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쟁이라고나 할까. 진가신 감독은 상대가 기자가 아니더라도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염없이 풀어놓을 법한 사람이다. 홍콩 현지 프리미어 때 한차례 인터뷰를 가졌지만 서울에서 다시 2라운드를 가지게 된 데는 진가신 감독에게도, 아니 그의 수다 본능에도 책임이 있다. 당시 주어진 시간은 30분 남짓이었음에도 그는 홍콩과 중국의 영화시장과 범아시아 프로젝트 등 비즈니스맨으로서의 식견을 드러내는 데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한번 시작된 이야기의 방향을 튼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결국 그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들을 시간은 거의 없었던 거다.
그의 입을 통해 얘기를 꼭 듣고 싶었던 영화는 <퍼햅스 러브>다. 정통 뮤지컬이라기보다 ‘음악을 곁들인 멜로드라마’라고 표현하는 게 올바른 이 영화는 그동안 진가신 감독이 만들어왔던 영화와 일맥상통하면서도 커다란 변화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세 사람의 엇갈리는 사랑 이야기를 밀도있게 다룬다는 점에서는 <첨밀밀> 같은 작품을 떠올리게 하지만, 화려한 서커스 장면과 뮤지컬 스타일의 군무신에서는 <물랑루즈> 같은 뮤지컬영화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금성무(지엔), 주신(손나), 장학우(니웨), 지진희(몬티) 등의 화려한 캐스팅과 대대적인 물량공세, 발리우드 최고의 안무가 파라 칸의 안무 등이 곁들여진 <퍼햅스 러브>에 대해 진가신 감독은 “그동안 만든 영화 중 규모는 가장 클지언정 내용면에서는 가장 작은 영화”라고 말한다. 진가신 감독으로부터 듣는 <퍼햅스 러브>의 모든 것.
-<퍼햅스 러브>는 어떻게 시작된 프로젝트인가.
=공동 프로듀서인 안드레 모건이 제의했다. 그와 나는 11년 전 알게 된 이후 친구로 지냈다. 그는 내가 할리우드에서 <러브레터>를 만들 때 매니저 역할을 해줬고, 내 제작사 어플로즈 픽처스의 미국 자회사인 어플로즈 아메리카를 설립해줬으며, 내가 프로듀싱한 <디 아이>를 톰 크루즈의 제작사 ‘크루즈-와그너’에 판매하는 데 도움도 줬다. 그는 2∼3년 전 아시아 시장, 특히 중국이 개방되고 있다고 판단해 내게 뮤지컬을 만들자고 제안을 했다. 하지만 나는 전통적인 뮤지컬에는 부담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뮤지컬을 넘어선 무언가를 고민해왔다.
-이 영화는 뮤지컬이라기보다는 음악이 들어간 드라마에 가깝다.
=모건은 그야말로 전통적인 뮤지컬을 생각했지만 나는 뮤지컬을 넘어선 무언가를 고민했다. 뮤지컬에서 사람들은 노래하고 춤추고 행복해한다. 캐릭터들은 흑과 백으로 단순하게 나뉜다. 그는 내 <금지옥엽>을 보고 그런 제안을 했지만, 나는 그에게 “난 <금지옥엽> 때와 다른 사람”이라고 얘기했다. 내가 다른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얘기다. 뮤지컬이라는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을 만한 이야기를 새로 찾아내느라 2년 동안 고민을 해야 했고, 그 결과물이 <퍼햅스 러브>다.
-왜 전통적인 뮤지컬을 피했나.
=첫째 이유는, 관객으로서의 내가 극중 인물들이 노래하는 영화를 돈 내고는 보지 않기 때문이다. (웃음) 영화 안에서 극중 인물들이 노래 부르는 것을 설득력있게 보여주기는 어려운 일이다. 내 생각에 <어둠 속의 댄서>는 그걸 잘 해냈다. 그러나 이 영화조차 전통적인 뮤지컬은 아니다. 나는 현실적인 영화를 추구한다. 특히 대화는 리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현실적인 대화 가운데 갑자기 노래를 집어넣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결국, 노래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했고 그래서 ‘영화 속의 영화’라는 플롯을 만들었다.
-뮤지컬 장면을 보면 굉장히 다양한 앵글이 등장한다. 카메라를 몇대나 사용했나.
=2대만 사용했다. 결국 계속 찍고 또 찍는 수밖에 없었다. (웃음) 기본적으로 한대는 와이드 앵글이고, 하나는 클로즈업으로 찍었다.
-스케일이 큰 장면이 많다. 홍콩영화는 촬영기간이 짧기로 유명한데, 이번 경우는 오래 걸리지 않았나.
=이 영화도 촬영기간은 짧았다. 아니, 그동안 내가 찍은 영화 중 가장 짧게 걸렸다. 준비를 많이 하면 촬영기간이 줄어든다. 예산과 배우의 스케줄 때문이기도 했지만 과거 회상장면을 지난해 1월 베이징에서 2주 동안 찍었는데 문제가 생겨 상하이 촬영은 4월24일에야 시작했다. 그것도 6월5일 끝났으니 전체적으로는 8주 만에 끝난 셈이다. 거의 매일 촬영을 했고, 어떤 날은 24시간 동안 꼬박 찍기도 했다.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영화를 만드는 도중 이야기를 바꾸기 때문에 항상 여유가 필요하다.
-그렇게 빠듯한 일정 속에서 이야기를 바꾸기까지 하나.
=촬영을 하다보면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에서 많은 영감을 얻게 된다. 그러면 스토리를 바꿀 수밖에 없다. 눈이 오는데 지엔 역할의 금성무가 우는 장면이 있다. 우리는 그가 울 줄 몰랐다. 그런데 그 장면이 워낙 강한 느낌을 줬고, 그로 인해 금성무가 손나 역의 주신에게 녹음기 속 음성을 들려주는 장면을 새로 만들어야 했다. 이건 시나리오에는 없었던 장면이다. 난 항상 그런 식이다. 그렇게 생각하기 위해 하루를 쉬면 그걸 메우기 위해 24시간 촬영을 하는 것이다. (웃음)
-촬영감독이 두명이다.
=스케줄 문제 때문에 불가피했다. 애초에는 크리스토퍼 도일이 영화 전체를 찍을 예정이었다. 베이징 촬영에서는 그가 카메라를 잡았지만, 상하이 촬영 일정이 계속 늦춰지면서 그는 미리 약속된 다음 영화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피터 파우를 기용해야만 했다. 그가 다른 촬영감독 자리를 대신 메운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만큼 그는 거물급이다. 그럼에도 그가 참여한 것은 뮤지컬 장면 때문이었다. 그는 평소 뮤지컬을 하고 싶어했다고 한다.
-발리우드의 거물 안무가 파라 칸과의 작업은 어땠나.
=그녀는 정말로 훌륭하다. 굉장히 쾌활하고, 성격 좋고, 고집도 부리지 않는다. 만약 그가 자신을 내세웠다면 촬영은 어려웠을 것이다. 이 영화에 참여하는 모든 스탭들이 거물이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그녀는 엄마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가장 훌륭한 점은 영화를 너무 잘 이해한다는 점이다. 힘든 스케줄임에도 일을 끝내고 방에 들어가면 그녀는 꼭 DVD를 봤다.
-베이징에서 찍은 금성무와 주신의 과거 장면은 하나같이 겨울이 배경이다.
=나는 베이징을 생각하면 겨울이 떠오른다. 게다가 극중에서 금성무는 더운 홍콩에서 온 유학생이다. 베이징의 여름은 홍콩의 여름과 그리 다르지 않으니 당연히 그에게 베이징의 느낌은 한겨울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두 사람의 만남이 왜 겨울에만 이뤄졌냐고 묻는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금성무는 모든 일이 겨울에 일어났다고 기억할 것이다. 그 관계는 고통과 추위로만 기억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이징의 겨울은 유독 모노톤이다. 그것은 과거 장면과 나머지 장면을 시각적으로 구분하게 해준다.
-영화의 시작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눈이 줄곧 등장한다.
=나는 눈을 좋아하는데 아마 눈을 접하지 못해서일 것이다. 사실, 나는 이미 여러 편의 영화에서 눈을 등장시켰다. 심지어 배경이 홍콩인데도 판타지로 눈이 오게 했다. 내 생각에 그건 눈에 대한 개인적인 강박관념 때문인 것 같다. 눈은 한편으로 이 영화의 톤을 만들어준다. 물론 어떤 관객은 내가 이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겨울날 슬픈 느낌의 화면을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캐스팅은 어떻게 이뤄졌나.
=이 영화를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만난 건 장학우였다. 2년 전 나는 장학우에게 천사인 몬티 역을 제안했다. 남자배우 지엔 역을 하기엔 나이가 너무 들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는 뮤지컬이라면 어떤 역할이든 상관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시나리오를 끝낼 무렵 지엔 역할로 금성무가 적절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너무 젊지도 너무 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사랑에 대해 순진한 생각을 가질 법한 배우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너무 젊은 배우를 기용하면 ‘아직 어리니까 저러겠지’라고 생각할 것이고, 늙은 배우가 연기한다면… (웃음) 설득력이 떨어졌을 것이다.
-장학우를 영화감독인 니웨 역할로 옮긴 이유는 무엇인가.
=니웨 역을 맡겠다는 배우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남자배우들이 거절했다. 하지만 아무도 금성무의 반대편에 선 역할을 하려 하지 않았다. (웃음) 큰 성공을 거둔 <연인>이 있었다 해도, 니웨는 매우 재밌는 캐릭터였기에 모두 거절했다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했다. 그러던 중 어떤 역할이든 하겠다고 했던 장학우가 떠올랐고, 그를 니웨 역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장학우의 빈자리에 지진희를 기용했다.
=애초 몬티 역에는 유덕화를 기용하려 했지만 스케줄과 계약 문제가 생겼다. 결국 촬영을 몇주 앞두고 지진희를 생각해냈다. 지진희를 기용하기로 한 것은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 그는 이 영화에 진실함을 불어넣었다. 유덕화였다면 좀더 뮤지컬의 사회자 느낌이 났을 것이고, 영화는 좀더 뮤지컬처럼 보여 즐거워질지언정 덜 진실해졌을 것이다.
-지진희를 캐스팅한 데는 아무래도 홍콩에서 인기를 끈 <대장금>의 후광이 있지 않았을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난 <대장금>은 못 봤고, 친구인 오정완(영화사 봄 대표)이 만든 <H>는 봤다. 지진희를 직접 본 것은 홍콩에서, 그것도 먼발치에서였다. 상하이에서 영화를 준비하다가 홍콩에 잠시 들러 길을 걷는데 수많은 여성들이 누군가를 둘러싸고 있었다. 배용준이 일본에 간 것처럼 말이다. (웃음) “도대체 저게 누구야?”라고 물었고 사람들이 지진희라고 했다. 상하이로 돌아오니 유덕화가 출연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누구로 대체할까 고민하다가 홍콩에서는 대체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몬티 역은 스타 카리스마가 있는 배우가 맡아야 했다. 영화의 초반 10분을 혼자 끌어가기 때문이다. 유덕화 같은 빅스타를 기용할 수 없다면 기왕이면 스타급이면서도 홍콩 관객에게 덜 친숙한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진희는 완벽했다. 그는 굉장한 스타급이면서도 순수한 모습이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천사 아닌가.
-주신의 경우는 어떤가.
=주신은 내가 좋아하는 중국 여배우 중 하나다. 아주 좋게 본 <수쥬>에서 그녀는 어린 장만옥처럼 보인다. 그녀의 장점은 매우 현대적이라는 점이다. 중국 여배우가 현대적으로 보이기는 좀처럼 쉽지 않다. 장쯔이, 공리 같은 배우는 사극에는 어울리나 현대물에선 어색하다. 그러나 주신은 런던이건 파리건 어느 곳에 갖다놓아도 어색하지 않다. 그리고 주신과 이야기해보면 다른 중국 여배우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80∼90년대 급격한 경제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중국 여배우, 아니 중국 여성 모두가 손나 같은 존재가 됐다. 모두가 성공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한다. 주신은 그들과 달리 그렇게까지 성공을 열망하지 않는다.
-주신 때문에 영화 내용이 바뀌었다고 들었다.
=애초의 시나리오에서는 손나가 지웬을 이렇게까지 사랑하지 않았다. 이 영화는 <첨밀밀>과 달리 ‘쌍방향의 러브스토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주신을 더 차갑게 보이도록 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주신이 금성무와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버스로 달려가는 장면이 그랬다. 내 생각에 가장 매력적인 여성은 돌아보지 않고 등을 보여주며 걸어가는 여성이다. 신비롭고 매력적이지 않나. 그런데 주신은 그것을 원치 않았다. 나는 “절대 돌아보지 말고 그냥 가라”고 지시했지만, 주신은 버스를 향해 달려가면서 자꾸 금성무를 돌아다봤다. (웃음) 게다가 그녀는 약간 취한 상태였다. 이 장면을 찍기 직전에 금성무의 친구인 조감독 일행과 술을 마시는 모습을 찍었기 때문이다. 취한 그녀는 “그를 좀더 오래 돌아보면 안되나요”라고 말했고, 나는 결국 “알았어,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웃음) 내가 보여주려 했던 손나 캐릭터와는 많이 달랐지만 관객이 스토리에 빠져드는 데는 도움을 줬을 것이다.
-한국 관객이 당신의 영화에서 기대하는 것은 <첨밀밀> 같은 러브스토리였을 텐데, 이 영화에서 보이는 사랑은 냉정하고 현실적이지만 덜 로맨틱하다.
=아니다. <퍼햅스 러브>야말로 ‘진짜 <첨밀밀>’이다. 나 또한 사람들이 <첨밀밀>을 사랑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첨밀밀>은 어떻게 보면 설탕으로 포장된 영화다. 내 생각에 <퍼햅스 러브>는 설탕 코팅을 벗긴, <첨밀밀>의 노골적인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재밌는 점은 사람들이 내가 그동안 로맨틱한 영화를 만들어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당신의 영화가 로맨틱하지 않다는 말인가.
=물론 내 영화는 로맨틱한 부분을 갖고 있다. 나는 자잘한 이야기를 들춰내서 로맨틱한 감성을 만들고 사람들 가슴에 다가간다. 하지만 주제라는 측면으로 볼 때 내 영화는 로맨틱하지 않다. <타이타닉>은 로맨틱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죽는다는 건 로맨틱하다. <로미오 줄리엣>도 그렇고, 내가 만든 <쓰리>의 에피소드 <고잉 홈>도 로맨틱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내 영화에는 장애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배가 가라앉고, 두 가문이 싸운다는 것은 모두 장애물이다. 하지만 현대의 사랑에는 장애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사랑한다면 그저 사랑하면 된다. 누군가 가로막지 않는다. 아무도 가로막지 않기 때문에 이제 사람들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과연 그녀를 사랑하는 걸까’ 또는 ‘어쩌면 나는 더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이 사랑을 미뤄야 할까’ 아니면 ‘이 세상에 사랑보다 더 소중한 게 있지 않을까’ 등등. 내 생각에 이게 현대적인 러브스토리다. <첨밀밀>을 만들던 도중 장만옥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떠날 때는 다른 이유가 없는 거다. 유일한 이유는 한 사람이 상대방을 더이상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그건 정말 맞는 얘기다. 그동안 내가 만들었던 러브스토리들은 하나같이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은 로맨틱하지 않은 주제다.
-혹시 사랑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 바뀐 것은 아닌가.
=사랑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나이가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젊었을 때는 내 주장이 적었지만, 지금은 영화 속에 내 주장을 좀더 많이 넣게 된다. 이 영화에서 장학우와 주신의 관계를 좀더 강조한 데서도 알 수 있다. 두 사람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로맨틱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관계인 부부와 같다. 내 생각에 영화 후반부의 칭다오와 칭하이에 대한 이야기는 굉장히 로맨틱하다. 겉으로는 두 사람의 기억이 다른 것으로 드러나지만, 여기에 숨겨진 것은 두 사람이 같은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혼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한 사람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된다. 로버트 미첨과 셜리 매클레인이 출연한 <두 사람을 위한 시소>가 기억난다. 이 영화는 한 젊은 여성을 만난 뒤 아내로부터 도망치려고 했다가 다시 아내 곁으로 돌아가는 남자의 이야기다. 아내에게 돌아가기로 결심한 날 그는 젊은 여자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몇년 전 칵테일 파티에 갔는데, 친구들에게 내가 꿨던 굉장히 재밌는 악몽에 관해 얘기해줬어. 그런데 그날 밤 아내가 뭐랬는지 알아? ‘그건 당신 꿈이 아니라 내 꿈이에요’라고 하더군.” 내 생각에 그게 결혼이다. 결혼은 열정적인 사랑이 아니다. <퍼햅스 러브>에서 장학우와 주신은 사랑을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일종의 거래다. 여배우는 몸을, 감독은 배역을 줬다. 하지만 두 사람은 수년을 함께 지냈고, 그의 꿈은 그녀의 꿈이, 그녀의 꿈은 그의 꿈이 됐다. 그건 다른 종류의 사랑이다. 그런 면에서라면 내가 변했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지난번 만났을 때 “생존을 위해서라도 중국시장에서 톱5 안에 들어야 한다”고 했다. 화려하고 스케일 큰 영화를 만든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그럼 이제 작고 소박한 영화는 만나기 힘든 건가.
=내 생각에는 <퍼햅스 러브>가 <첨밀밀>보다 작은 영화다. 데뷔작인 <쌍성고사>부터 <금지옥엽> <첨밀밀>처럼 같은 핏줄의 영화를 만들어왔지만, 이 영화는 가장 구체적이고 사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나에게 <퍼햅스 러브>는 가장 큰 예산을 들인 영화지만, 동시에 가장 작은 영화인 것이다. 그래서 다음에는 규모와 무관하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영화를 해보고 싶은 거다.
-차기작을 설명해달라.
=<자마>(刺馬)라는 제목이다. 120년쯤 청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물이다. 세명의 의형제가 경쟁하면서 원수가 되고 전쟁을 벌인다는 이야기다. 사람들은 ‘이제 너도 대형 액션물을 만드는구나’라고 말하겠지만, 나는 이 영화를 통해 우정, 충성심, 속임수, 배신, 사랑, 도덕성 등을 다룰 예정이다. 그래서 대형 액션장면보다는 클로즈업 위주의 화면으로 만들려고 한다. 아무래도 처음 시도하는 분야이다 보니 많이 긴장하고 있다. 하지만 내면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 또한 겉보기엔 큰 영화지만 깊이 들어가면 작은 영화일지도 모른다.
-이번 영화 또한 범아시아영화가 될까.
=아마도. 아시아 국가들은 한 나라만으로는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각자의 자원을 모아서 영화를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 앞으로도 범아시아영화가 크게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당분간은 전체 아시아 시장의 10% 정도를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각 나라에 다른 나라의 재능있는 감독과 배우와 스탭을 소개한다는 의미가 가장 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