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적이 있는가.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 높이 올라가 눈 속에서 얼어죽는 그 표범이고 싶다.” 하나, 어찌하랴. 표범이 아닌 하이에나로, 그것도 그토록 되고 싶던 표범을 물어뜯으며 죽어야만 하는 이들의 그 완벽한 ‘개죽음’을.
<야수>는 ‘장르’를 넘어섬으로써 ‘장르’를 완수한다. 앞의 ‘장르’는 장르영화로서의 문법이요, 뒤의 ‘장르’는 순연한 누아르의 정신이다. 영화는 기대를 저버린다. 가령 마지막 쪽지는 수사를 개진하지 않으며, 유강진은 장 형사도 아닌 오 검사에게 ‘담가진다’. 그러나 이 결말을 ‘오버’로 규정하는 것은, 영화를 버디물로만 보았지 극한의 누아르임을 알아보지 못한 소치이며, 무정부주의의 정치성을 판독하지 못한 소치이다.
<공공의 적2>의 국가주의 반대편에 위치하다
장 형사와 오 검사, 뜨거운 정의(가족애)와 냉철한 법을 표상하는 그들의 결합이 필연적인 대실패로 끝나자, 그들은 ‘야수’가 되어 자신이 그토록 희구하던 가족애 넘치는 가장이자 공권력의 표상인 입법권자의 가슴에 총을 겨눈다. 이 어마어마한 아이러니에 법철학적 모순이 집약돼 있다. 이해를 위해 정반대의 정치성을 보이는 <공공의 적2>와 비교해보자.
<공공의 적2>는 노골적인 국가주의영화이다. 강철중 검사는 법의 집행자이자 법의 한계에 분통을 터뜨리는 정의의 사도이다. 법과 정의는 그의 인격 안에 결합돼 있으며,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와 검찰조직과의 마찰도 결정적인 순간엔 사라진다. 법의 테두리가 그의 정의를 감싸며 확대된다. 그는 ‘국가=법=정의’로서, ‘국부를 빼돌리려는 절대악’을 응징한다. 법은 약간의 시간차는 있을지언정 결국 정의를 실현할 수 있기에, 법을 엄정하게 집행할 강력한 국가기구가 요청되는데, 이것이 바로 파시즘적 욕망이다.
<야수>는 법과 정의를 구분할 뿐 아니라, 이들의 결합이 모순적임을 보여준다. 티격태격을 말함이 아니다. 장 형사의 사적 감정은 오 검사의 법적 엄정성에 치명상을 입히고, 오히려 그들을 법적으로 옭아맨다. 애초에 ‘잘못된 만남’이라는 뜻이다. 법은 정의와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때로 대립한다. 이는 나쁜 이들이 법을 악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형식적 공정함을 추구하는 법 자체의 성격 때문이다. <야수>가 그리는 국가공권력은 <공공의 적2>의 절대선도 아니고, <홀리데이>의 절대악도 아니다(<홀리데이>의 최민수는 공무원의 옷을 입은 ‘터미네이터’이다).
법과 원칙을 지키려 했던 오 검사는 법정에서 법을 모독하고, 유강진은 ‘합법적 민의에 의해’ 헌법기관이 된다. 또한 그의 가정만 화목하고, 그의 인격만 안정적이다. 사적으로 공적으로 그는 (파시즘의 권력처럼) ‘모범적이다’. 장 형사는 어머니의 죽음을 뒤로하고, 그렇게도 경멸하던 양아치의 모습이 되어 ‘가족애로 넘쳐나는’ 시민 유강진을 겨누고, 경찰 총에 벌집이 된다. 장 형사의 죽음은 ‘자신의 이상을 위해 죽는’ 순사(殉死)이거나, ‘자신의 이상을 향해 죽는’ 미학적 죽음이 아니다. 자신이 가장 열망하던 행복, 즉 ‘자신의 이상을 죽이는’ 진정한 자기-살해를 범한 것이다. 오 검사 역시 자아를 송두리째 버리고 장 형사와 같은 정념의 화신이 되어, 자신이 가장 경배하던 국가공권력, 곧 ‘자신의 이상을 죽임’으로써 완벽한 자기부정을 완수한다. 그들의 살인의지는 오롯이 그들 자신으로부터 왔으며,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아무도 원치 않은 행위이기에, 그들은 영웅이 아닌 ‘미친놈’이 된다. 모든 기대를 저버리는 완벽한 우상 파괴적 죽음이다. 자아, 가정, 국가라는 우상(혹은 이데올로기)을 자기 안에서 온전히 파괴했기에, ‘꽃도 십자가도’ 심지어 카타르시스도 없는 아나키즘적 자폭을 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