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왕의 남자>의 감독 이준익 [2]
2006-01-10
글 : 이성욱 (<팝툰> 편집장)
사진 : 오계옥

세상의 중심은 갈데없는 놈들이지

<왕의 남자>

임범/ 마지막에서 외연이 확 넓어지니까 계급이 들어오든 광대가 들어오든 뭐가 들어와도 좋아. <황산벌> 같으면 직설적으로 그냥 말하려고 했을 텐데. <왕의 남자> 시작했을 때 이거다 하는 느낌과 지금의 영화가 맞아떨어져?

이준익/ 맞아. 박흥룡 만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언제 영화로 하려고 하는데, 서자 이야기야. 민중, 대중은 어차피 피지배계급이잖아. 세상의 수직계급화에 모두들 불만을 갖지만 현실에 편승해서 살아야 하잖아. 영화는 판타지니까 그 반대로 가는 거야. 세상의 중심은 서자다, 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임진왜란 직전에 통신사가 일본 다녀와서 쳐들어온다 아니다 갖고 다투는데 그게 정보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이권에 대한 주장이었지. 정작 쳐들어오니까 다 도망가고 결국 지키는 게 서자, 농민이야. 갈데가 없으니까 지키고 버티는 거지. 이 세상의 중심은 그러니까 갈데없는 놈들이지. 6·25 때도 이승만이 괜찮다고 방송해놓고 한강 다리 끊고 바로 부산으로 도망간 거 아니냐고. <아나키스트> 마지막이 그래서 이승만 암살하러가는 대사로 끝나는 거야.

임범/ 이준익 스타일로 하고 싶은 소재는 자꾸 사극으로 갈 듯하네. 세상의 중심이 서자라는 건 서자가 중심이 돼 세상을 바꾸는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는 비극인데, 그렇게 살았다는 건 과거의 공간이니까. 현대로 넘어오면 그런 말 쉽게 하기가 좀 어려울 테고.

이준익/ 그래서 사극을 좋아하는 거지. 현대극은 현대적 리얼리티 때문에 설명하기 매우 힘들어. 그런데 현대를 지배하는 건 과거야. 누구도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현재와 과거를 분리하는 사고는 위험해.

임범/ 사극을 하면서도 동시대성을 얘기하겠다?

이준익/ 과거는 우리 모두의 리그라서 말하기에 더 좋다는 편리성이 있어. 지금 여기를 말하면 그건 너희들의 이야기이지 하고 치워버리기 십상이거든. 과거에 대해선 모두 수평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 삼국시대를 바라보는 우리는 모두 평등하잖아. 그게 시대물의 장점이지.

임범/ 세상의 중심은 서자다, 라는 테마는 앞으로의 영화에 계속 배어나겠지.

이준익/ 사상이니까 바꿀 수 없어. 마음 맞아서 간다? 그게 얼마나 가겠어? 마음은 수시로 바뀌는데. 근데 생각이 다르면 같이 못 가. 세상이 바뀌지 않으면 사상이 바뀌지 않지.

임범/ 역사에 대한 허무성과 서자들의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볼 때, 그런 취향을 제일 잘 살렸다고 본 감독이나 영화는 뭐지?

이준익/ 좋아하던 감독이 너무 많아서…. <집시의 시간>의 에미르 쿠스투리차가 멋있더라. 처음 수입했던 <성스러운 피>도 좋았고. 메이저에 편승하지 못하고 마이너로 겉돌면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강하게 내는 인간이 서자라고 생각하는데, 서자임에도 적자인 척 메이저에 편승하려는 인간은 별로야. 아웃사이더가 자꾸 인사이더가 되려고 덤비는 게 제일 없어 보여. 아웃사이더가 인사이더에 가래침 뱉으면 있어 보여. <황산벌>에서 병사들이 다 아웃사이더이고 그들이 침 뱉잖아. 그들이 주인공이야.

임범/ <왕의 남자>는 이야기는 잘 흘러가는데 세련미라는 점에서 보면 불안한 데가 좀 있어. 한성에 올라왔을 때 도성 전경의 CG나 감우성이 줄 탈 때 대역과의 매치는 좀….

이준익/ 당신이 영화전문가라서 그렇지 잘 안 보여. 그게 다 돈이야. 44억원 들였는데 100억원을 주면 당연히 달라지지. 사극을 4개월에 찍는 건 야매야, 하루 50컷씩 시장바닥처럼 찍는다고 생각해봐. 편집 붙는 것만 해도 다행이지.

임범/ 그래도 처음 감우성이 줄 타면서 붕붕 뜨는 장면은 좀….

이준익

이준익/ 아냐, 관객은 다 믿어. 줄타기 더 잘해도 안 좋다고 봤어. 기교가 감정을 넘어가면 감정이 깎여. 그러면 드라마가 얇아져. 돈을 많이 줘서 영화가 튼튼해지는 게 있지만 돈이 많아서 허술해지는 영화가 더 많아. 돈이 많다는 건 엑스트라든 엄청난 장비 등 벌이는 게 많은데 하루에 찍을 수 있는 건 한정돼 있잖아. 규모를 활용하려고 하다보면 볼거리는 있을지 몰라도 드라마를 놓치는 거지.

임범/ 시나리오 작법은 따로 훈련했나?

이준익/ 좋아하는 영화 틀어놓고 받아쓰기하는 거야. 10편만 하면 시나리오 훤해져. 그렇게 기술이 늘었어.

임범/ 뭐 베껴봤는데?

이준익/ 아카데미 각본상 받은 <스팅>도 해봤고, 기타노 다케시의 <그 남자 흉폭하다>는 스타일이 새로워서 해봤고. 근데 마케팅할 때 자막없이 초긴장하고 영화보는 게 훈련이 돼서 요즘은 영화 한번 보면 시나리오가 딱 외워져. 영어 잘하는 사람들하고 함께 자막없이 영화봐야 하는 데 얼마나 집중했겠어. 영화보고 나면 줄거리 설명은 내가 제일 잘하더라고. 영어 못하는 게 경쟁력이야.

임범/ 술자리에서 보면 성격적으로 결정론이 많아. 넌 서울대 나와서 그런 거라는 출신성분 결정론이 있고, 넌 지금 배가 안 고파서 안되고…. 그런 결정론으로 세상을 보니까 극단적 무례함이 있어.

이준익/ 난 재미로 그래. 상대방을 단정짓고 푹푹 찌르면 재밌어. 그래야 그 사람과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있는 게 자극이 돼.

임범/ 영화 찍을 때도 그런가. 너 인생 편하게 사는데 장생을 알아, 하고 감우성한테 그랬어?

이준익/ 찔렀을 때 부작용나는 사람은 안 찔러. 찌른다는 게 언뜻 매너없는 사람처럼 보이는데 오히려 애정의 표현이야. 상대방에 대한 호감이 없으면 뭐 하려고 해. 비켜나 있으면 되는데.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만든 매너라는 게 얼마나 위선적인지.

임범/ 씨네월드 영화에는 예전부터 여자 캐릭터가 별로 없어.

이준익/ 여자를 잘 몰라서 그래. 여자에 대한 매력을 난 잘 몰라. 오히려 남자한테서 느끼지. 동성애적이라는 게 아니고 여자의 속내를 잘 모르겠어. 저 말이 어디까지 진심이고 아닌지 가늠이 안돼. 그래서 공길이 캐릭터는 감우성 덕분이야. 장생을 맡았지만 공길이를 함께 맡아다오 했지.

임범/ 조철현, 정승혜 3인방하고는 계속 함께 가나?

이준익/ 동지는 죽을 때까지 가는 거 아냐. 정승혜가 영화사 아침, 조철현이 타이거픽처스로 각각 회사를 꾸린 건 영화를 여러 편 하려는 거야. 셋이 한 영화에 자꾸 쏠리니까 인력 낭비야. 15년 이상 같이 온 건 보통 일이 아니지. 마음은 맞았다 안 맞았다 해도 뜻이 같잖아. 젊은 시절 한 공간에서 영화로 숨쉬고 영화를 배웠어. 각자 그걸로 새로운 영화를 활발히 구현해 관객과 즐기자는 것이지. 돈 벌어 윤택한 삶을 하자는 식으로 대화를 해본 적이 없어. 다들 이재에 밝지 못하고.

선배 감독들이 못한 이야기를 할 거야

임범/ 59년생이니까 현재 기준으로 보면 나이는 거의 상한선에 가까운 세대에 속하잖아. 홍상수, 김기덕은 다른 과이고. 좀더 젊은 쪽은 실험을 많이 하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우연에 기대는 듯도 보이고. 풍성한 듯하다가 두서가 없는 듯하고. 대신 이 감독 영화는 하고자 하는 말은 분명한데 가늘어 보여. 자수성가한 세대의 특징이랄까. 인생을 먼저 배우고 그걸 영화에 담고자 하는 것도 그렇고.

이준익/ 한국영화의 불행이랄까. 임권택 감독 40년을 그냥 관통한 분이고, 같이 활동하던 동료는 중단됐고, 그 사이 10년 이상의 공백이 있지. 나보다 젊은 감독들이 실험이든 시도든 시행착오를 많이 하는 게 선배 감독의 부재가 한 이유일 수도 있고. 이건 불행이자 행운이기도 해. 눈치보지 않고 자기 멋대로 할 수 있고 그게 폭발적 에너지를 만들어내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뤘으니까. 그런데 득이 있으면 실이 무엇인가를 헤아리는 게 득한 자의 미덕이 아닐까. 일본영화의 면면히 내려오는 전통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들어. 우리 역사 자체가 단절과 굴절의 역사이긴 한데 영화라도 안 그랬으면 싶지.

임범/ 젊은 감독들이 포진한 상태에서 자기 개성으로 버틸 영화들은 어떤 걸까.

이준익/ 어떻게 내 세대에 맞는 영화를 할 것이냐에 있어선 후배들보다 할 이야기가 더 많을 것 같아. 선배 감독이 하고 갔어야 할 얘기를 못하고 간 게 많거든. 미국이 다 뽑아먹긴 했지만 일단은 베트남전. 70년대까지 한국을 지배했던 베트남전을 기억하는 나이대의 감독이 거의 없어. 한국군이 거기서 보낸 세월과 돈, 생명들에 대한 이야기가 <하얀 전쟁> <알포인트>와 드라마 몇개뿐이야. 지금 우리 영화에 없는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의 정서로 잃어버린 공간을 채워야 할 것 같아. 그런 점에서 역시 사극이 좋아.

임범

임범/ 좀 다른 이야기인데 김유진 감독의 <와일드 카드>를 보니 나이든 감독의 영화가 이야기를 이렇게 명쾌히 세우는구나 싶더군. 쉬운 듯 쉬운 게 아닌데, 나이든 감독의 발언의 자신감 같기도 하고. <왕의 남자>에서도 그런 걸 좀 느꼈고.

이준익/ 70년대의 정서를 가진 감독은 몇 가지 경험과 부족한 정보로 마구 우기는 시대였지. 80년대 들어서 정보가 많아지고 학습능력이 높아져 좀더 논리체계적인 걸 형성해왔는데, 지금 와서는 그것조차도 퇴물이 됐어. 지금의 사회처럼, 영화판도 386세대가 이끌고 가는데 그것이 지닌 우월성도 있지만 퇴행성도 있어. 그 다음 세대가 치고 올라오지만 여전히 그 앞이 없고. 그걸 해야 하는 게 내 세대의 사회적 몫이 아닐까 싶어.

임범/ 특이하게도 독설도 잘하고 후비는 것도 잘하는데 사람들하고 별로 안 싸우잖아. 허영 같은 게 없어서 영화 못 만들었다고 해도 별로 상처 안 받고. 그런데 정성일이 <황산벌> 보고 이 영화의 유일한 특징은 영화를 못 만든 거다, 했던 것 가지고 두고두고 이야기하는 걸 보면 그렇지 않구나 싶기도 해.

이준익/ 못 만든 부분이 있다는 거 인정하고 그거 즐기는 거야. 인정해야 극복할 수 있다고. 알코올 중독자가 중독을 인정하지 못하면 치료할 수 없잖아. 자신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노는 것처럼 재밌는 게 없어. 갖고 놀다보면 나중에는 콤플렉스가 장점이 되고 스타일이 돼. 엄청난 경쟁력이지. 장생이 콤플렉스가 많은 인간이니까 세상에 덤비잖아. 자신의 콤플렉스로 노는 거고. 남들은 빚 숨기려고 한다는데 난 빚이 벼슬이야.

임범/ 한국 영화산업은 빚테크라고 했는데 이번 영화로 빚 다 갚으면 어쩔 거야.

이준익/ <황산벌>로 10억원 갚았는데 아직 30억원이 남았어. 이게 다 배급하다가 빚진 거거든. 더 빚질 까봐 첸카이거의 <투게더>를 끝으로 배급에서 중도하차했어. 민폐 줄이려고. 배급 털려고 보니 30억원이 필요해. 시네마서비스의 강우석 감독한테 가서 돈 좀 빌려달라고 했더니, 지금 23억원 있다며 그냥 빌려주데. 이자도 없고, 그냥 벌어서 갚는다는 게 조건이야. 사실 30억원 빚의 모태는 12억원을 고스란히 날린 <공포택시> 제작이었어. 로저 코먼의 B급영화를 시도한 건데, 존 워터스의 <핑크 플라밍고> 같은 영화를 해보려고 했던 건데 말이지…. 사실 빚 때문에 <왕의 남자>를 더 치열하게 찍을 수 있기도 했는데, 빚 청산되면 좀 막막하겠지. 다 갚으면 당분간 감독으로 살래.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