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왕의 남자> 성공요인 [1]
2006-01-25
글 : 문석

‘대박영화’의 성공요인을 분석하는 것은 언제나 결과론에 의지할 수밖에 없으며, 이를 따르다 보면 아주 사소한 일도 ‘하늘의 뜻’을 이룩하기 위한 정해진 수순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게 마련이다. 개봉 20일째인 1월17일 전국 관객 500만명(이하 배급사 집계)을 돌파한 <왕의 남자>의 흥행 원인을 따져묻는 온갖 매스컴의 기사 또한 이런 ‘결과론의 오류’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어지는 글 또한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위험을 무릅쓰면서 이 영화의 성공 이면을 들춰보려는 것은 남의 잔칫상에 수저를 올려놓거나 누군가를 영웅신화의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다. 그건 이 영화의 성공이 이전의 어떤 흥행영화와도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왕의 남자>가 써나가고 있는 흥행 신화의 뒤편으로 조심스레 들어가보자.

<왕의 남자>가 보여주는 흥행의 가속도는 아찔할 정도다. 개봉 20일 만에 전국 500만명을 극장 안으로 불러모았을 뿐 아니라, 그 기세는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벌써부터 세 번째 ‘1천만 관객 영화’의 탄생을 기대하는 목청이 높아지는 건 갈수록 관객 수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29일 전국 256개 스크린에서 개봉한 이 영화는 개봉일 하루에만 19만7천명을 동원하며 심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냈다. 관객이 몰리기 시작하자 극장들은 스크린을 조정하기 시작했고, 그 주말 스크린 수는 305개로 늘어났다. 주말 이틀 동안의 관객 수 60만명만 해도 놀라운 규모였다. 관객이 만들어낸 열기는 더욱 뜨거워졌고 스크린은 350개 선으로 늘어났다. 두 번째 주말 이틀 동안 관객은 70만명으로 증가했고, 개봉 3주차 주말인 1월14일과 15일에는 85만명을 동원했다. 스크린 수도 약간 늘고, 좌석 수가 많은 상영관으로 배정됐다고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증가폭인 것이다. 월요일인 지난 1월16일에도 19만7천명을 끌어모았다. <실미도>의 개봉 3주차 월요일 관객 수가 17만명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왕의 남자>의 기세는 <실미도>를 앞서고 있다. 또 24일 만에 500만명을 넘어섰던 <웰컴 투 동막골>이 최종성적 800만명을 기록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1천만이라는 수치도 터무니없게 보이지 않는다. 현재 배급사인 시네마서비스는 <왕의 남자>가 21일 600만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하며, 지금 추세대로라면 설 연휴를 거쳐 2월 초에 1000만 관객을 달성할 것을 내다보고 있다.

영화의 흥행은 다른 쪽으로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원작인 연극 <이>(爾)가 덩달아 매진에 가까운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이>의 원작자이자 연출자인 김태웅의 희곡집이 베스트셀러가 됐고, 영화 사운드트랙도 음반순위 5위 안에 진입했으며, 영화에 등장하는 안성 남사당 풍물놀이에 대한 관심 또한 급격히 높아지는 중이니 말이다.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 <말아톤>과 <웰컴 투 동막골>이 그랬듯, <왕의 남자> 또한 한편의 영화 차원을 뛰어넘어 사회적 신드롬으로 발전한 것이다. 똑 부러지는 특급 스타가 나오는 것도 아니요, 눈부신 컴퓨터그래픽이 스크린을 수놓는 것도 아니며, 눈 튀어나오게 하는 액션이나 블록버스터라는 대형 간판도 존재하지 않는데도 <왕의 남자>가 초강력 흥행 행진을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넌 공길, 난 장생, 엄마는 연산

“제가 놀란 것은 저희 어머니가 연산이 그림자 놀이하는 부분에서 우셨다는 겁니다… 연산과 선왕의 연극을 보여주고 연산의 얼굴이 보였을 때 눈물을 훔치셔서 좀 당황했어요.”(다음 카페 ‘왕의 남자’, ID 낙타)

충무로에서는 500만명 이상의 관객이 드는 영화를 ‘국민영화’라고 부른다. 500만이라는 숫자는 극장을 가장 많이 찾는 20대 초·중반과 그 주변 세대의 발걸음만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경지이기 때문이다. 결국 국민영화가 되기 위해서는 1년에 극장을 한두번 정도 찾는 중·장년층이 움직여야 한다는 얘기. CGV상암의 최명훈 슈퍼바이저는 “40대 이상의 관객이 개봉 2주차부터 주말을 중심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중·장년층으로 하여금 극장을 찾게 하는 이유는, 연산군의 이야기라는 점이 가장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왕조에서 가장 파격적이며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이었던 연산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고연령층에게도 친숙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왕의 남자>를 보고난 뒤의 반응이다. 잉크 묻힌 종이를 반절로 접었을 때 나타나는 문양을 보며 각자의 다른 생각을 파악하는 로르샤흐 테스트처럼, 이 영화는 연령대와 성별에 따라 아주 다르게 읽힌다. “대개 10대와 20대 초·중반은 공길을 중심으로 한 멜로드라마로, 20대 후반부터 30, 40대는 왕의 권력을 마음껏 희롱한 장생의 광대놀이로, 50대 이상은 연산이 중심이 된 왕정극으로 바라본다”고 제작사 이글픽쳐스의 정진완 대표는 설명한다. 성별에 따라서도 차이가 존재한다. 여성들은 이 영화를 멜로드라마로 바라보는 반면, 남성들은 정치풍자극으로 읽는 경향이 강하다. 지난해 12월16일 일반 관객을 상대로 한 시사회에서 이글픽쳐스가 조사한 설문 결과에 따르면, 여성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 캐릭터로 공길(62.6%)을 꼽은 데 비해 남성들은 장생(50%)을 지목했다. 더욱 신기한 점은 관객이 서로 다른 캐릭터와 다른 이야기 줄기를 따라 영화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공히 높은 만족도를 표시한다는 사실이다. 이준익 감독은 “시나리오 단계부터 장생, 연산, 공길, 녹수, 처선 등 다섯 인물로 세개의 삼각관계를 만들었고, 이러한 구조에서 이야기가 풀려나가게 했다”며 이같은 다층적 해석이 당연하다고 설명한다.

준기님 만나려다 영화에 반했네

“첫 관람 때는 준기씨의 매력에 푹 빠져서 난리도 아니었는데… 오늘 삼촌(정진영)의 연기를 보면서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중략) 여튼… 오늘 참 제대로 감상하고 왔답니다.”(다음 카페 ‘왕의 남자’, ID ⓢ지나)

사실, 중·장년층의 관람행렬만큼이나 진기한 것은 10대와 20대 여성 관객의 열광이다. 지난해 12월13일의 기자시사회장을 나오던 상당수 기자들은 “영화는 좋은데… 흥행은…”이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한국 영화계의 핵심 관객층인 20대 초·중반 여성들이 즐기기에는 다소 무겁고 정치적인 성격의 영화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배급사인 시네마서비스 배급팀의 김재민 과장 또한 “타깃 연령을 비교적 높게 잡았다. 영화 성격뿐 아니라 <나니아 연대기: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이 젊은 층에 호소할 것으로 봤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개봉 초반 이 영화의 10대 관객 비중은 25∼30%대에 달했고, 예매 관객 중 여성 비중은 65∼70%에 달했다. 당시 태풍의 눈은 공길 역을 맡은 이준기였다. “특히 무대인사가 있는 상영의 경우, 10대 관객이 90%에 육박했”(김재민 과장)을 정도로 이준기에 대한 열광은 두드러졌다. 영화사는 무대인사 때마다 이준기에게로 몰려나오는 관객 때문에 보디가드를 증원해야 했다. 그러나 이준기는 초반 관객몰이의 일등공신이었을지언정 <왕의 남자>의 전부는 아니었다. 이준기는 이들 관객과 <왕의 남자>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했다.

동성애 코드에 대한 한국사회의 수용폭이 확대됐다는 점도 <왕의 남자>의 성공 포인트다. 이 영화의 마케팅에 참여했던 영화사 아침의 김지나씨는 “개봉 전후로 ‘야오이’(꽃미남 게이를 소재로 한 소설, 만화 등을 즐기는 동인) 문화권의 여성들과 각종 동성애 매체가 이 영화와 이준기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고 전한다. 이 영화는 이러한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마케팅 전략 수립에 한축을 담당한 정승혜 영화사 아침 대표는 “개봉 즈음이면 한국사회에서도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열릴 것으로 봐 아예 동성애 코드를 드러내고 가자고 했다. ‘왕의 남자’라는 제목을 강한 반대 속에서도 밀어붙인 것이나 남자들 사이의 애정을 내놓고 알린 것도 그런 차원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연산과 공길의 입맞춤 장면을 뺐다가 다시 넣은 것도 편집본 모니터 시사에서 대학생들이 “오히려 동성애 요소가 약하다”라고 답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여기엔 <왕의 남자>가 동성애 표현을 아주 적나라하지는 않게 드러낸다는 전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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