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들어오시라니까요!” 보조출연자들을 채근하는 제작부 스탭들의 목소리가 높다. 어딘가에 ‘짱 박혀’ 담배 연기를 피워올리던 보조출연자들. 제작부 스탭들의 어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는지 백기들고 투항하는 포로들처럼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낸다. 복장은 제각각이다. 누구는 훈장을 달았고, 누구는 한복을 입었다. 모자를 쓴 여군도 있고, 스카프를 맨 학생도 있다. “이거 다 분리수거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1천명 넘는 이들이 점심식사 뒤 남긴 엄청난 음식 쓰레기 앞에서 밥차 스탭들은 절망하고 있다. 문득 예비군 훈련장의 풍경이 떠오른다.
1월7일 한국 소리문화의 전당. 1층에 들어서자마자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 있다. 둘러보니 공연장으로 들어서는 양편의 계단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만세’라는 현수막과 인공기까지 기다랗게 드리워져 있다. “아니, 훈장 하나가 어디 갔나.” 이름 모를 북쪽의 장성(將星)으로 출연하는 초로의 보조출연자는 패잔병처럼 남아 주렁주렁 매단 훈장 중 하나가 떨어져나갔다며 주변을 살핀다. 공연장 곳곳은 점심 해결을 위해 보조출연자들이 깔고 앉았던 비닐들로 어지럽다. 수북이 쌓인 보조출연자들의 짐 보따리를 보니 촬영 규모를 짐작할 법하다.
로동신문과 북한 가극 공연 스틸들로 가득한 벽면을 따라 객석 문을 여니 열기가 훅 하고 끼쳐온다. 다양한 북한 인민 복장을 한 보조출연자들이 뭉쳐 앉은 극장은 그야말로 소란의 현장이다. “착석, 착석!” 실제 기관원 복장을 한 보조연기자 조합의 우두머리들은 웅성이는 군중을 상대하느라 정신없다. 스탭들 또한 촬영 시작 전 <당의 참된 딸> 공연이 이뤄질 무대 위와 관객석을 번갈아 체크하면서 레디 고를 기다리고 있다. 1200명에 달하는 출연진에 100명이 다 되는 취재진과 관계자들까지 뒤늦게 가세하자 <국경의 남쪽>의 막바지 촬영 현장은 더욱 소란스러워진다.
연인을 두고 탈북한 한 청년의 이야기
“짜증내지 말고.” 안판석 감독이 마이크를 들더니 임보람 조감독을 비롯한 스탭들에게 조급해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스탭들 입장에선 극중 “4분이 다 되는” 분량을 오늘 안에 찍어야 하니 자신도 모르게 고성이 오갈지도 모른다. 5분도 안 되는 분량이 무슨 대수냐고. 물리적인 시간으로 보면 별것 아닌 듯하지만 만수대 예술악단의 일원인 선호(차승원)가 “충성을 맹세했던 조국과 사랑을 약속했던 여인”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탈북을 결행하기에 앞서 치르는 연주회다. 만만찮은 군중 장면인데다, ‘국경의 남쪽’으로 떠나기 직전의 상황이니만큼 스탭들이나 배우들로서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객석이 정리되는 동안 안 감독은 모니터를 지켜보더니 갑자기 오케스트라 지휘자쪽으로 다가간다. 지휘자 의자에 나붙은 빨간색 ‘평양대극장 공연악단’ 딱지가 너덜너덜해진 것을 만지작거리더니 “이거 새로 해야겠네”라고 한다. 무대 위를 굴러다니는 야광테이프도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서둘러 달려온 스탭에게 “이건 뭐에 쓰려고?” 하고 묻는다. 감독이라는 자리에 앉으면 눈이 세개로 늘어나기라도 하는 건가. 식사를 끝내고 난 뒤 “스탭들이 다 알아서 해주는데 내가 뭐 할 게 있냐. 그냥 구경하는 거지”라고 웃음을 보였던 안 감독. 알고 보니 자잘한 것 하나까지도 직접 챙긴다.
<국경의 남쪽>은 알려진 대로 <장미와 콩나물> <아줌마> 등의 드라마를 연출해 스타 PD로 불렸던 안판석 감독의 데뷔작이다. 평양에서 태어나 만수예술단에서 호른 주자로 살아온 선호는 남쪽의 할아버지와 비밀리에 교신해온 아버지의 행각이 들통나자 어쩔 수 없이 탈북하게 되고, 미래를 약속한 연화(조이진)와 헤어지게 된다. 남쪽으로 내려온 뒤 선호는 치킨배달, 웨이터 등 궂은일과 휴일에는 교회에 나가 간증까지 해서 얻은 교통비로 연화 가족의 탈북 자금을 마련하지만 이마저도 브로커에게 뺏긴다. 얼마 뒤 연화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호는 경주(심혜진)를 만나게 된다.
현장의 제 1원칙은 리얼리티
<국경의 남쪽> 현장의 제1원칙은 자나깨나 ‘리얼리티’다. 안 감독은 “선이 굵은 이야기면 디테일은 잘 안 보일 텐데, 미묘한 재미를 줘야 하는 선이 가는 영화라 리얼리티를 신경쓸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홍상수 감독은 현장에서 배우의 가방 안에도 신문지 뭉치를 넣는 게 아니라 인물의 상황에 걸맞은 소품을 채운다는 기사를 읽고서 “본받고 싶었다”는 안 감독은 “상황이 갖춰져야 배우들의 감정도 진짜처럼 나올 것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점 연기를 하는 1천여명의 보조출연자들의 가슴에 실제 북쪽 주민들처럼 김일성 배지가 모두 달려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국경의 남쪽>은 시나리오 작업 때부터 로케이션 등 북쪽의 협조를 바랐지만 물거품이 됐다. 중국과 몽골 등지를 돌며 적당한 촬영지를 물색했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평양 거리 재현이 가장 어려웠다”는 이석원 프로듀서는 “중국은 도심에서 촬영할 경우 구경꾼들을 통제하는 게 만만치 않아 보였고, 몽골은 촬영에 필요한 전력이나 장비 조달이 가능한지 의문이었다”면서 “이왕 새롭게 꾸며야 한다면 남쪽에서 진행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한다. 국회도서관, 북한연구소 등을 돌며 얻은 자료사진을 바탕으로 중국에서 비슷한 물품을 들여오는 데만 진땀을 흘렸다.
북쪽 생활에 대한 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 때문에 제작의 어려움은 더 컸다. 이석원 프로듀서는 “제2의 감독이 또 있다”면서 2층 객석에서 보조출연자들을 북돋고 있는 연출부 김철룡씨를 소개해준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김씨는 실제 새터민(탈북자)이기도 하다. 애초 제작진이 자문을 위해 만났다가 아예 스탭으로 불러들였다. “미술부나 의상팀이나 이 친구가 북에서는 그렇게 안 한다고 한마디 하면 새로 작업을 해야 할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가진 김씨에게 고증과 촬영일정 사이에서 갈등이 많았겠다고 물었더니, “그렇습니다.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웃는다.
안판석 감독 인터뷰
“관객도 마음속 국경을 허물었으면 한다”
“TV 드라마 할 때 매번 시간이 없다고 변명을 했는데….” 촬영현장에서 만난 안판석 감독은 영화 연출의 경우 시간 핑계를 댈 수 없어서 고민이라고 엄살부터 늘어놨다.
-선호와 연화가 북쪽에서 연애하면서 나누는 대사들이 신선하고 재밌다. 말끝마다 톡 쏘는 연화나 순진하고 어리숙한 선호의 캐릭터를 두드러지게 보여주기도 하고.
=북쪽의 시나리오나 희곡집을 보면서 먼저 감을 좀 잡았다. 북한식 대화를 전혀 모르니까. 북쪽에서 만든 드라마나 다큐멘터리도 많이 봤고. 심지어 통일전망대에 답사 가서 북쪽이 제작한 홍보 비디오까지 챙겨봤다. 북쪽의 결혼 생활에 대한 영상물이었는데. 거기서 보니까 여자들은 꽂는 스타일이더라. 그럴 때마다 남자들은 쩔쩔매고. 연화가 “이렇게 마주 섰는데 직사포를 쏘지 곡사포를 쏘겠어요”라고 선호에게 프러포즈를 하는 대사도 거기서 따온 거다.-메이킹 다큐멘터리를 보니 사전 모의라도 한 것처럼 차승원과 역할 분담이 잘되어 있더라. 체력적으로 약한 여배우들이 힘들어하면 차승원은 옆에서 상대 배우를 토닥여주고, 감독은 주저없이 한번 더 테이크 가자고 독하게 가고.
=승원이랑은 분업이 아주 잘된다. <국경의 남쪽>은 선호의 1인칭 시점 영화인데, 실제 현장에서도 승원이가 끌고 간다. 주인 의식도 상당하고, 그에 걸맞은 책임감도 있다.-반면, 차승원은 선호라는 인물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지 여전히 고민이 많더라.
=그동안 차승원이라는 배우가 맡은 역할은 특수한 인물이었다. 선이 분명한 거지. 그런데 이번엔 노멀한 인물이다. 공간으로 치면 이런 거다. 지금까지 해온 역할이 시청 앞 광장이라면 이번엔 동네 골목이다. 선호라는 인물은 이렇게 연기할 수도 있고, 저렇게 연기할 수도 있으니까 배우 입장에선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차승원이라는 사람과 선호는 가장 비슷하다. 그래서 캐스팅을 한 것이고.-분단을 소재로 한 영화를 찍으면서 깨달은 부분이 있나.
=나도 어릴 때 학교 다니면서 북쪽의 감시 체제에 대한 반공 교육을 많이 받고 자랐다. 왜 북쪽에선 부모 자식도 서로 감시를 한다고 배웠잖나. 나이를 먹으면서 이성적으로는 설마 그럴 리 있겠는가 했지만 정서적으로는 그렇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러던 것이 이번 영화를 준비하면서 조금씩 사라졌다. 내 마음속의 국경을 하나 넘은 거지. 관객도 이 영화를 통해 마음속 국경들을 허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