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영화를 옹호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드러나 있는 장점과 단점들 중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 영화 <청연>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는 별다른 고민없이 양쪽 모두의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아마 이것은 이 영화의 장점이기도 할 것이다.
<청연>이라는 영화를 옹호하기 위해, 나는 일단 이 영화의 만듦새를 칭찬할 것이다. 가지고 있던 아이팟에서 대충 아무 곡이나 따온 것 같은 미하엘 슈타우다허의 음악만 빼면 (분명 뭔가 뒷이야기가 있을 것이라 믿는다) <청연>은 좋은 ‘한국식 블록버스터’이다. 들인 돈값을 하는 때깔 좋은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칭찬받을 자격이 있다.
<청연>은 좋은 ‘데이비드 린’ 영화이기도 하다. 나는 윤종찬이 자기만의 데이비드 린 대작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라고 믿는다. 정치적으로 결백하기 짝이 없는 영웅적 인물 대신 근대화의 역사 한가운데에서 모호하기 짝이 없는 길을 선택했던 박경원이라는 회색 인물을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라고 믿는다. 그런 모호함은 데이비드 린 캐릭터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린과 로버트 볼트가 니콜슨 대령이나 T.E. 로렌스, 로지 라이언과 같은 인물을 선택한 건 그들이 완벽하게 옹호될 수 있는 인물이어서가 아니다.
매국노, 독립투사, 민중이란 삼분법에 이의제기하다
이런 선택은 거의 해독작용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일제시대를 다룬 대부분의 한국영화는 일종의 민족주의적 결벽성에 의해 지탱되어왔다. 이 세계에서 한국인들은 오직 셋으로만 나뉜다. 매국노, 독립투사, 학대받는 민중. 탕녀, 열녀, 강간 피해자의 구분과 특별히 다르지도 않은 이 간단한 분류법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무시무시한 의심의 시선이 돌아온다. 어떻게 보면 한국인들의 정신이 가장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던 시대의 묘사가 단순한 삼분법에 의해 통제·관리되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자기부정이며 많은 사람들의 믿음과는 달리 종종 역사 청산의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박경원의 이야기는 그 시대가 사람들에게 강요했던 어쩔 수 없는 인간조건에 대한 흥미로운 생각거리를 제공해줄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이 인물의 선택을 옹호한다.
자연인 박경원과 극중 캐릭터 박경원의 연결점이 최선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고 그것은 정당하다. 하지만 나는 <청연>의 극중 캐릭터 박경원이 믿음직스러운 하나의 역사적 상을 제공해주었다고 믿는다. 영화 속의 박경원이 가는 길은 조선 여성이라는 이중의 제약 속에서 자신의 목표를 위해 필사적으로 투쟁하는 한 인물이 충분히 선택할 수 있는 길이다. 그리고 나는 영화가 그 캐릭터를 이해하는 게 그 선택을 옹호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믿는다. (클라이맥스의 노골적인 일장기의 행렬을 보면서 그걸 무시하기는 어렵다.) 같은 논리로 나는 영화에 삽입된 가상의 로맨스도 어느 정도 용납할 수 있다. 적어도 따로 떼어놓고 보면 그것은 타당하고 좋은 연애 이야기이다. 단지 고문 장면은 좀 오버였지만.
나는 <청연>의 이야기가 박경원이라는 소재를 다루는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믿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박경원 영화는 박경원이라는 캐릭터의 미스터리를 완전히 벗기지 않고, 불필요한 로맨스나 변명을 덧붙이지 않고, 좀더 충실하게 실존인물의 삶에 접근하는, <시민 케인>이나 <스타비스키…>와 같은 영화이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은 영화를 들어 실제 영화를 비판하는 것은 반칙이다. 이는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한국 블록버스터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나는 다소 기만적인 이 영화의 마케팅 담당자들을 이해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게 옹호되어야 한다는 건 아니다.
<청연>은 좋은 블록버스터이고 좋은 멜로드라마이다. 실존인물에 대한 정확한 묘사는 아닐지라도 당시 인간조건에 대한 타당성있는 초상을 그려 보이고 있다. 이 영화가 제시하는 질문들, 그리고 그 작품 자체가 가진 한계나 단점들은 적절한 토론들이 따라준다면 충분히 생산적인 결과를 끌어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영화를 보지도 않았고 십중팔구 몇 주 전까지는 박경원이라는 사람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사람들이 지금 인터넷에 퍼붓는 육두문자들의 나열을 그 생산성있는 토론의 일부로 인정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