투신이 하이라이트다.
▶반항아: <어제 내린 비> 1974년 이장호
심약하고 창백한 지식인 타입의 동생에겐 뒤늦게 맞은 이복형이 있다. 화류계에 있던 어머니의 방탕한 삶을 보고 자란 형은 반항적이고 냉소적인 인물이다. 우연히 한 여인과 격정적인 사랑에 빠져들지만, 그가 동생의 연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동생에게 돌려보내기 위해 마음에 없는 언행을 하고 만다. “당신을 갖고 싶다. 난폭하게 소유하고 버리고 싶다”는 연애 편지의 구절이나, 삼각관계라는 난처한 상황에서 번뇌하는 김희라의 표정 연기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순정남: <석화촌> 1972년 정진우
무속과 관능의 향취가 어우러진 토속물에서 김희라는 너무 순박하고 우직해서 이용당하거나 피해를 입는 청년을 연기하곤 했다. <석화촌>에서 그는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한 이웃 처녀(윤정희)가 집안 사정으로 부잣집에 씨받이로 팔려가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필사적으로 그녀를 되찾기 위해 애쓴다. 언뜻 <너는 내 운명>의 황정민과도 겹치는 모습. 김희라는 이후 <초분> <불의 딸> 등의 시대극에서 비슷한 이미지로 출연한 바 있다.
▶주먹: <왼손잡이> 시리즈 1970년 김효천
<왼손잡이> 시리즈는 김희라 자신이 가장 아끼는 작품이기도 하다.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상하이 뒷골목을 주름잡던 인물이 자신을 배신한 옛 동료와 운명의 결전을 벌이게 된다는 내용의 <떠나가는 왼손잡이>, 주먹을 쓰지 말라는 선배의 당부를 지키지 못한 왼손잡이가 적을 소탕하고 스스로 왼손을 자른다는 비장한 결론으로 치닫는 2부 <마지막 왼손잡이>는 같은 해에 만들어질 만큼 큰 인기를 누렸다. “유리창 격파하고 날아들기” 등 당시로선 ‘혁신적인 액션’을 선보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애국자: <쾌남아> 1970년 정인엽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떠돌이 악사로 위장한 고수 ‘애꾸눈 장’이 펼치는 복수를 따라잡은 영화. 가까운 이의 배신과 감춰졌던 아들의 존재 등이 미스터리 구조 안에서 펼쳐져 나간다. 혈혈단신 적진으로 뛰어들어 “니 두목의 장송곡을 연주하러 왔다”고 호기롭게 외치는 그의 모습에는, 결국 적마저 “넌 역시 멋있는 사내다”라고 인정하며 할복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고, 이후 비슷한 성격, 비슷한 분위기의 애국 청년으로 자주 등장한 것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