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영화를 ‘본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모든 것은 순수한 영상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촬영감독을 중심으로 영화를 보는 것이 힘든 것은 그 때문이다. 특정 영화를 설명할 때 어떤 배우가 나온다거나 어떤 감독이 연출한다는 사실이 정보로 주어지지 촬영감독의 이름은 웬만해선 언급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가 영화를 접할 때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인물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가장 먼저 잊혀진다. 그것은 비극이 아니라 그저 운명일 뿐이다. 모든 영화에서 촬영감독의 운명을 애도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약간의 주의를 기울여 영화 속에서 촬영감독의 숨결을 느끼는 것은 꽤나 색다른 경험이다. 한편의 영화에 대한 좀더 입체적인 이해는 그런 식으로도 가능하다. 촬영감독 야누스 카민스키는 <쉰들러 리스트> 이후 스티븐 스필버그의 모든 영화를 살펴볼 수 있는 강력한 키워드 중 하나다. 예술가와 장사꾼, 거장과 흥행사 사이에 존재하는 스필버그와 정확히 같은 배를 타야 했던 이 남자. 스필버그와 따로 또 같이, 그를 향한 몇 가지 오해를 통해 촬영감독 카민스키의 세계를 살펴본다. 카민스키의 영화를 보면서 감탄해온 충무로 촬영감독 6인의, 그에 대한 고백을 함께 싣는다.
1972년 뮌헨올림픽 선수촌에서 시작된 비극, 이를 ‘맞테러’로 대응하겠다는 이스라엘 정부의 명령을 받고 테러의 배후자 11명을 처단하기 위해 전 유럽을 휩쓰는 5인조, 그리고 꼬리를 무는 폭력의 악순환 속에서 마침내 돌이킬 수 없도록 황폐해진 주인공의 내면까지. 2월9일 개봉한 <뮌헨>은 3시간 가까운 러닝타임 내내 추락을 거듭한다. 70년대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넘나드는 화면은 더없이 극적이고 생생하지만, 그 정조는 어둡고 무겁고 거칠다. 특수효과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SF영화도 아닌지라, 관객이 ‘보게 되는’ 모든 것은 <쉰들러 리스트> 이래 10번째로 스티븐 스필버그와 호흡을 맞춘 촬영감독 야누스 카민스키가 책임진 결과물이라고 여겨도 무방하다. 문득 <E.T.>와 <죠스> <인디아나 존스>를 만들었던 스티븐 스필버그는 더이상 보이지 않음을 깨닫는다.
1990년 데뷔한 이래 3년간 B급영화와 TV영화를 찍었던 야누스 카민스키는 <쉰들러 리스트> 이후 스필버그의 모든 작품을 촬영했다. 그 뒤로 그가 스필버그 이외의 감독과 작업한 것은 단편을 포함해 다섯편 뿐이다(그중 네편의 장편은 스필버그가 가졌던 4년간의 연출 공백기 중에 이루어진 작업). 26년 전 영어로 음식을 주문할 줄도 모르는 상태로 고향 폴란드를 떠나 미국 땅을 밟았고, 이후 미영화연구소(AFI)에서 촬영을 공부했던 카민스키는 34살의 나이로 스필버그에게 발탁되어 20여년간 세계 최고의 이야기꾼에게 어울리는 최고의 눈으로 군림해왔다. 학교 극장에서 <아리조나 유괴사건>을 보며 홀리 헌터에게 열광했던 그는, <쉰들러 리스트>로 각종 영화시상식에 불려다니면서 안면을 익힌 홀리 헌터와 6년 동안 결혼생활을 유지하기도 했다. 완벽한 아메리칸 드림 혹은 신데렐라 스토리. 의심과 오해가 따르는 것도 당연하다. 사람들은 카민스키의 비주얼이 온전히 그의 것인지를 궁금해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감독과 맺은 우연한 인연을 부러워한다. 전설적인 촬영감독과 어깨를 겨루기엔 그 이름이 부족하다고도 한다. 카민스키는 <쉰들러 리스트>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아카데미 촬영상을 수상한 이래, 어떤 상도 손에 쥐어보지 못했다. 아카데미는 작품상과 감독상 등 5개 부문에 <뮌헨>을 후보로 올렸지만, 그의 촬영은 이번에도 평가받지 못했다.
카민스키를 만나기 전의 스필버그 영화에 대해, 화면이나 촬영을 칭찬하고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위시한 근래 스필버그의 많은 작품에서 선보인 특별한 현상이나 촬영은 예외없이 많은 이의 주의를 집중시킨다. 스필버그는 지금껏 35편의 극장용 장편영화를 찍었다. 그는 앨런 다비오(<E.T.> <칼라 퍼플> <태양의 제국>)를 제외하면 세편 이상의 영화에 동일한 촬영감독을 기용한 적이 없다. 자신의 영화처럼 인과관계가 명확한 백전노장의 판단은 앞으로도 당분간 변하지 않을 것이라 한다. 카민스키에게는 분명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카민스키는 스필버그 눈에 띈 ‘운 좋은’ 촬영감독?
스필버그는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촬영이 지체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쉰들러 리스트>는 75일,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12주 만에 촬영이 끝났다. 180개의 신을 147군데의 장소를 돌아다니며 찍은 <캐치 미 이프 유 캔>은 53일 동안 촬영했다. 카민스키를 포함하여 오랜 기간 함께 작업한 촬영부 스탭들은, 믿기 힘든 작업속도가 통통 튀는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톤을 만들었다며 농담을 던진다. 정해진 스토리보드를 따르는 법이 없고, 리허설도 없이 배우를 카메라 앞에 세우며, 언제나 270도 가까운 카메라 무빙을 요구하는 스필버그는, “이 테이크의 조명(혹은 카메라 움직임)은 별로”라고 말하는 스탭을 향해 “그건 당신이 기회를 놓친 거지. 나한테 이 테이크는 최고였고, 우린 이제 이동해야 해”라고 말한다. 매 순간 주어진 시간 안에 일관된 완성도를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러므로 “카메라가 움직이는 순간 모든 것이 망한다”며 세심한 조명을 불가능하도록 만드는 카메라 무빙을 극단적으로 싫어했던 유명 촬영감독의 말은, 카민스키에겐 의미가 없다. 그에게는 최대한 빨리, 수시로 변하는 카메라와 인물의 동선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명을 세팅하는 것이 당연한 임무다. 누군가 들으면 직무유기라 할 만한 말도 서슴지 않는다. “세 시간씩 조명하면서 90일 동안 찍는 영화는 금방 질려버릴 거다. 그보다는 최선을 다해 작업을 빨리 진행한 뒤 감독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주는 쪽을 택하겠다.” 요컨대 그는 이야기에 복무하는 화면만을 고민한다. 대세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면 섬세한 조명을 통한 완벽한 화면은 때때로 포기할 수 있다고 믿는 대신 영화 전체의 톤을 장악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기울인다. 이를 위해 촬영 전에는 충분한 테스트 기간을 갖는다. “시나리오의 모든 요소를 바탕으로 스토리를 이해한 뒤, 프리 프로덕션 단계의 후반기에는 카메라 테크닉을 통해 어떻게 스토리를 스타일로 만들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카민스키의 TV영화 <야생화>를 눈여겨본 스필버그는 <쉰들러 리스트>의 촬영감독을 정하기 전, 카민스키에게 TV영화 <클래스 61>을 촬영하게 해 일종의 테스트를 거쳤다고 알려져 있다. 아마도 시험의 통과 요건은 신속함이 아니었을까. 이를 위해선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가져갈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고, 그 기준은 영화가 전달하려는 이야기를 최우선에 놓을 때 명확해진다. 카민스키는 최초의 기회를 붙잡았고, 그것은 운으로 설명할 수 없는 능력이다.
카민스키는 첨단의 촬영장비와 기법만을 사용한다?
야누스 카민스키는 <쉰들러 리스트>을 촬영하기 전 로만 비쉬니악의 사진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1920년부터 30년대까지 동유럽 유대인의 정착촌에서 촬영된 그 사진들은, 인공조명 하나없이 흑백의 명암만으로 대상이 지닌 정신과 유머를 표현했다. 그것은 대상의 삶에 근접함으로써 얻어지는 또 다른 리얼함이다. “비쉬니악이 조악한 장비와 필름으로 만들어낸 것을, 나는 90년대 기술로 흉내내야 했다. 50년 전의 내가 조명기 하나없이 작은 카메라를 들고 그 장소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15년 뒤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더라도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알아차리지 않기를 원했다.” 명암이라는 단조롭고도 강렬한 재료만으로 시대의 질감을 완벽하게 전달했던 그는, 필름 현상의 다양한 실험을 해볼 수 있었던 <아미스타드>를 거쳐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이르면 현상과 렌즈, 필터, 카메라의 보디 자체를 이용하여 과감한 전복을 꾀한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후 카민스키가 취한 모든 촬영과 현상 기법과 장비들은 철저하게 아날로그 영역에 머물렀다는 사실이다. 디지털이 따라올 수 없는 필름 자체의 질감을 중요시하는 카민스키가 한국에서도 일반화된 디지털 색보정(DI)을 사용한 것은, <터미널> 한편뿐이다. 그나마 그때는 부족한 조명으로 찍은 화면을 보완해야 한다는, 어쩔 수 없는 이유 때문이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초반 전투 장면에선 조명기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생생한 시대의 느낌을 재연했다고 평가받는 <캐치 미 이프 유 캔>에서는 어떤 특별한 필터도 사용하지 않았다. <A.I.>를 찍을 때는 이미지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필터 대신 스타킹을 렌즈 위에 씌웠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앤더튼이 범죄예방국 요원을 피해 좁은 골목 위로 날아오르는 장면은, 그린 스크린이 아닌 여러 개의 도르래를 이용해 완성했다.
여전히 거의 모든 장면에서 한대의 카메라만을 사용하는 감독과 작업해온 카민스키는, 규모를 자랑하지 않는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시대극과 전쟁영화, SF를 넘나들며 화려하기 그지없지만, 2.35:1의 화면비율을 갖춘 영화는 <마이너리티 리포트>와 <뮌헨>뿐이다. 그가 대부분의 영화에서 시도한 특별한 현상은 이전에도 존재했던 것이고,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선보였던 개각도 촬영이나 이미지 셰이커 등의 장비는 그가 최초로 개발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의 영화를 본 많은 촬영감독들은 그가 어떻게 그 장면을 찍었는지 궁금해한다. 누구나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안목과 감각으로 적재적소에 배치된 구식의 기술이 그의 영화에선 언제나 빛을 발한다.
카민스키의 비주얼은 무난한 상업영화에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톤(tone)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화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나 질감 정도의 상당히 모호한 의미로 풀이할 수 있는 단어로, 촬영감독에게는 큰 의미를 지닌다. 숙련된 카메라 오퍼레이터와 개퍼(촬영감독의 지시를 받아 조명 분야를 담당하는 책임자)가 현장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할리우드의 DP 시스템에서 촬영감독의 역량을 판단하는 기준은 결국 영화의 톤이기 때문이다. 가장 무난하게 이야기를 전달해야 하는 상업영화에서 일관된 톤을 유지하는 것은 기본. 그러나 야누스 카민스키는 기계적인 일관성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촬영감독 중 한명이다. 서로 연결된 신에서 매번 다른 특수현상을 시도하여 질감을 대비시키고, 코닥과 후지 등 다른 회사의 필름을 한 영화에서 사용하며, 두대의 카메라를 사용할 경우에는 전혀 다른 렌즈로 찍힌 컷을 병치시키기도 한다. 실전을 방불케 하는 처절함과 긴박함으로 현재까지 전쟁영화의 교본이 된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카민스키의 그런 대범한 시도가 최초로 시작된 영화이다. 피와 파편이 묻은 렌즈로 촬영한 컷과 오래된 렌즈의 코팅막을 벗겨내어 찍은 뿌옇게 변형된 컷, 카메라 내부를 고의로 망가뜨려 빛이 비정상적으로 반사되도록 촬영한 컷이 불규칙적으로 배열된 신은 상업영화의 매끄러움과는 거리가 멀다. “다수의 종군 카메라맨들에 의해 16mm 카메라로 촬영된 것처럼 보였으면 했다”는 카민스키는, 전달하려는 컨셉이 확실하다면 이를 위한 어떤 실험도 서슴지 않았다. 현상 과정에서의 실험이 필름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가할 수도 있다는 점, 렌즈나 카메라를 직접적으로 훼손하는 것은 대부분 금기시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처럼 커다란 규모의 촬영에서 카민스키가 보여준 시도는 이례적이다.
놀라운 것은 그의 대범한 실험 대부분이 인지되지도 않을 만큼 자연스러웠다는 사실이다.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비롯해 <A.I.> <우주전쟁> 등 스필버그의 최근 SF영화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화면의 거친 질감과 대범한 조명이 빚어내는 극단적인 콘트라스트에 놀라게 된다. <쎄븐> 등에서 다리우스 콘지 촬영감독이 선보였던, 관객을 압도하는 화면에 비해 카민스키가 구사한 비주얼이 그 자체로 떨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물론 다른 점은 있다. <쎄븐>의 화면은 이야기와 대등한 위치에서 관객에게 말을 걸어온다. 그러나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화면은 영화 전체에 모던함이 스며들도록 하여, 영화 속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지더라도 관객이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