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세상과의 불화, 죽음과 함께 사라지다, <태풍>과 <청연>
2006-01-19
글 : 정성일 (영화평론가)
세상에 대한 타협 혹은 도피로서의 자살 보여주는 <태풍>과 <청연>
<태풍>
<청연>

두편의 영화를 보았다. 하나는 곽경택의 <태풍>이고, 다른 하나는 윤종찬의 <청연>이다. 두편 모두 큰 제작비를 들였고,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개봉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둘 사이에는 거의 공통점이 없다. 두편의 블록버스터. 두편의 비동시적 동시대성. 한편은 탈북자 가족의 생존자로서 자신을 받아주지 않은 남한을 향해 수십개의 핵 풍선을 날려보내겠다고 결심한 (씬이라 불리는) 최명식의 복수담이며, 다른 한편은 1933년 8월7일 오전 10시35분 일제강점하 식민지 조선시대에 여류비행사가 되어 돌아오는 고국방문비행을 (실패)한 박경원의 전기영화이다. 한명은 전적으로 허구의 인물이고, 다른 한편은 역사 속에 실존했던 인물이다(그러나 나는 박경원의 전기를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얼마나 각색되었는지는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이 두편의 영화가 사실상 일종의 남매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좀더 정확하게 최명식과 박경원이 남매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시대, 전혀 다른 모순, 전혀 다른 상황에 있으면서도 그들의 유일한 해결을 같은 방법으로 찾는다. 두 사람은 자살적 몸짓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자살이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들은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어떤 죄의식도 없다. 그러므로 그들의 자살적 몸짓은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 아니다. 아무도 그들에게 자살을 강요하지 않았고, 그들 자신은 그냥 포기하기만 하면 자살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포기를 하느니 차라리 자살을 택한다.

당신들은 그들의 자살 행위에 만족했습니까

말하자면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동일한 행위를 택한다. 그들은 결과를 알면서도 그러한 행위를 한다. 더 이상한 점. <태풍>과 <청연>에는 최명식과 박경원의 자살적 몸짓과 하나의 짝을 이루는 것처럼 동반자살의 몸짓을 이루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최명식을 막기 위해서 어머니에게 유서까지 보낸 다음 강세종은 그의 동료들과 태풍 속을 뚫고 바다 한복판에 떠 있는 배를 향해서 날아간다(사실 나는 강세종이 마지막에 살아남은 장면이 실제인지 환상인지 아직도 구별이 안 된다. 그는 태풍 속에서, 심지어 미군 잠수함의 어뢰까지 맞은 배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박경원을 사랑하는 한지혁은 고문까지 버티다가 그녀를 위해서 그냥 무죄를 포기하고 사형당한다. 그러므로 이 네 사람에게는 같은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당신들의 자살이라는 행위는 무엇을 만족시킵니까? 그러나 이 질문은 최명식과 박경원, 강세종과 한지혁에게 한 질문이 아니다. 혹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대답이 아니다. 그 질문은 지금, 여기 이 영화를 보러 온 관객의 자리에 불려온 당신에게 정말 만족하십니까, 라고 물어보는 것이다. 만일 만족스럽다면 왜 (자살에) 만족하십니까? 혹은 불만족스럽다면 (자살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무엇을 만족하지 못하셨습니까? 보기에 따라서 숭고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선택. 그리고 우리 시대의 만족에 대한 허기.

하지만 나는 만족에 대한 배고픔 때문에 일시적으로 이 자살적 몸짓이 주는 유혹에 넘어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살은 숭고한 행위가 아니라 무의미한 형식이다. 그것은 모든 행위의 무효를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행위가 만족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여기에 의지가 개입되기 때문이다. 단 한번의 의지, 반복할 수 없는 선택. 그러나 그 행위가 의지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그 행위를 의지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것이 의지의 형식을 빌려 나의 행위를 명령하는 그 무엇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래서 그 명령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자아의 질문이 아니라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초자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의 형식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것이 내 질문이다.

<태풍> - 세상을 없앨 수 없다면, 내가 죽는다

<태풍>

하지만 <태풍>과 <청연>은 둘 다 내 질문에 대한 잘못된 대답으로 보인다. 자살이라는 수수께끼와도 같은 행위는 셋 중 하나의 선택에 떠밀리는 것이다(여기서 방점은 떠밀린다, 에 있다). 그 하나는 세상을 없앨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죽는 것이다. 괴로운 대상이 세상 전체가 될 때, 세상이라는 구조가 될 때, 혹은 세상과 거의 같은 자리를 차지한 대상인데 그 대상을 없앨 수 없을 때 그 고통을 끝내기 위해서 차라리 나를 없애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여튼 고통이 끝난다. <태풍>은 이 첫 번째의 길을 택한다. 최명식은 영화가 시작하면 이미 자기를 괴롭힌 대상을 죽이는 데 사실상 성공한다. 그는 부산에서 자신의 가족이 남한에 입국하는 것을 거절한 구체적인 대상을 찾아내서 복수하고 성공적으로 그 자리에서 빠져나온다. 사실상 영화는 여기서 끝났어야 한다. 남은 일은 어린 시절 중국의 어느 기차역에서 헤어진 누이를 찾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그러나 최명식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복수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런 다음 그는 자기를 괴롭힌 고통의 구조 전체를 끝장내기 위해서 두 번째 복수를 준비한다. 이것은 이상한 복수이다. 왜냐하면 이 복수의 불가능성은 처음부터 예고된 것이기 때문이다. 복수의 대상을 그 대상(의 원인)이 속한 구조 전체에로 확장시킬 때 그 대상(의 원인)은 결국 분단이 되기 때문이다. 혹은 남한과 북한, 그리고 미국이 된다. 그런데 분단 그 자체에 복수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므로 최명식은 분단이라는 현실을 한반도의 절반인 남한으로 축소한 다음 그의 가족들이 결코 가지 못한 ‘꿈의 나라’ 남한에 핵 풍선을 날려보내 지옥으로 만들어주겠다고 결심한다. 원인이 괄호쳐진 채 대상만이 남을 때, 거기서 만족을 얻고 싶어할 때 이것은 도착적인 기쁨이다. 그 기쁨을 얻기 위하여 고통의 실재에 대해서 상징적인 방식으로 복수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최명식은 그 상징을 읽지 못한다. 혹은 상징을 실재라고 착각한다. 그러므로 슬프게도 그 복수가 성공했다 할지라도 그 성공은 하나의 메시지일 뿐이지 그것을 통해서 인과응보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최명식에게 그것은 자신의 경험적 고통을 형식적으로 갚는 것이며, 그 핵 풍선에 죽어가는 사람들은 전체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상징적 복수에 대해서 개인적 육체의 차원으로 갚는 실재적 재앙이기 때문에 그 둘 사이에는 비대칭의 사건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곧 포기하고 (혹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고) 누이를 죽인 다음 죽음을 받아들인다. 갑자기 여기에 공리주의적 차원의 해결이 제시된 것이다. 그때 자살적 몸짓은 갑자기 전체를 위한 희생이 된다. 그러므로 이 몸짓은 사실상 상징적 무효에 해당된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난처한 해석이 있다. 만일 이 영화 전체를 최명식이 아니라 강세종의 자리에서 보아야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니, 오히려 이 영화는 최명식이 아니라 강세종으로 영화를 볼 때 훨씬 일목요연해진다. 강세종은 부산에서 최명식을 놓친 다음 그를 붙잡기 위해 러시아를 거쳐 태풍이 몰아치는 바다 한복판까지 쫓아온다. 말하자면 강세종에게는 최명식에게 없는 일관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기승전결의 구조를 따른)다. 그는 대상을 바꿔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대신 대상을 포기하지 않는다. 심지어 유서까지 쓴 다음 이미 미군 잠수함에 의해 운명이 예정된 그 배까지 찾아간다. 강세종은 최명식보다 더 간절하게 죽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아니, 정말 그런지도 모른다. 그는 아버지와 같은 죽음을 반복하기를 자발적으로 열망한다. 이 두개의 자살적 몸짓. 하나는 아버지와 함께 죽지 못해서 괴롭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처럼 죽고 싶어서 즐겁다. 고통스러운 탈북의 자리, 즐거운 남한의 자리.

<청연> - 나의 무의미에 대한 도전적 도피

<청연>

다른 하나는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세상이 나를 덮어버릴 때, 그래서 그 세상에서 나라는 의미가 사라져버릴 때, 나의 간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나의 무의미에 대해서 세상의 죄의식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자살적 몸짓은 세상을 죄의식 안으로 몰아넣으려는 행위이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삶을 포기해야 할 때 나는 세상의 잘못을 일깨워줘야 할 필요를 간절하게 느끼는 것이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상상적 착각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그 죽음에 대해서 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이 자살적 몸짓이 마주치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되돌려 받는 전도된 형태의 만족감이다. 여기서는 죽음이 아니라 그 몸짓 자체가 메시지이다. <청연>은 이 두 번째의 선택이다. 그러나 그 몸짓이 죽음을 껴안지 않으면 웃음으로 끝난다. 그러므로 죽음은 목표가 아니라 할 수 없는 귀결이다. 그것이 첫 번째와 다른 이유는 하나가 세상에 대해 사디스트적인 자살이라면 다른 하나는 마조히스트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세상의 법에 대해서 자기를 상징적으로 부수는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세상과의 계약에 상상적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 <청연>에서) 박경원은 추호도 죽을 생각이 없다. 하지만 자신의 몸짓을 보여준 다음 죽음이 성공적인 탈출에 대한 유일한 행위라는 순간과 만날 수밖에 없다. 최명식에게 자살은 세상과의 타협이지만, 박경원에게 자살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이다. 내 생각에 <청연>의 유일하게 훌륭한 점은 마지막 박경원의 죽음의 순간을 찍은 롱숏이다. 윤종찬은 이 죽음을 영웅적으로 그리는 대신 멀리서 보잘것없는 초라한 죽음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것은 상상적 도피의 몸짓을 바라보는 실재의 시선이다.

물론 여기에는 두세 가지 복잡한 문제가 있다. 우선 박경원의 죽음은 ‘하여튼’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해석만이 개입할 수 있을 뿐 그 죽음을 영화가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하지만 여기서 해석이 죽음에 대한 인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차라리 여기서 해석은 이 실재의 자살을 상상의 자살로 만들기 위한 알리바이가 아닐까? <청연>의 마지막 장면은 용의주도하게 맨 앞의 장면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럼으로써 박경원의 어린 시절의 꿈이 궁극적으로 그 시대 속에서 그녀에게 이미 선험적으로 주어진 자살의 유혹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때 그 어린 시절, 비행기와의 첫 만남은 추억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양자선택의 환기처럼 보인다. 그리고 은밀하게 물어본다. 죽음이 아니라 삶을 선택할 수는 없었는가? 그때 박경원의 실제 삶은 그 전체가 마치 허구처럼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녀의 삶 전체를 재구성하는 영화적 효과들이 허구이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전체를 바꿀 만한 유일한 대상 한지혁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유일하게 영화를 위해서 만들어낸 인물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후배인 강세기와 이정희, 기베 마사코는 모두 실존했던 인물들이다). 두 번째 질문은 그에 연관된 것인데 <청연>의 등장인물들은 이상할 정도로 박경원을 돕기 위해서 애를 쓴다. 그들은 모두 박경원의 귀국비행을 돕기 위해 태어난 인물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 영화에는 오직 세상만이 악이다. 그런데 그 세상만이 사실상 실재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럴 때 박경원이 맞서는 것은 사실상 세상이라는 운명이다. 그러므로 박경원은 자신의 의지와 세상의 운명 사이에서 대결하는 것이다. 그런데 운명을 향해서 박경원의 의지는 자살적 몸짓으로 이끌린다. 그런 다음 영화는 양자 선택의 또 하나의 길이 있었다고 보여준다. 또 다른 가능성, 포기. 이 영화가 서둘러 끝나면서 마지막 장면에서 메아리처럼 들리는 목소리. 왜 이 길을 포기하려 들지 않았습니까? 지금 이 운명을 친일부역이라고 비판하고, 이 의지를 여성주의적으로 방어할 만하다고 말하는 것은 서로 절반만 보는 것이다. 이 자살적 몸짓에서 박경원이 단 한번도 온전한 주체로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자살적 행위의 주체는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는 알지만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비극적 운명의 책임을 세상에 떠넘기는 두 사람

최명식과 박경원에게 허락되지 않은 세 번째의 자살이 있다. 이것은 희생적인 선택이다. 이때 희생은 가장 엄격하게 다루어야 한다. 그것은 생명을 포기할 만큼의 희생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있을 수 있는 수많은 선택 중에서 이 자살적 몸짓은 내가 없어져야만 전체를 위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나를 포기해야만 한다. 말하자면 이 전체 안에서 오직 나만이 모순의 대상이 될 때 전체는 내게 희생을 요구한다. 그때 나는 사실상 자살에 떠밀리는 것이다. 물론 이것으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좀더 정확하게 이것은 해결을 숨기는 것이다. 이것은 희생양의 논리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자살이 더 남아 있다. 그것은 오로지 자신을 위한 죽음이다. 그리고 오직 이 죽음만이 윤리적인 죽음이다. 전체가 나를 떠미는데도 나는 그 전체의 요구를 거절하고 나의 판단에 따라 나를 포기하는 것이다. 진정한 영웅은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의 요구에 거절하는 것임을 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아무리 희생이 유혹을 해도 그 유혹을 마주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영웅적 죽음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안티고네의 죽음.

물론 최명식과 박경원은 유혹을 거절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두개의 자살적 몸짓이 아무리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할지라도 <태풍>과 <청연>은 비극이다. 그러나 최명식과 박경원은 시간과 장소를 잘못 선택했다. 벤야민은 두개의 비극이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그리스 비극(Tragodie)이고 다른 하나는 독일 비극(Tauerspiel)이다.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이 죽음을 통해 운명을 극복하고 벗어난다면 독일 비극은 주인공의 운명을 역사 앞에서 무기력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끝날 뿐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역사에 대한 해석이나 형이상학적 설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파국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개인의 비극적 운명의 책임을 역사에 떠넘기고 그 사이를 매개하려고 한다. 그때 알레고리는 타락한 상징이다. 최명식과 박경원은 그들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역사에 떠넘기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때 이 자살적 몸짓은 안쓰럽긴 하지만 개인과 역사 사이의 불연속성을 강제적으로 이어붙이려는 종말론적 알레고리이다. 그들이 생각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죽은 다음에도 세상은 계속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영웅적 비전을 지니고 있지만 결코 영웅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 사이를 매개했던 고리가 그들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살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왜 이루어지지 않는지를 그들이 모르는 것은 안된 일이다.

그러나 이 질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자살적 몸짓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 내내 계속되고 있다. 이준익의 <왕의 남자>의 마지막 장면은 ‘왕의 남자’였던 두 남자, 장생과 공길은 자살적 몸짓으로 줄을 탄다. 김성수의 <야수>에서 형사 장도영은 온갖 우여곡절 끝에 조폭 두목 유강진을 찾아간 다음 결국 자살적 몸짓으로 길거리에서 총격전을 벌인다. 겨울 내내 자살이 계속되고 있다. 얼마나 더 죽여야 당신들은 만족할 수 있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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