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 하나. 아시아영화에 관한 최근 소식을 확인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일까. <씨네21> 홈페이지에 접속하라, 고 말하고 싶지만 정답이 아니다. 영화진흥위원회에 알아보라는 조언은 꽤 그럴듯한데 특효를 발휘하진 못한다. 무엇이든 물어보면 답을 일러준다는 한 포털 사이트의 지식 검색, 무용지물이다. 알 만한 사람 다 알지만, 지름길은 부산국제영화제 홈페이지다. 뉴스를 놓치는 경우, 기자들은 ‘물먹었다’고 한다. 솔직히 아시아영화에 관한 뉴스 전달에 있어 <씨네21>은 여러 번 물먹었다. 부산국제영화제 홈페이지에 개설되어 있는 ‘핫 영화 소식’ 때문이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나 그렇다고 분노할 필요까진 없다. ‘핫 영화 소식’에는 현지언론보다 발빠른 짭짤한 정보들이 매일 오르기 때문이다. 얼마 전 대만 뉴웨이브의 산실이었던 중앙전영이 재정난으로 언론그룹인 중국 시보그룹에 매각됐다는 소식이 대표적이다. 아시아 영화계 현황에 관한 기사를 인터넷에서 한번 찾아보라. ‘핫 영화 소식’을 받아쓴 기사들에는 “김지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에 따르면” 혹은 “부산국제영화제 김지석 프로그래머가 전했다”라는 표현이 관용구처럼 박혀 있다. 이같은 인용은 <씨네21>을 매주 물먹이는 장본인이기도 한 ‘아시아영화 전문가’ 김지석에 대한 영화계 안팎의 공공연한 인정이기도 하다.
새해에도 아시아를 향한 그의 더듬이는 쉬지 않고 작동하고 있다. 모흐센 마흐말바프 가족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올해 베를린영화제에서 상영될 예정이라는 소식을 포함해 3건의 뜨거운 소식이 어느새 홈페이지에 떠 있다. 뉴스 입력 시간을 보니 1월3일 오전 12시39분. 1월2일은 시무식을 끝내고 저녁까지 마라톤 회의가 이어졌다고 하는데, 뜨끈한 소식이 식을까봐 귀가도 미루고 서두른 모양이다. 오죽했으면, 영화제 스탭들 사이에서 이런 말까지 돌까.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집에서 나오면 갈 곳이 두 군데뿐이다. 영화제 사무실 아니면 PC방.”
김지석은 못 말리는 워커홀릭이다. 2005년의 마지막 날, 부산 수영만의 영화제 사무실에서 만나 “휴일에 뵙자고 해서 죄송하다”고 했더니 “딱히 할 일도 없고. 또 틈나면 사무실에 나온다”며 “미안해할 필요없다”고 한다. 그러더니 “난방기가 고장났다”며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기자고 한다. 사무실을 빠져나오는데, 그의 옆구리엔 적어도 10종은 되어 보이는 신문 뭉치가 끼워져 있다. 그 많은 신문을 다 보느냐고 했더니만,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논조가 맘에 안 드는 신문 하나 빼곤” 전부 다 읽는다고 한다.
그가 신문기사를 빠짐없이 일독하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1년에 800여편의 영화를 본다”는 괴력의 소유자라는 소문만큼은 과장이 아닌 듯하다. 지난해 초, 방콕국제영화제에서 만난 그는 극장에서 빠짐없이 상영작을 챙겨보는 것은 물론이고 펜엑 라타나루앙과 지라 말리쿤의 신작 제작발표회에 참석해 현지 영화인들과 정보를 주고받기 바빴다. 위시트 사사나티앙의 인터뷰 때는 취재진보다 미리 약속장소에 모습을 드러낸 뒤, 끊임없이 ‘러브콜’을 보내기도 했다. 이동하는 동안에도 그는 타이 이외의 아시아 지역에서 어떤 영화들이 만들어지고 있는지 기자에게 끊임없이 일러주기도 했다.
상영작을 점찍기 위해 그가 매년 빼놓지 않고 다니는 아시아영화제만 7∼8곳. 이미 지난해 말, 도쿄필름엑스영화제와 NHK아시아영화제에 참석한 그는 새해에도 1월 말 이란의 파지르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2월 방콕국제영화제, 4월 홍콩과 싱가포르, 6월 상하이영화제와 대만 타이베이영화제까지, 강행군의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물론 칸과 같은 메이저 영화제도 참석해야 한다. 단, 그는 경쟁부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경쟁부문에서 볼 수 있는 아시아영화가 몇편이나 되나” 대신, 그는 아시아 각국에서 경쟁적으로 차린 영화마켓을 돌며, 상영작 감별을 해야 한다.
프로그래머로서 당연한 일 아니냐고? 1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끼니 걱정보다 신작 걱정을 하는 열성 프로그래머를 찾기란 쉽지 않다. 1998년, 부산필름프로모션(PPP) 출범을 앞두고 홍콩국제영화제를 찾았던 정태성 당시 수석운영위원도 그의 ‘굶주린 열정’에 혀를 내둘렀다. “샌드위치 들고 하루에 6, 7편씩 소화하는 걸 보면서 속으로 ‘이거 다 밥 먹고 살자고 하는 일 아닌가’ 그랬다. (웃음) 그 뒤로 교수 자리까지 내놓고 프로그래밍에 전념하는 걸 봤다. 영화라는 게, 영화제라는 게 단지 비즈니스가 아니구나 깨달았다.”(정태성)
유년시절부터 시작된 영화사랑
영화를 셈법으로 재단하지 않는 ‘준비된 프로그래머’라는 평가는 오랜 시네필 경력과 무관하지 않다. 유년 시절은 남포동 극장가에서 보냈고, 머리가 좀 굵은 다음에는 보수동 헌책방 골목을 뒤지며 일본 <스크린>을 사모았다. 부산대학교 재학 시절에는 8mm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쏘다니며 영화동아리 활동을 했지만, 그는 서른이 되기 직전까지도 ‘아마추어’였다. 1980년대 중반, 오석근 감독과 함께 시네클럽을 결성, 프랑스 문화원을 들락거리며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를 챙겨 보고, <한국영화전사> <영화예술론> 등을 읽기 시작했지만, 영화를 삶으로 택할 만큼의 용기는 아직 없었다.
기계과 대학원에 다니는 공대생이었던 그가 서른이 되기 직전, 영화과 대학원에 뒤늦게 진학했던 건 인연이 일러준 욕망 때문이었다. 1985년, 경성대에 연극영화과가 생기면서 부산에는 이용관, 전양준 등 젊은 교수들이 내려오게 된다. 이전까지 영화과 하나 없던 불모지. 서로 절박하면 통하는 모양이다. 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 부집행위원장은 “프랑스 문화원에 들렀다 기대하지 못했던 열혈 학도들을 만났다. 김지석, 오석근이었다. 나중에 경성대 학생들에게 물어보니 부산에선 꽤 유명한 영화광들이더라. 나로서도 그런 친구들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이때의 만남은 세미나로 이어졌고, 김지석은 이용관, 전양준의 권유에 따라 중앙대학교 영화과에 진학한다.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통학하던 그는 졸업 뒤 <영화언어> 등에 글을 기고하면서 시간강사 생활을 했다. 본인은 정작 말을 꺼내지 않지만, 이때부터 그는 영화제에 대한 꿈이 상당했다. 이용관은 “애든버러나 페사로 같은 예술영화 위주의 작은 영화제를 열고 싶어했다. 바닷가 포장마차에서 만나 도와달라고 하기에 술잔부터 내밀었는데, 못 마시는 술을 억지로 삼키고선 혼절할 정도였다. 이후 돈 댈 테니 영화제하자며 나선 자들에게 속아서 마음고생을 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고 덧붙인다.
“자비를 들여” 그가 해외영화제 순례에 나서기 시작한 것도 1990년대 초반이다. 오석근은 “슬슬 이상한 짓을 시작하더라. 게스트로 초청받은 것도 아닌데 갑자기 해외영화제에 가겠다고 하니. 자비 들이는 거야 남의 집에서 밥 한끼 못 얻어먹는 샌님 같은 성격이라 그렇다 치더라도…”라고 말한다. 시간강사 수당과 아르바이트로 번 돈만으로는 부족해 여기저기 급전까지 빌려 갑작스런 ‘외유’에 나선 데는 거창한 포부가 있지 않았을까. “비용 줄이려고 하루 한끼만 먹고 영화를 봤다”는 그는 “사람들마다 좋아하는 특정 음악 장르가 있지 않나. 그때는 나도 아시아영화에 정서적으로 이끌렸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불씨는 댕기면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른다. “다른 영화제는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 일본이 가깝기도 하고, 또 마침 알고 지내던 아오키 겐스케라는 친구가 그 영화제에서 자막 일을 하고 있어서였다.” 멋모르고 발 들였는데, 평생의 길이었다. 야마가타국제영화제에서 본 아시아영화에서 “서구 유럽영화들과 달리 어떤 하나의 경향으로 묶을 수 없는 다양한 매력을 맛봤다”는 그는 특히 이란 다큐멘터리에 끌렸다. ‘생소하고 강렬하고 진귀한’ 경험은 이듬해 홍콩영화제에서도 계속됐다. 우연히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3부작을 대한 그는 “그야말로 쇼크 상태였다”.
“대학원에 다닐 때만 하더라도 체계적인 고민을 할 환경이 못 됐다. 세계 영화사에 나오는 작품들을 왜 볼 수 없나 탄식만 했으니까. 그러다 해외영화제에서 말 그대로 신세계를 봤다. 이란, 필리핀의 영화들을 보면서 묘한 울림이 전해져왔다.” 전혀 접하지 못했던 이국적인 문화 충격이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김지석은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적 황홀경에 도취됐던 건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에게 중요한 건 일방적 매혹이 아니라 상호간의 자극이었다. “영화를 저렇게도 만들 수 있구나.” 그가 마주한 아시아영화들은 “제각각의 형식으로 제각각의 영화”를 그에게 보여줬다.
10년이 지나도 끼니 걱정 보다 신작 걱정
“전문가라는 딱지는 부산국제영화제가 붙여준 것이다. 내가 영화제를 만들었다기보다 영화제가 나를 키웠다.” 김지석은 부산국제영화제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그저 ‘마니아’로 남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전에 아시아영화에 관한 책 2권(<아시아영화의 이해> <홍콩영화의 이해>)을 냈지만 리플렛 수준이었다. 그때는 그런 책조차 없어서 알려진 것이고. 사실 10년 동안 해외영화제에 출장 보내주는데 전문가 소리 못 듣는 이가 누가 있겠나.” 그는 프로그래머가 “이 영화제는 꼭 가야 한다고 주장하면 갈 수 있도록” 배려해준 영화제 시스템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1996년, 김동호 집행위원장을 비롯해 박광수, 이용관, 전양준, 오석근 등과 함께 시작한 부산국제영화제. 천신만고 끝에 개막 축포를 쏘아올렸고, 18만여명의 관객을 끌어모았지만, “홍콩영화제 재탕 아니냐”는 비난도 감수해야 했다. “부정하진 않는다. 하지만 새로 만들어진 영화제가 무슨 힘이 있어 프리미어 상영을 추진할 수 있겠나 하는 원망도 들었다” 대신, 1, 2회 때 김지석이 가장 주력한 건 프로그래밍의 원칙이었다. “기준 같은 게 없었다. 감감무소식인 블랙홀도 있었고, 터무니없는 상영료를 요구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무리 틀고 싶은 영화라고 해도 무리라고 판단되면 다 잘랐다.”
‘아시아 작가들의 발굴’이라는 모토가 프로그래밍 원칙으로 적용된 건 1998년 3회 영화제부터다. 아시아 신예작가들을 지원하는 부산필름프로모션의 출범과 맞물리면서 “한해 베스트영화를 소개하는 차원에서 머물렀던” 부산국제영화제는 프리미어 상영을 늘려갔다. “프리미어를 내세웠더니 안 오겠다는 감독도 많았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메이저 영화제에 목매는 영화들을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누군가는 내 개인적인 취향이라고 폄하했지만, 그건 부산영화제 정체성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 하는 향후 운영 방향과도 관련이 있었다.”
베팅은 적절했고, 또 주효했다. 장밍, 자파르 파나히, 펜엑 라타나루앙, 프루트 챈, 지아장커, 리리 리자, 고레에다 히로카즈 등 부산과 인연을 맺은 감독이 어디 한둘이랴. 허우샤오시엔과 차이밍량,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모흐센 마흐말바프 같은 거장들로부터 이만한 지지와 신뢰를 받는 영화제가 또 있을까. 그러나 지난 10년 성공 가도를 달려온 영화제의 앞날에 대해 김지석은 기대보다 걱정이 많다. “지난해 월드 프리미어만 62편이었다. 역대 가장 많은 프리미어 상영이었지만, 눈에 띄는 신작이 없다는 비판도 나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