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샤의 무용과 음악을 재해석하다
<게이샤의 추억>의 시작 단계에 참여했던 많은 일본인 고문들은 중도에 일을 그만두기도 했다. 일본인 무용가 마나레 시즈미는 영화의 안무 고문(顧問)을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오디션을 보러 캘리포니아로 날아갔다. 아름다운 여름용 기모노를 입은 그는 감독과 안무가 앞에서 멋들어지게 부채춤을 췄다. 그러나 감독은 브로드웨이 스타일의 음악을 틀고는 더 빠르게 춤을 춰줄 것을 요구했다. “좀더 부채를 높이 던져볼 수 있나요?” 마나레의 대답은 단호했다. “우리 일본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영화를 관람한 그는 분노를 쏟아냈다. “아서 골든의 책은 게이샤의 의례와 디테일을 잘 묘사했다. 그러나 마셜은 30년대와 40년대의 게이샤 무용을 잘못 전달하고 있다. 이 영화의 게이샤는 교토의 게이샤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매우 불쾌한 일이다. 게이샤의 세계는 우리의 문화다. 8인치짜리 조리(일본식 샌들) 따위는 신지 않는다.” 안무가인 존 데루카(<시카고>)는 이것을 고집스러운 원칙주의자의 반감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사유리가 솔로로 춤을 추면서 느끼는 감정과 고통을 전달하기 위해 직접 8인치 높이의 조리를 골랐다. “그런 것이 바로 우리가 <게이샤의 추억>을 만든 방식이다. 우리에게는 장쯔이가 8인치 조리를 신고 춤을 출 때마다 박수를 쳤던 일본인 고문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최대한 그들의 문화에 헌사를 바치고 싶었던 우리의 의도를 말이다.” 그런 의도를 모두가 이해해주는 것은 아니다. 초기에 참여했던 음악가 요시자와 마사카즈는 마셜이 사용하려는 북부 일본 음악이 너무 거칠고 음의 변동이 심해 교토의 정서와는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셜은 대답했다. “이 영화의 배경은 교토가 아닙니다.” 놀라서 반문하는 요시자와에게 마셜은 말했다. “이 영화의 배경은 상상 속의 도시입니다.” 요시자와는 <게이샤의 추억>을 떠났다.
무국적 퓨전요리, 맛도 있을까?
요시자와 마사카즈에게 던진 마셜의 말, 상상 속의 도시. 그것이 바로 <게이샤의 추억>을 관통하는 하나의 코드일 것이다. 롭 마셜은 이 영화가 결코 사실주의 화풍의 그림이 아니라고 말한다. “<시카고>를 보라. 20년대의 시카고 여인들은 그런 스타일의 옷을 입거나 그런 식으로 춤을 추지는 않았다. <게이샤의 추억>은 게이샤 세계에 대한 인상주의 작가의 그림이다.” 오랫동안 국가와 인종적 경계를 넘어서 작업해온 영화인들은 마셜의 접근법을 중요한 방법론으로 여기는 편이다. 그 자신도 국적이 모호한 블록버스터를 만든 첸카이거의 아이러니한 분노와는 달리, 리안(<브로크백 마운틴> <와호장룡>)은 <게이샤의 추억>을 어떤 진화의 징조로 해석한다. “내가 <와호장룡>을 만드는 동안, 갑자기 세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인터넷과 국제영화제와 DVD로 인해서 세상은 다른 문화권의 영화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듯 보였다. 이전에는 서양에서 동양으로 통하는 하나의 통로밖에 없었다. 서구가 만들면 우리는 흡수했다. 이제 두 문화권은 훨씬 가까워졌고, 문화적인 이질성은 매일매일 지워지고 있다. 미국인 감독이 다국적 캐스팅으로 <게이샤의 추억>을 만든 사실은 문화적인 교류가 이미 세계적인 추세가 되었다는 신호다. 세상은 점점 좁아지고, 시장은 점점 커진다. 세계 관객을 만족시킬 필요가 있는 미국영화는 점점 덜 미국적이 되어간다. 미국 감독이 일본 감독만큼 일본인의 삶을 제대로 그릴 수 있겠냐고?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어쨌거나 사람들은 여전히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영화를 기다릴 텐데.”
<워싱턴 포스트>는 <게이샤의 추억>을 “캘리포니아 롤”에 비유하고 있다. “일본의 스시를 미국식으로 다시 만든 것이다. 맛만 좋다면야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일본의 전통주의자들은 잘못된 기모노의 매듭에 가슴을 치고, 서구와 아시아 관객은 오리엔탈리즘의 혐의를 가벼이 넘기지 않겠지만, <게이샤의 추억>은 국적없는 다국적 프로젝트의 미래로 통하는 미닫이문을 힘들게 열어놓았다. 이제 문제는 <워싱턴 포스트>의 반문처럼 ‘맛’에 달려 있다. 호사스러운 <게이샤의 추억>은 맛이 있는가? 물론 그 맛이 충분하건 충분치 않건 간에, 국적없는 요리사들은 또 다른 퓨전음식을 개발하고 있을 것이다.
할리우드의 인종 캐스팅
말론 브랜도가 일본인 역을 했다고?
<게이샤의 추억>이 50년 전에 만들어졌다면 배우들은 진짜 게이샤식 분칠이 필요했을 것이다. 게이샤에서부터 길거리의 엑스트라들까지 모조리 백인 배우들에게 돌아갔을 터이기 때문이다. 할리우드는 인종주의에 대한 정치적 올바름이 확립되기 전까지 백인 배우들을 타인종 역할로 기용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최초의 유성영화 <재즈 싱어>에서 알 존슨이 얼굴을 시커멓게 칠하고 나온 것은 주인공이 재즈 싱어로 분한 유대인이라는 점에서 면죄부를 받을 수 있겠다. 하지만 펄 벅의 원작을 영화화한 <대지>(The Good Earth, 1937)에서 주인공 왕룽과 오란을 연기하는 우크라이나 출신 폴 무니와 독일 출신 루이스 라이너는 현대 관객에게 묘한 이질감을 안겨준다. 또 다른 예로는 30, 40년대 인기 캐릭터였던 중국인 탐정 ‘찰리 챈’이다. 이 역할은 언제나 백인 배우가 연기했고, 심지어 1981년에 새롭게 제작된 <찰리 챈과 드래곤 퀸의 저주>에서조차 찰리 챈은 영국 배우 피터 우스티노프의 몫이었다.
가끔은 배우들의 타인종 연기를 ‘도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로 불렸던 알렉 기네스는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에서 터키의 압제에 저항하는 아랍 왕자로 분하고 <인도로 가는 길>(1984)에서는 인도인을 연기하는 서커스를 보여준다. 가장 유쾌한 사례는 <8월 달의 찻집>(The Teahouse of the August Moon, 1956)에서 주연을 맡은 말론 브랜도다. 그는 오키나와에 부임한 미군 장교와 마을 주민들을 연결하는 일본인 통역가 ‘사키니’ 역을 맡아 발군의 코미디 연기를 펼쳤다. 물론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괴이하고도 유명한 인종 캐스팅 사례는 <닥터 지바고>(1965)일 것이다. 데이비드 린은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출신 오마 샤리프에게 지바고 역할을 맡겼고, 오마 샤리프는 백러시아인으로 분장하기 위해 오랜 시간 특수분장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고 전해진다. ‘아랍인이 영어로 연기하는 러시아 의사’의 영화는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