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왕의 남자> 성공요인 [2]
2006-01-25
글 : 문석

이렇게 빠른 사극도 있다니

“시대극이라 하면 이런저런 것을 떠올리게 되는데, <왕의 남자>의 소재는 기존의 시대극의 틀을 깬다. 공길이 대표하는 코드도 그렇고, 왕이라는 캐릭터도 그렇고 굉장히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과거를 다루되 젊은이들이 볼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돋보였다.”(김미희 싸이더스FNH 공동대표)

충무로 대다수 관계자가 <왕의 남자>의 최종 스코어를 300만 정도로 예측했던 이유 중 하나는 사극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90년대 이후 과거 충무로와 단절을 선언하며 등장한 새로운 프로듀서와 감독들은 사극을 회피했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나 <혈의 누> 같은 성공작도 있었지만, ‘관객은 사극이 진부하다고 생각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TV에서는 <다모> <대장금> <해신> <불멸의 이순신> 같은 드라마가 사극에 대한 통념을 혁파해왔고, <왕의 남자>는 이같은 연장선상에서 별 거부감 없이 대중 곁을 파고들 수 있었다.

이같은 분위기 속에서 “인물별로 느릿하게 옮겨가 지루하게 느껴지는 사극의 단점을 극복한다는 것이 기획의 출발이었다”라고 정진완 대표는 설명한다. <스캔들…>이 900컷이었던 데 비해 <왕의 남자>는 1800컷이었다. 빠른 전개 속에 밀도를 높이기 위해 굉장히 많은 분량의 이야기를 집어넣었다. 때문에 <왕의 남자>는 지나치게 빠르게 느껴지기도 한다. 때문에 상당수 평론가들은 <왕의 남자>에 대해 ‘감정이 연결되지 않은 채로 이야기가 진행되다보니 예정된 결론을 향해 나아가는 작위적인 느낌을 준다’며 비판한다. 하지만, “이전의 감정에서 자연스레 현재의 감정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뒤에 등장할 감정이 현재의 감정을 끌어당기는 방식”(이준익 감독)의 이야기 전개는 결과적으로 “굉장히 호흡이 빠르고 거침이 없어 지루한 구석이 없다”(심재명 MK픽쳐스 사장)는 반응을 얻어냈다. 여기에 젊은 세대에게 낯선 광대놀이 등의 볼거리와 입체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연산의 캐릭터는 오히려 사극의 장점으로 드러났다. “이런 요소들이 충족되다보니 젊은이들은 이 영화에서 사극 요소를 새로운 스타일로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고 정승혜 대표는 분석한다.

나도 다음 세상에선 광대가 되련다

“모든 현대인은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장생은 광대 신분으로 감히 전복을 꿈꾼다. 왕 덕택에 세상의 꼭대기에 가서도 그 질서를 깨려 한다. 장생은 <매트릭스>의 네오다.”(이준익 감독)

<왕의 남자>의 성공은 순전히 영화의 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쉬리> 열풍이 IMF 이후의 애국심과 ‘한국적 블록버스터’라는 캐치프레이즈의 결합에서 영향받았고, <공동경비구역 JSA>가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남북회담, <실미도>가 실화를 둘러싼 논란에서 힘을 받았던 것과는 양상이 다르다. 시류를 읽는 타고난 감각을 갖고 있으며, <황산벌>을 만들 때만 해도 “대통령 선거에 맞춰 만들려 했다”고 했던 이준익 감독조차 이 영화에 대해선 “시류를 읽는 것으로부터 해방된 시선으로 임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흥행을 시대의 흐름과 연관해 해석하려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중 하나는 황우석 파동 이후 ‘믿을 놈 하나 없다’는, 주류사회에 대한 환멸감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광대 장생은 주류사회에 똥침을 놓는 인물이다. 그는 왕을 소재로 소극을 만들어 궁이라는 최고의 무대에 진입하고, 최후의 공연에서는 그의 후견인 노릇을 했던 왕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을 가한다. 이준익 감독의 말처럼, 장생이 시스템의 전복가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류 질서에 반기를 드는 아웃사이더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고 황우석 사태가 없었으면 <왕의 남자>가 실패했을까. 하긴, 왕은 노무현 대통령, 공길은 유시민 의원이며, 보건복지부 장관직이 종4품이라는 등의 농담이 나도는 것을 보면 <왕의 남자>가 품고 있는 시대 정신, 또는 풍자 정신은 시공간을 넘어 보편적인 것으로 보인다. 석명홍 씨네라인투 대표는 “연회장에서 술잔을 떨어뜨리는 윤주상은 우리네 국회의원을 떠올리게도 하고, 다른 권력 비리도 연상케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평민인 관객 입장에서는 장생을 통한 대리만족감을 갖고, 공길의 처지에서 소수자에 대한 연민을 품고, 육갑·칠득·팔복 트리오에게서 동질감에서 비롯되는 위안을 얻을 수 있을뿐더러, 최고 권력자인 왕의 유약한 면을 엿볼 수 있어 흡족하다. 크게는 국가, 작게는 학교나 회사 등으로 치환시킬 수 있는 인간관계의 소우주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주장은 분명 일리가 있어 보인다.

아직 5번밖에 못 봤지만, 이번 주말엔…

“처음엔 수박 겉핥기 식으로 대충 보고, 두 번째는 공길이의 외모를 보고, 세 번째엔 육갑이, 칠득이, 팔복이의 입담을 보고, 네 번째엔 연산군과 공길이의 묘한 관계를 보고, 다섯 번째엔 연산군의 슬픔을 보고, 여섯 번째에 와서야 장생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계속 연산에만 미쳐 있다가 비로소 장생이를 보게 되니 또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일곱 번째 <왕의 남자>를 보게 됐습니다. 그리고 오늘 여덟 번째 <왕의 남자>를 보는 내내 장생이만 봤습니다.”(네이버 ‘왕의 남자’ 카페, ID 공길처자(mcjopd))

<왕의 남자>의 바람은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다음의 ‘왕의 남자’ 카페는 영화가 한창 촬영 중이던 지난해 7월에 만들어졌다. 연극 <이>의 팬들과 영화 <왕의 남자>에 관심을 가진 이들, 이준기의 팬 등이 모여든 이 카페는 한때 200여명에 불과했지만, 현재는 회원 수가 2만4천여명에 달한다. 이들의 <왕의 남자>에 대한 충성심을 살펴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유게시판에 들어가면 수차례 영화를 봤다는 글이 대다수를 차지하는데, 이들의 관람 횟수는 적게는 2회에서 많게는 10여회에 이른다. 회원 50명을 대상으로 삼은 한 카페 회원의 조사에서는 1인당 평균 관람 횟수가 5.02회로 나왔다. 이들 글을 들여다보면, 반복관람 이유는 다양하지만, ‘영화가 너무 좋고, 너무 슬퍼서, 왠지 모르게 자꾸 보고 싶기 때문’이라는 내용이 다수를 이룬다. 이들은 서로에게 더 여러 차례 볼 것을 독려하고, 다른 영화에 밀리지 말도록 협력하자는 취지의 글을 올리고 있다. 다른 사이트의 사정도 비슷하다. 네이버의 경우, ‘네티즌 평점·40자평’에 오른 평점 개수가 18일 현재 2만여건에 이른다. 그동안 <웰컴 투 동막골>이 7천여건으로 가장 많은 평점 건수를 기록했으니 <왕의 남자>가 불러일으킨 ‘발언욕구’은 대단해 보인다. 영화사의 ‘아르바이트’라기보다는 가벼운 군중심리에 더욱 가까워 보이는 네티즌들의 지지세는, 아무튼 최소한 방학 동안만큼은 멈출 기세가 보이지 않는다.

영화의 힘만으로 여기까지…장하다!

이외에 <태풍>과 <킹콩>이 생각만큼 장사가 잘되지 않았다는 점도 <왕의 남자> 흥행에 영향을 끼쳤다. 두 작품이 큰 관객몰이를 할 것으로 봤던 배급사들이 1월 중순까지 작품을 많이 내걸지 않았던 것. <나니아 연대기…> <청연> <야수> 등 경쟁작이 상대적으로 부진했다는 점도 영향을 끼쳤다. 공격적이지만 나름의 격을 유지한 마케팅이나 ‘감님’, ‘삼촌’이란 별명을 얻으며 다시 인정받은 감우성과 정진영에 대한 솟구치는 지지율 또한 흥행바람에 일조했을 법하다.

하지만 확실한 점은 <왕의 남자>가 영화 자체의 힘으로 흥행몰이 중이라는 것과 수많은 관객이 반복해서 극장을 찾는다는 사실일 뿐, 이 모든 분석은 굉장한 흥행세라는 결과를 놓고 이것저것을 짜맞춰본 결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왕의 남자>의 성공은 얄팍한 기획이 승리를 거둔 것도, 운이 억수로 좋았던 것도 아니라는 심재명 사장의 이야기는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이준익 감독이나 제작사쪽에서 기획 당시부터 모든 변수를 정교하게 계산에 넣지는 않았을 것이다. 좀더 중요한 것은 기획이 아니라 이준익 감독이 이 영화를 어떤 식으로 표현하고자 했는지, 어떤 고민을 했는지다. 창작자의 숙성된 고민과 노련한 판단이야말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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