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감독(씨네월드 대표)의 발이 땅에서 살짝 떠보인다. 세 번째 연출작 <왕의 남자>에 대한 세간의 평은 그렇게 호의적이다. 플롯이나 주제의 폭과 깊이는 물론이고 코믹한 묘미도 <황산벌>의 세계를 훌쩍 뛰어넘었다. 이준익 감독 자신은 “제작자 혹은 외화 수입업자였다가 <왕의 남자>에 이르러 감독으로서의 의지를 어느 정도 존중받는 선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배우 정진영은 “언제부턴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리송해졌다. 그는 어디론가 가고 있다. 그 끝이 어딜지 알 수 없으나 그 끝을 꼭 보고 싶다”고 말했다. 데뷔작 <키드캅>을 떠올리면, 특히 그의 충무로 입문 전사(前史)를 들어보면 허튼 기대가 아니다. 이준익 감독을 주목할 만한 ‘충무로 브레인’으로 일찌감치 지목해온 임범 <한겨레> 문화부장이 인터뷰어로 나서주었다.
충무로 전사(前史) -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중학교 때 이광모 감독과 같은 반이었던 적이 있지만 우등생이었던 그에 비해 이준익의 성적은 끝에서 선두를 다퉜다. 그렇게 흘러가던 고교 2년, 인문계로는 대학을 바라보기 힘들고 미대라면 혹시 모르겠다는 진학지도를 받았다. 대학에 대한 생각은 그때 처음 했다. 그날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서울대를 찾았다. 미대로 올라가 작업에 몰두하던 누군가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서울대에 들어올 수 있나요?” “아무나 들어오는 게 아니다.” 홍익대 미대를 찾아갔다. 역시 비슷한 답변을 받았으나 화실 한곳을 소개받았다. 화실 선생에게 돈이 없으니 먹고 자면서 청소하는 걸로 대신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세종대 회화과를 들어갔다. 대학 1년 때 덜컥 아이를 낳았다. 우윳값 벌이는 가시밭길이었다. 고정직을 얻으면 숨통이 트일 것 같아 정부종합청사를 찾아가 청소라도 시켜달라고 했다.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끈질기게 버틴 끝에 겨우 얻어낸 24시간 맞교대 경비직. 그러나 그곳의 공기는 20대 혈기로 버티기에는 갑갑증을 일으켰다. 밤새 한컷짜리 시사만평을 수북이 그려 조선일보를 찾아갔다.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동아일보로 발길을 돌렸다. 역시 같은 답.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한국일보까지 두드렸으나 허사. 그때 디자인하면 돈이 좀 되니 자리를 만들어볼 수도 있다는 선배의 손길이 다가왔다. 순수회화 전공이라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차라리 극장 간판 그리겠다며 명보극장을 찾아갔다. 극장 미술실을 노크해 “간판 그리고 싶어 왔는데요” 했다.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입장권을 사서 들어갔던 터라 하길종 감독의 <땡볕>을 보며 눈물을 좀 흘렸다. 결국 디자인쪽으로 방향을 수정했다. 월간지에서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솜씨를 인정받다가 봉급이 좀더 많다는 선배의 말에 솔깃해 서울극장의 합동영화사 선전부장 자리를 덜컥 맡았다. 이준익은 광고기획으로 영화계에 입문했고, ‘감독은 아무나 한다’는 신념어린 오기를 갖게 됐다.
임범/ 후배 기자가 <왕의 남자> 시사회에서 감독 가까이 앉았는데 이 감독이 울더라고, 그것도 많이 울더라고 하더라. 왜 그랬을까? 자기 영화 보면서 자기가 우는 건 좀….
이준익/ 영화에 감탄해서, 영화가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자기 설움을 자극받아서.
임범/ 왜? 장생(감우성)의 처지가 자신을 닮아서?
이준익/ 시나리오 쓸 때 이미 장생에게 나를 담았지. 소설도 마찬가지겠지만 감독이 주인공의 내적 갈등을 동일시할 때만 관객에게 진정성을 전달할 수 있으니까. 수원행궁에 딱 한컷 찍으러 갔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 정진영에게 그랬어. 오늘 이 영화 최고의 컷 찍는다고. 공길(이준기)과의 사이에 문제가 생기고 녹수(강성연) 만나러 갈 때 연산(정진영)이 손가락으로 창문살을 드르륵 드르륵 치고 가는 장면 말이야. 녹수의 치마폭으로 되돌아가는 건데, 인간 특히 남자의 회귀본능 같은 거지. 죽기 전에 엄마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는 회귀 본능이랄까. 그 장면에서 특히 내 안에 있는 결핍의 열망이 울음을 자극했어.
임범/ 연산이나 공길의 캐릭터보다 장생을 보고 시나리오 들어갔다고 했던데, 어디가 자신과 닮았지?
깨부수는 게 예술의 기본 아냐?
이준익/ 장생처럼 세상에 대한 적개심이 아주 많은 사람이었어. 20대 초반부터 30대 중반까지 15년 정도를 세상에 대한 적개심으로 살았어. 아주 자유롭고 천진난만한 사춘기를 보냈는데 대학 1학년 때 아이 낳고 분윳값 구하러 다니면서 돈 때문에 자존심이 무너지는 경험이 너무나 세게 상처로 남아서 반드시 세상에 복수하겠다는 심리가 나도 모르게 형성된 듯싶어. 자의식이 짓밟힐 때, 보통 두 가지로 나뉘지. 지극히 순응적으로 되거나 지극히 반항적으로 되거나. 난 반항적으로 15년을 보냈고, 30대 중반부터 그걸 풀면서 10년쯤 지난 지금에는 몹시 행복하다고 할 수 있어.
임범/ 영화사 씨네월드를 차리면서 풀리기 시작한 건가?
이준익/ <간첩 리철진> 찍을 때부터. <키드캅>만 해도 적개심으로 만들었어. 미국영화에 대한 적개심. 그게 정상적 사고라기보다 이상한 돌연변이야. 내가 직배영화 반대 운동을 하면서 직배영화 광고로 먹고살아야 했는데 그런 자기 모순에 대한 만회 의식이랄까. 어렸을 때 TV로 즐겨 봤던 만화영화들이 모두 우리 건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전부 일본, 미국 건 거야. 마치 강간당한 느낌이었어. 근데 초등학생이던 내 아이 손잡고 극장 가면 볼 만한 영화가 <애들이 줄었어요> <구니스> 같은 건데 열불나더라고. 동양화를 전공해서 그런지 문화사대주의에 대한 반골이 더 심했고 그래서 대책없는 국수주의로 만든 것이 <키드캅>이었지. 내가 연출부를 해봤어 뭘 해봤어. 그때 가장 충격적이었던 사건으로 내게 영화적 자양분이 되어준 일이 있어. 친하게 지내던 후배가 지나가는 말처럼 그러는 거야. 선배는 여러 미덕을 갖고 있긴 한데 영화에 대한 존경심이 부족한 거 같아요, 라고. 난 영화에 대한 존경심이 없는 인간이구나, 하는 그 울림이 아직도 괴롭혀. 난 시네필의 경험도 없었고, 감독에 대한 꿈도 없었고, 영화판에 오려고 해서 온 것도 아니고 봉급 더 준다니까 와서 광고디자인 하면서 밥벌이 했던 거고…. 영화는 대중과의 채널 속에 기쁨과 슬픔을 나누며 100년을 지내왔는데 그런 영화에 대한 경외심이 아예 없었던 거야. 그래서 반성하기 시작했어. 할리우드 따라 한다고 재주 피워봤자 내 인생의 결핍을 메울 수는 없겠구나, 하고. 그때 조철현 대표랑 기획을 시작한 작품이 <아나키스트>였어. 박찬욱 감독이 잘 못 나갈 때 셋이서 시나리오 회의하다가 상하이까지 가서 시나리오 쓴 게 95년이니 벌써 10년 됐네. 근데 박찬욱이 그때 잘 못 나갈 때니까 캐스팅돼 뭐가 돼. 박찬욱이 일단 딴 영화찍고 오겠다고 하고 만든 영화가 <3인조>야. 이거 될 일도 더 안되는 거야. 그래서 외화 수입하면서 <간첩 리철진>부터 달려들었어. <아나키스트>는 해외 로케이션도 있고 헤비하니까 간단한 것부터 하자고. <간첩 리철진> 만들고 이제 <아나키스트>하자고 박찬욱한테 그랬더니 일주일만 먼저 얘기하지 그랬냐고 하는 거야. <공동경비구역 JSA> 계약했다는 거야. 박 감독에게 결과적으로 잘된 거지만, 그때 박 감독이 꼭 하고 싶으니까 <공동경비구역…>부터 하고 하면 안되겠냐고 그러는거야. 5년을 기다려온 거라 그냥 프로듀서에게 감독시켜 만들었지. 그 작품 하면서 영화를 존경하는 기반에는 영화에는 사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어.
<왕의 남자> 하면서 더욱 느낀 건데 원작자가 읽어보라는 책이 니체의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었어. 셰익스피어 서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극을 만드는 6대 요소에 대해 말한 걸 써놓은 게 있더라고. 플롯, 캐릭터, 스펙터클 등등. 여기서 꽂힌 거는 소트, 사상이야. 2300년 전에도 극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사상이 있어야 한다고 외쳤는데 21세기에 영화를 찍으면서 사상도 없이 한다는 건 영화를 존경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더 깊어졌지. 셰익스피어를 따라가다보니 아리스토텔레스를 굉장히 경계한 듯싶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 중 ‘하마샤’라는 게 있는데 어떤 인간이든 비극에 도달하는 이유는 성격적 결함 때문이라는 거야. 어떤 상황이 오면 꼭 나오게 되는 본인의 성격적 결함 때문에 비극을 맞는다는 거지. 그런데 현대문학의 아버지라는 셰익스피어는 ‘캐릭터 이스 데스티니’라고 했어. 성격이 운명이라는 거지. 햄릿이든, 맥베드든, 오델로든 성격이 운명이 되도록 캐릭터화한 거지. <왕의 남자>에서 장생, 연산, 공길이 다 그렇지만 특히 장생은 성격이 운명인 인간이야. 기존 신분이나 광대라는 위치에서 수긍해야 하는 시대의 관습을 깨는 게 장생의 성격이고 그 성격이 운명이 된 거지. 끊임없이 관습을 깨나가는 일관된 성격이 비극을 부르는 거야. 사실 셰익스피어에서 가져온 게 많아. 연산은 햄릿과 리어왕을 짬뽕했어. <햄릿>에서 숙부에 대한 원한이 연극을 통해서 드러나듯 여기선 광대극을 통해 연산의 원한이 비쳐지잖아. 자기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의구심이 비극을 가져오는 하마샤인 거지. 공길의 하마샤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에게 지극히 순응적이라는 것이고. 물론 연산의 자기연민에 심정적 동병상련이 있는 거지만. 장생은 그 모든 걸 넘어서려고 하는데 자기파괴적이지. 예술가는 장생 같은 거라고 생각해. 깨부수는 게 예술의 기본 아냐? 그래서 예술은 레프트(좌파)야.
임범/ 내 느낌에는 조직을 꾸리고 이론적으로 움직이는 좌파라기보다 기질적 좌파에 가까운 것 같아. 내치는 대로 욕하고 싫으면 말라고 하는. 그런 점에서 장생과 닮은 듯싶은데 <씨네21>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계급에 대한 영화라고 말한 대목에는 동의가 좀 안돼. 그건 지극히 일부분 아닌가.
이준익/ 일부분이지. <씨네21>이 그걸 너무 강조해서 좀 불만이야.
임범/ 말한 대로 이 비극은 장생의 기질 때문에 나오는 거지 계급 때문은 아닌데 말야. 양반이 그렇게 하고 싶은 말 마구 하고 다녔으면 더 빨리 죽었을 테니까. 시나리오 쓸 때 계급이란 변수를 어느 단계에서 얼마나 의식했지?
이준익/ 사실 계급은 신분을 대칭해서 하는 말이야. 모든 권력은 계급질서에서 나오는 힘인데 권력 해체의 가장 효과적 방법은 계급을 해체하는 거야. 여기선 권력에 대한 관계성을 해체하자는 의미에서 계급적이라고 한 거야.
기술없이 예술한다는 건 사기야 사기
임범/ 장생의 기질을 그냥 운명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비극적인데, 엔딩에서 실존적 냄새가 날 것 같은 지점에서 영화가 묘하게 달라지더라고. 그게 매력적이었어. 장생이 눈이 먼 뒤에 어렸을 적 얘기하는 장면에서 이 친구가 믿을 것 하나 없이 그냥 홀로 버텨왔구나, 속이 텅 빈 느낌을 받았어. 이게 안쓰러우면서 어떤 무게감을 주더라고. 이런 점도 계산이었나.
이준익/ 계산은 아니고 본능이지. 시나리오 쓸 때, 뭔가 규정지어지는 안에서 마무리하는 건 못견디겠더라. 이 패러다임 안에서 끝까지 가보니 장생의 그런 허탈함이 나왔어. 장생의 눈이 파이고 난 뒤의 정체성은 그 전과 좀 다르지. 영화에 수미쌍관으로 박아놓은 게 봉사놀이잖아. ‘나 여깄고 너 거기 있어?’라고 하잖아. 나의 존재는 너라는 피사체를 통해 확인된다는 거지. 인간은 자기 존재를 상대방을 통해서 확인해. 장생도 공길을 통해 마지막으로 자신의 존재를 재확인하잖아. 그게 인간의 바닥에서 나오는 감정이 아닐까. 그 목표를 정해놓고 간 게 아니라 더 가자, 더 가자 하다보니 거기까지 간 거야.
임범/ 저 녀석 영웅인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없잖아, 그런데도 영웅으로 살려니 참 힘들었겠다, 싶은 느낌이지. 쥐뿔도 없는데 자존심 지키며 살아가는 것에 대한 우리의 자괴감 같은 공감도 느껴지고.
이준익/ 눈 파인 장생이 이 개놈의 세상 한번 놀아보자고 할 때, 계급과 신분을 다 떠나 바닥까지 간 그 개인의 진정성에 동참하고 싶은 연산과 녹수의 모습이 보이잖아. 여기서 모두 하나가 돼. 인간의 광대성이지. 신들린 듯 논다는 신명은 자기를 잃어버리는 거야, 자의식 다 던져버리는 거야. 그러면 진짜 놀 수 있어. 영화에서 쿠데타가 와도 광대성의 시간은 영원히 박제된 채로 그렇게 끝나잖아.
임범/ 어차피 역사는 있는 것들이 다 해먹는다는 허무주의의 냄새는 <황산벌>이나 <아나키스트>에도 있었어. <왕의 남자>는 비슷한 얘기를 하는 듯하면서 도약해. 웅변적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텅 비워가는 방식이 멋있더라. 이준익식 세계관의 영화에서 훌쩍 넘어간 듯싶기도 하고.
이준익/ 기술이 늘어서 그래. 고스톱도 오래 치다보니 패가 보이더라고. 진실이야. <간첩 리철진> <아나키스트> <황산벌>에도 기본적으로 허무가 깔려 있어. <아나키스트> 준비하면서 관련 책들을 많이 보고 아나키스트의 정신세계를 탐구하면서 허무를 섭취한 부분이 있어. 코뮤니스트가 되지 못한 존재인 아나키스트는 허무를 가질 수밖에 없어. 코뮤니스트는 이상주의자고, 그 이상에 가지 못한 현실의 허무에 머무는 존재가 아나키스트야. 가능만 하다면 그냥 아나키스트로 죽고 싶은데, 인간의 욕망이라는 게 또 그렇게 못하지. 그 다음부터 기술이 느는 거야. <황산벌>만 해도 기술없이 갖다대는 거지. 그냥 불질러버리니까. 근데 안 통하더라고.
임범/ 통했잖아.
이준익/ 반만 통했지. 그래서 기술 좀 피웠더니 좀더 많이 공감하는 거 같아. 역시 기술강국이야.
임범/ 아직 개봉도 안 했는데 그런 말 하고 그러면 좀….
이준익/ 시사회의 느낌이 그렇다는 거지. 역시 현대는 기술사회야. 기술도 없이 예술한다는 건 사기야 사기. 옛날에는 기술이 없었으니 내가 사기 친 거지. <왕의 남자> 시나리오는 처음부터 구조주의로 짰어. 예컨대 장생, 공길, 연산의 삼각구도는 각각의 인물을 중심으로 세개의 하부 삼각구도가 짜여져. 장생-연산-처선, 공길-연산-녹수 등으로. 그리고 각 삼각구도는 절대로 서로를 간섭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움직여. 그런 식으로 기술을 부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