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투어 전 과정의 영화화 결정
꽤 “무모한 도전” 같던 유럽 투어 계획은 뜻밖에 윤도현밴드 음악 다큐멘터리 프로젝트의 도화선이 됐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나쁜 교육> 등 독립영화 및 예술영화 수입사로 알찬 이력을 쌓아온 스폰지의 조은운 대표는 평소 친분이 있던 ‘뜨거운 감자’의 김C를 통해 윤도현밴드의 유럽 투어 소식을 듣고 이를 다큐멘터리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구상을 하게 됐다고. 델리 스파이스의 데뷔 음반 녹음 과정을 담은 비디오 다큐멘터리 <팝!>, 한국 포크록의 선구자였던 한대수의 음악과 삶을 현재에서 되짚어가는 <다큐멘터리 한대수>라는 선례가 있긴 하나 국내에서는 여전히 생소한 음악 다큐멘터리 제작은 계속 염두에 두고 있던 터였다. 극장에 개봉됐던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과 스폰지에서 수입, DVD로 출시한 <더 블루스> 연작에 대한 반응이 괜찮았기에 음악 다큐멘터리가 국내시장에서 전혀 가능성 없는 장르는 아니라는 판단도 있었고,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면 “마니아만 열광하는 밴드도 아니고, 특별한 안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들 좋아하는” 윤도현밴드만큼 적절한 밴드도 드물다는 생각이었다. 어떤 형태로든 투어의 기록은 남길 계획이었던 윤도현밴드와 기획사 다음기획에서도 유럽 투어의 영화화를 반기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다큐멘터리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된 것은 2005년 2월. 3월 말로 예정된 투어 일정을 감안하면 사전 준비기간이 턱없이 모자랐지만,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서 민규동 감독과 함께 탄탄하고 세심한 연출을 보여줬던 김태용 감독의 합류는 든든한 힘이 됐다. 김태용 감독은 오스트레일리아 유학 시절부터 사운드에 관심이 많기도 했고, 연출자와 밴드 멤버들의 연령대가 비슷해야 서로 편하게 속을 털어 놓을 수 있으리란 점에서도 적임자라 생각됐다는 게 조 대표의 말이다. 고교 시절부터 비틀스, 레드 제플린 등 음악을 즐겨 들었다는 것, 뿐만 아니라 90년대 초반에는 이화여대 후문의 클럽 빵의 무대에 서곤 했던 밴드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다는 것은 촬영이 시작된 이후에 드러난 감독의 전사. 김태용 감독은 “좌절한 로커죠, 뭐”라며 쑥스럽게 웃어넘겼지만, “기타 들어 보고 놀랐다니까요. 중학교 때 실력에서 그친 거래요, 나보다 더 잘 치는 것 같던데”라는 게 윤도현의 증언(?)이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간 두 번째의 시작
<온 더 로드, 투>는 강팍한 현실에서 록밴드의 꿈을 키우는 청춘들을 다룬 김홍준 감독의 <정글스토리>(1996), 지난해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소개된 겐 마사유키 감독의 아시아 록 음악에 대한 다큐멘터리 <샤우트 오브 아시아>에 이어 윤도현밴드가 출연하는 세 번째 영화. “다큐멘터리니까 우리가 크게 뭘 해야 한다는, 연기를 해야 한다는 부담은 없었다”는 밴드 멤버들과 달리, 준비기간도 제작기간도 짧았던 만큼 김태용 감독이 느끼는 부담은 적지 않았다. 한달 남짓 4개국 7개 도시를 도는 빠듯한 일정에, 고정 스탭은 겨우 5명. 전체 투어 중에서 비중이나 규모가 가장 커 특별히 현지스탭 15명을 섭외했던 런던 코코에서의 공연을 제외하면, 감독을 필두로 두 사람의 촬영감독과 제작실장까지 스탭 4명이 모두 카메라를 들고 찍어도 잠잘 시간은커녕 그날그날의 촬영분을 확인할 시간도 모자란 스케줄이었다. 강행군도 강행군이었지만, 촬영 초반 김태용 감독은 무엇을 담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만만치 않은 눈치였다. 음악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황홀한 스펙터클은 물론 피사체인 밴드와 음악 그 자체겠으나, 투어 실황 중계에 그칠 게 아닌 이상 어떤 이야기를 끌어낼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 “감독님이, 사람들이 의외로 참 밋밋하네요, 그러시더라고요. 공연도 안 되고 그러면 화라도 내야 하는데 화도 안 내고, 우린 괜찮아요, 그러고 있으니….” 윤도현씨가 웃으며 한 말에서 드러나듯, 워낙 건실한 ‘바른생활’ 밴드이고 보니 록밴드 관련 영화라면 으레 등장하게 마련인 “술, 여자, 마약”과 같은 일탈의 이벤트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형편이었다.
해답의 실마리는, 숙박비를 아끼고자 파란색 대형 투어버스 2층의 14칸짜리 침대를 나눠 쓰고,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하면서 두 밴드와 촬영팀이 동고동락했던 길 위에 있었다. “찍다보니 두 밴드의 관계에 흥미가 생겼죠. 윤도현밴드는 스테랑코를 부러워하나 동경하진 않고, 스테랑코는 윤도현밴드를 딱히 부러워하는 건 아닌데 동경하더라고요.” 윤도현밴드는 밴드 초기에 발산할 수 있는 스테랑코의 에너지와 펑크에 가까운 그들 음악의 거친 생기를 부러워하고, 스테랑코는 연주의 기교와 다양한 질감의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윤도현밴드의 능란함을 동경하더라는 게 감독의 말이다. 알아주는 이가 몇이든 온몸을 던져 자신들의 오프닝 무대를 끝내고 이어지는 윤도현밴드 공연을 유심히 지켜보는 스테랑코와 스테랑코의 모습에서 하나의 밴드로 호흡을 맞춰가던 시작의 즐거움과 에너지를 돌이켜보는 윤도현밴드. 굳이 제목부터 ‘투’를 고집한 <온 더 로드, 투>는, 음악이라는 하나의 언어를 공유한 두 밴드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이자 10년의 시간을 건너온 윤도현 밴드의 두 번째 시작 혹은 두 번째 장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그 시작을 기념하듯, 윤도현밴드는 최근 이름을 YB로 바꿨다. 투어 도중 스테랑코의 보컬이 제안했다는 새 이름은 윤도현밴드의 영문 이니셜이자 ‘Why be?’라는 존재 또는 정체성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결국 우리는 살아가며 알게 되리라
맥주나 마시러 들렀을 동네 아저씨들이 관객으로 어울렸던 하이위컴비의 작은 클럽, 공연장은 훌륭했으나 데뷔 초창기 이후로는 겪은 적 없던 “유료관객 21명”의 썰렁함에 더욱 파이팅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베를린의 무대, “힘든 거 각오하고 왔는데, 진짜 힘드니까 고향 생각나더라고요. (중략) 우리가 건강히 있는 한, 힘껏 하겠습니다!”라는 다짐과 함께 성황리에 마무리했던 런던 공연. 유럽 투어의 다양한 라이브 현장과 꾸밈없는 무대 뒷모습이 음악 다큐멘터리에서 약속된 기본기의 재미를 선사한다면, YB와 스테랑코가 <Darkness on the Highway>를 함께 만들어가는 시퀀스는 두 밴드의 교감이라는 변수가 빚어낸 뜻밖의 화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ventually, eventually, we live and learn….” 투어버스 안에서 기타를 치면서, 가사를 의논하고 끼적이면서, 어둠이 내린 고속도로에서 느꼈던 단상을 하나의 즉흥곡으로 완성하는 순간에 이르면, 윤도현밴드가 길 위에서 찾은 것이 무엇인가를 알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자리에 서 있건 음악이라는 언어로 꿈꾸고 소통할 수 있으면 그만이라는 당연하고도 강력한 초심의 주문과 그 주문을 되새기게 해준 같은 길 위의 친구. 원없이 “맨땅에 헤딩”하고 돌아온 YB는 다시 음악이라는 여정을 즐겁게 이어갈 준비가 된 듯 보인다. <온 더 로드, 투>에서 엿볼 수 있을, 낯선 길 위에서 발견한 그들만의 보물 같은 기억과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