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아무래도 퍼햅스 뮤지컬! <퍼햅스 러브>
2006-01-11
글 :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뮤지컬의 화려함 속에 어두운 광휘의 순간 들어 있는 <퍼햅스 러브>

<퍼햅스 러브>는 이즘 증가 추세에 있는 이른바 판(범)아시아 대작 중의 하나다. 지난 12월13일자 싱가포르의 대표적 신문 <스트레이츠 타임스>에는 장동건과 지진희 그리고 김소연의 얼굴이 보이는 <무극> <퍼햅스 러브> 그리고 <칠검>의 사진이 실렸다. 역시 범아시아 작품인 <신화>의 스틸도 실렸으나 인도 발리우드의 심벌인 말라카 쉐라와트의 모습이 보이고 김희선은 이름만 언급되었다. 기사의 제목은 ‘판-아시아 놀이터’로 아시아 프로듀서들이 대작을 만들기 위해 범아시아적 자본과 인력을 모으고 있다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리고 내용인즉, 판아시아영화의 시대가 왔으며, 12월14일 장동건이 <무극> 홍보를 위해 싱가포르를 방문한다는 것이다. 할리우드에서는 미국인, 영국인, 호주인 등이 한 영화에 동시에 등장하곤 하지만 아시아에서 이러한 믹스 매치는 막 시작되었다고 강조한다.

사실 이글을 싱가포르에서 전영객잔에 송고하고 있다. 영화적으로 말하자면 싱가포르는 에릭 쿠의 나라인데, 이 지면에서 정성일 평론가가 극찬했듯이 에릭 쿠의 신작 <Be With Me>는 주로 길거리 음식점들(호커)과 대형 쇼핑몰에서 이루어지는 이 도시의 삶의 다른 단면들을 절묘하게 포착해낸다.

난 겨울방학 동안 싱가포르국립대에 있는 아시아연구소(Asia Research Institute)에 와 있다. 홍콩영화와 왕가위에 대한 책을 펴낸 스티븐 티오(Stephen Theo)가 홍콩영화와 싱가포르,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영화의 상호교류의 역사 연구차 지금 이 연구소에 있다. 홍콩에서 만난 적이 있는 우리는 우선 <무극>에 대한 부정적인 공감대를 형성한 뒤, <퍼햅스 러브>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로서는 판아시아 프로젝트인 영화의 제작방식을 따라 판아시아 공동비평의 단초라도 마련할 요량인 것이다.

아시아의 지정학적 갈등은 어디로?

첫 번째 내 질문은 “<퍼햅스 러브>를 만다린 뮤지컬이라고 부르는데 ,만다린어로 뮤지컬을 공연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 계보는 어떻게 되는가?”

스티븐 티오: (점심을 먹다 말고 내 질문에 대답하느라 당황하며) 1950년대 말 싱가포르 자본으로 만들어진 캐세이(cathay) 스튜디오에서 일련의 뮤지컬을 만들었다. 그레이스 창이 주연인.

김소영: (매우 반가워하며) 그레이스 창이 나오는 <Wild Wild Rose>(1960)를 보았다. 그녀에게 관심이 간 것은 차이 밍량의 <구멍>에서 그레이스 창의 노래가 기려지는 것을 들은 이후다.

스티븐 티오: (점심 도시락을 다 먹고 갑자기) 커피 마실래?

김소영: (상냥하게) 지금 마시고 있잖아.

스티븐 티오: 여하간에 그레이스 창의 1957년도 작품 <맘보 걸>이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졌던 1954년 작품인 실바나 망가노가 주연했던 <맘보>의 영향에 의해 제작된 것이 만다린 뮤지컬의 특징이다.

김소영: 캔토니즈(광둥어) 오페라와의 차이는 무엇인가.

스티븐 티오: 조세핀 시오가 주로 주연을 맡았던 1960년대의 광둥어 오페라는 고전적 소재를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고, 만다린 오페라보다 한수 낮은 것으로 취급받았다.

김소영: 한국 배우 지진희가 나오고 일본·홍콩 배우 금성무, 중국 배우 주신, 홍콩 배우 장학우 그리고 인도의 파라 칸이 안무를 맡았으며, 홍콩 감독 진가신이 연출한 이 영화를 범아시아 프로젝트로 생각하는가.

스티븐 티오: 범아시아적이라기보다는 범중국적인 것 같다. 상하이, 베이징, 홍콩을 아우르는 .

김소영: 지진희의 역할은 어떠했다고 생각하나. 한국 배우가 했어야 하는 역할인가. 원래는 유덕화에게 역이 갔었다고 하는데….

스티븐 티오: 더빙을 많이 해서 잘 모르겠는데, 내레이터 역할이어서 누가 해도 상관없지 않았을까.

김소영: 지진희는 한국에서 좋은 연기자다. 드라마 <대장금>뿐만 아니라 <봄날>에서도 돋보였다.

스티븐 티오: 영화 평론잡지 <시티 엔터테인먼트>에서는 이 영화를 1930년대 상하이 영화 <십자가도>와 연결시키는데 난 관련성을 찾지 못하겠다.

김소영: 나도 <십자가도> 그 영화를 보았다. 이 영화에서도 금성무와 주신이 <십자가도>라는 노래를 부르기는 하는데….

스티븐 티오: 이 영화가 이전의 뮤지컬과 다른 점은 관객들에게 이것이 뮤지컬 장르라고 일러주는 것이다. <시카고>처럼 쇼 안에 쇼를 넣어, 뮤지컬 장르임을 전경화하는 것이 다르다. 이전에는 그냥 보여주었는데 <퍼햅스 러브>에서는 뮤지컬임을 양식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이 차이인 것이다.

김소영: 이 영화의 제작을 맡은 안드레 모건은 미국 출신이지만 이제 거의 홍콩 사람으로 보아도 좋지 않나.

스티븐 티오: 안드레 모건은 정말 홍콩 영화계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그렇지만 아시아와 미국 지역을 아우르는 배급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상의 대화를 배경과 맥락으로 삼아 이제 <퍼햅스 러브>를 들여다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장학우의 열연이다. 장학우는 중국 흥행 감독 니웨만이 아니라 뮤지컬 속의 뮤지컬에서 서커스 단장 역할도 하는데 처음 지진희, 금성무, 주신의 가창에 이어 장학우의 “you do love me” 가 울려퍼지는 순간은 그야말로 4대 천왕인 그의 경륜에 감탄하게 되는 순간이다. 물론 금성무도 나무랄 데 없이 매력적이지만 장학우가 입을 열어 소리를 토해내는 순간, 다른 사람들의 존재는 창백해지고 좀 철없는 아이들처럼 보인다. 뮤지컬은 원래 서사가 대단해서 보러 가는 장르는 아니지만, 이 영화의 줄거리도 심심하기 그지없다. 구조적으로 영화 속의 영화라는 심오한 이중무를 추고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다. 다만 지정학적으로 흥미로운 것이 있다면, 주인공들이 영화 속과 밖을 드나들며 연기하면서 그려내는 지리적인 동선이 상하이와 홍콩과 베이징을 가로지르고 있다는 점이다. 즉 현재의 금성무는 홍콩 스타 지엔이고, 주신이 연기하는 손나는 중국 스타이며, 둘이 영화를 찍고 있는 곳은 상하이다. 그러나 10년 전 지엔과 손나는 연인이었다. 베이징에서 지엔은 영화감독 지망생으로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고 손나는 무명 가수였던 것이다. 이러한 지리적 횡단이 지시하는 것은 물론 범중국적 반경과 그 장소들에 소속감을 느끼는 관객이지만 영화감독이자 영화 속 영화에서 서커스 단장으로 출연한 장학우의 존재는 좀 유별난 데가 있다.

금성무와 주신(우리에겐 <북경 자전거> <수쥬>와 같은 중국 인디 영화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 중국에서는 TV 드라마 스타로 각인되어 있다고 한다)이 홍콩과 중국의 스타라는 자신의 실제 커리어를 일종의 인터텍스트로 가져가는 반면, 장학우는 홍콩이 아닌 중국 흥행감독의 역할을 하고 또 영화 내내 그리고 영화 속 영화에서도 자신의 연인이자 주연배우인 주신을 홍콩 스타 지엔에게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한다. 홍콩 반환 즈음, 지는 태양이었던 홍콩영화 산업이 이제 중국 대륙의 관객들에게 말 걸고자 범중국, 범아시아적으로 영화 규모를 키우고자 노심초사하면서 상대의 호감을 끊임없이 살피는 모습이 장학우가 그려내는 영화감독에게 묻어 있는 듯하다. <무극>이 특히 심하지만 영화가 아시아의 관객들을 아우르려고 하면 할수록 아시아 각국간의 역사적이고 지정학적 갈등은 자취를 감추는데, <퍼햅스 러브> 역시 뭔가 구체적인 사회문제로 다가가는가 싶으면 얼른 뮤지컬의 판타지로 도망가버린다. 그리고 텍스트에는 어떠한 비판적 자의식도 없다. 지엔은 손나와 함께 과거 사랑의 흔적을 보여주러 베이징을 찾아가는데(베이징 장면은 크리스토퍼 도일이 촬영했다), 베이징은 e-bay, 옥션 등의 포스터로 뒤덮여 있다. 카메라는 별반 자의식 없이 그 광경을 지엔의 시점에서 보여주고,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서 우리는 바로 그 회사가 스폰서 회사 중의 하나임을 알게 된다. 심지어 지엔의 대사에 자신들이 베이징의 옛 보금자리를 개발업자들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라는 것이 강조되고 있음에도 영화는 홍콩, 상하이, 베이징의 도시들이 갖고 있는 문제들을 거의 건드리지 않고 살짝 빠져나간다.

진솔한 쓸쓸함의 광휘를 두른 <퍼햅스 러브>

뮤지컬로서는 매우 매력적이고 즐길 만하지만, 범아시아 프로젝트로 보자면 지역 관객들을 의식한 스타 캐스팅의 차별화를 제외하고는 변화하는 중국에 대해서 또 중국과 나머지 아시아의 관계에 대해서 새삼 생각할 거리를 주는 영화는 아닌 셈이다. 그래도 이번 겨울시즌 할리우드나 아시아나 블록버스터들이 거의 싱거운 CG 잔치들이라 (예를 들어 <나니나 연대기>가 주는 실망감이란. CG 사자 아슬란을 제외하고) <퍼햅스 러브>는 그중 사려 깊은 작품이다. 영화의 여러 곡들―‘남자는 질투하도록 되어 있어’, ‘운명’, ‘아마도 이것이 사랑’―이 계속 줄기차게 사랑을 노래하지만, 대부분 배신에 관한 것이거나, 결코 확신하지 못하는 ‘아마도 사랑’에 근접한 것을 가사로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뮤지컬용 세트의 화려함에 어울리지 않는 진솔한 쓸쓸함이 묻어나는 어두운 광휘의 순간들이 영화엔 있다. 아무래도 퍼햅스 뮤지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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