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연>을 보기 전 기대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 식민지 여성으로서 큰 꿈을 실현하기까지 그녀는 어떤 신산(辛酸)한 삶을 살았을까? 둘째, ‘친일-항일’만 논구되던 시대극에서 실제 대다수를 차지했을 회색지대의 삶의 논리를 어떻게 포착, 제시할 것인가? 영화는 두 질문 어디에도 답하지 않는다. 신산한 삶 대신 달콤한 로맨스가 끼어들고(흡사 순정만화를 보는 듯하다), 이분법을 거둬내기 위한 서사적 노력과 회색지대에 대한 치열한 탐구를 저버리고, 난데없는 고문 장면과 신파로 우회하여, 그녀의 “어쩔 수 없었음”을 설득해내려 한다.
신여성: 그녀는 낯설다. 20년대 화면 속에 80년대 운동권 문화 이후에나 가능했던 중성적 엘리트 여성이다. 술집에서 혼자 술 마시고 담배 피우며, 결혼과 무관한 섹스를 즐긴다. 물론 20년대가 무릇 ‘연애의 시대’였으며, 식민지보다는 본토가 진보적일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20년대 신여성에게 여전히 ‘여성성’이 강조되고, 당시 연애가 정조관념에 매여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파격이다. 문제는 설득일 텐데, 영화는 그녀를 이해할 어떠한 단초도 제공치 않는다. 조선 시골에서 학교 가지 말라는 아버지와 싸우던 치마 저고리의 소녀로부터 붕∼ 떠서 일본의 중성적인 비행사를 만나는 건 대략 난감하다 (더욱이 “자기∼”, “기분이 꿀꿀해∼” 같은 대사는 뭔지?). 어떻게 그녀에게 이런 변신이 가능했을까 궁금할 찰나, 한지혁이 나타난다. 그는 그녀가 곤란할 때마다 술집에도, 학교에도, 짜잔 나타난다. 대구 부호의 딸로 여고를 다녔고(당시 조선에 여학생 수가 3천명에 불과했다), 자퇴 뒤 일본에 갔다 왔으며, 간호사로 일했다는 모든 변곡점들은 생략한 채, 그녀는 이미 80년대 여성이 되어 있고, 그녀의 삶을 웬 멀쩡한 남자가 적극적으로 돕는다. 거의 ‘신데렐라’, ‘키다리 아저씨’, SBS 드라마 <토마토>(1999)가 연상될 지경이다. “정말 운도 좋군!” 그녀의 식민지 여성으로서의 전투적 삶에 대한 영화적 변(辯)이다.
친일: 어른들이 망국을 애통해할 때, ‘닌자의 비상’을 꿈꿨다는 소녀의 말은 신선하고 발칙하다. 딴은 그럴 것이다. 일제시대 독립투사는 소수였고, 친일은 (감정적 거리감은 있지만) 현실적 선택일 수 있었다. 영화 전반부는 시대가 거의 안 느껴질 정도로 민족주의적 긴장감이 없다. ‘조선인 1%’의 풍류를 보여주다 영화는 급물살을 탄다. 생뚱맞게 독립투사로 몰린 것이다. (한지혁도 이 사건도 모두 허구지만) 뭐 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민족이니 친일이니 하는 데 아무 생각이 없(었다)던 그녀의 삶에 이 사건은 어떻게 기능하는가? 통상적으론 두 가지가 가능하다. 첫째 ‘내가 아무리 생각을 안 해도 정치적 상황이란 존재한다’는 걸 깨닫고 민족의식을 갖게 되거나, 둘째 ‘항일투사로 몰리는 건 끔찍하니, 살기 위해선 적극적 친일을 해야겠다’고 굳히는 것이다. 그녀는 어느 쪽도 아니다. 애인은 그녀를 위해 죽으며 “조선이 뭘 해줬냐, 네 꿈을 펼쳐라”라고 ‘대신’ 읊조리고, 그녀는 ‘못 이기는 척’ 일장기를 든다. 어정쩡했던 ‘역도산’마저 스스로 “조선이고 일본이고 난 그런 거 몰라” 하며 최소한의 커밍아웃을 하였건만, 그녀는 그녀 입으로 어떠한 입장 표명도 하지 않은 채, 선전비행에 나선다. 결국 고문 장면과 한지혁은 그녀의 변명을 대신하기 위해 허구적으로 배치된 것이다. 차라리 그녀가 확신에 찬 친일파로 날아오르는 정공법을 택했더라면, 영화의 가치는 달라지고 논의를 훨씬 풍성하게 했을 것이다.
죽음: 비행대회 후배의 죽음을 목격하고도 그녀는 승부를 건다. 목숨을 건다. 나아가 마지막 비행은 자살 혹은 정사(情死)에 가깝다. 이미 <남극일기>가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거는 짓’의 무모함을 까발렸건만, <청연>은 이를 꽤 숭고한 열정인 양 그린다. 그녀의 33년 사고사는 무엇보다 감독에게 가장 반가운 것이었으리라. 애매한 정치적 판단중지 상태에서, ‘불꽃 같은 죽음’만큼 근사한 미학적 봉합이 또 어디 있겠는가?
<청연>은 비겁하다. 매 순간 시대와 싸워나간 신여성이자, 친일을 택한 정치적 판단 주체였을 그녀를, 시대적 중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미래인’이자, 아무것도 판단치 않은 채 얼떨결에 정치적으로 이용당한 자로 그리다, 죽음 충동으로 끝맺으며 봉합하는 건 무책임하다. 한마디로, “비겁한 변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