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촬영감독 야누스 카민스키에 관한 오해 혹은 진실 [2]
2006-02-21
글 : 오정연

카민스키에게는 자신만의 스타일이 없다?

옛날 다큐멘터리의 거침과 우아한 흑백영화의 기품이 함께 느껴지는 <쉰들러 리스트>, 가장 행복한 꿈에 깃든 불길한 정조가 생생한 <A.I.>, 1960년대의 낙천적인 분위기가 충만한 <캐치 미 이프 유 캔>, 공항터미널이라는 모던한 공간에서 어른을 위한 동화의 느낌을 살린 <터미널>…. 야누스 카민스키의 필모그래피를 보면서 일관된 스타일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스필버그와 함께하지 않은 영화라고 해야 <제리 맥과이어> <아메리칸 퀼트> 같은 잔잔한 드라마뿐이다. 멀리는 누벨바그의 스타일을 완성한 라울 쿠타르부터 가까이는 크리스토퍼 도일까지,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촬영감독들은 어떤 식으로든 정리할 수 있는 특징을 지녔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영화를 보고 누가 찍었는지 인지할 수 있는 스타일을 갖는 것이 훌륭한 촬영감독의 조건인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카민스키가 함께 작업했던 감독의 이름이라도 진지한 작가에 근접했다면 얘기는 달랐을 것이다. 로비 뮬러에게는 빔 벤더스와 라스 폰 트리에가, 비토리오 스토라로에게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있었다. 하지만 대중적인 상업영화 감독 혹은 동화에 경도된 피터팬 스티븐 스필버그는 예술적 명예를 중시하는 촬영감독이 달가워할 이름은 아니었다.

<제리 맥과이어>
<아메리칸 퀼트>

그럼에도 카민스키의 고유한 인장은 존재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블리치 바이패스와 함께 그가 대부분의 영화에서 시도하고 있는 ENR 현상. 이는 비토리오 스토라오 촬영감독과 함께 일한 현상기사가 최초로 개발한 기법으로 컬러필름을 현상하는 공정에서 흑백필름 현상통을 한번 더 거치도록 하는 것이다(특정한 현상소에서 특허를 낸 기법이므로 이를 흉내낼 수는 있지만 ENR 현상이라는 명칭은 사용할 수 없다). 이렇게 현상을 할 경우 블리치 바이패스의 효과와 함께 화면의 어두운 부분이 윤기가 흐르는 듯한 느낌이 추가된다고 알려져 있다. 정작 카민스키 자신은 “스필버그의 엄청난 스피드를 따라가려다보면 화면 안에 콘트라스트를 만들기가 어렵다. ENR 현상을 거치면 이를 보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랜 기간 현상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다양한 실험을 거듭한 끝에 그는 이제 현상과정의 미세한 조절을 통해 어떤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개인적인 데이터를 가지게 됐다. 그중 한 가지가 ENR 현상을 거친 화면에서 광원이 프레임 안에 위치할 경우 그 빛이 신비롭게 갈라진다는 것이다. 그게 뭐 대단한 것이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그러나 카메라와 인물의 움직임을 최대한 배려한 조명을 우선시하는 그는, <쉰들러 리스트> 때부터 커다란 창문처럼 화면 안에 강한 광원을 자주 배치했다.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그의 화면은 어두운 부분의 디테일을 표현하기보다는 강렬하게 밝은 부분, 그 빛을 받은 인물이나 대상의 반짝임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기를 즐긴다. 그에게 그 빛이 색다른 방식으로 구현되는 현상은 꽤 흥미로운 발견이었을 것이다. <A.I.>나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이르면 특정 조명을 향한 그의 기호, 이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현상방식이 스타일로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그 강한 빛은 때로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고, 때로 비극적인 상황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카민스키의 모든 것은 스필버그에게서 비롯됐다?

스필버그는 주밍을 혐오하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간 야누스 카민스키가 아무리 권해도 사용하지 않았던 주밍이 <뮌헨>에선 빈번하게 선보인다. 스필버그 영화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드라마틱한 무빙에 다양한 속도의 주밍이 더해져 좁은 차 안에 있는 인물을 비추다가 외부의 폭발을 보여주는 장면 등에서 긴박함을 더한다. 스필버그가 주밍을 받아들인 이유는 단 한 가지. 70년대 누아르물의 느낌이라는, <뮌헨>의 촬영 컨셉에 주밍이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쉰들러 리스트>에서 <뮌헨>까지 카민스키가 촬영한 스필버그 영화는 조금씩 변해왔다. 주밍처럼 사소하게 여겨지는 카메라 무빙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많은 촬영감독들은 카민스키를 상업영화의 곱고 매끈한 톤을 거칠고 강렬한 그것으로 바꾼 장본인 중 한명으로 꼽는다. 그런 변화는 아마도 <뮌헨>에서 주밍을 사용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야기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진 카민스키의 주도면밀한 시도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스필버그를 “고전적인 조명을 선호하고 전통적인 아름다움에 끌리는 감독”이라고 평가하는 카민스키는 <캐치 미 이프 유 캔> 개봉 당시, “나는 스필버그의 미적 감각을 천천히 변화시키고 싶었다”고 말한 바 있다. “순수한 캐릭터가 추하고 어두운 환경에 처할 경우 그의 순수함이 더욱 강조된다. 나는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추함에 매료돼 있다”는 그의 고백은 언제나 감독과 이야기를 앞세우는 촬영감독의 겸손함 뒤에 존재하는 확고한 자신감으로 다가온다.

<쉰들러 리스트>
<뮌헨>

<LA타임스>의 한 기사는 스필버그와 카민스키를 발랄한 이야기꾼과 그림자의 거장이라 일컬은 바 있다. 사실 스필버그가 카민스키를 선택한 시점은 짐짓 의미심장했다. <쉰들러 리스트>는 스필버그가 만년 피터팬의 이름을 벗어버리기 시작한 첫 발걸음에 해당한다. <칼라 퍼플> <태양의 제국> 등에서는 비교적 진지했지만 이야기는 여전히 소년기에 머물러 있고, 그 비주얼은 순진무구했다. 어쩌면 스필버그는 <쉰들러 리스트>를 준비할 당시, 먼 미래 자신이 안게 될 어떤 욕망을 무의식 중에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이후 스필버그는 <아미스타드>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 등 실제 역사 속으로 주저없이 걸어들어갔고, 그 뒤 만들어진 SF영화 역시 <E.T.> 등과는 확연히 다른 결을 지니고 있었다. 스필버그가 <쉰들러 리스트>를 기점으로 본능에 의지한 즉흥적인 촬영방식을 가지게 됐다고 회고하는 것으로 미루어, 카민스키를 기용해 작업방식까지 변화시키겠다는 의도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형태는 물론이고 그 방향마저 정해지지 않았던 변화를 지금의 것으로 만들어낸 사람이 카민스키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리고 스필버그는 카민스키를 만난 이후 동화가 은폐하는 차가운 현실, 역사 속에 잊혀진 어두운 과거를 바라볼 수 있게 됐다.

특정한 비주얼을 ‘탁’ 잡아내는 센스

국내 촬영감독 6명이 말하는 야누스 카민스키

“<무사>와 <살인의 추억>에서 그의 기법을 시도했다”

김형구/ <아름다운 시절> <박하사탕> <무사> <살인의 추억> <봄날은 간다> <극장전> <괴물> 등

“누구나 그랬겠지만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초반 시퀀스는 정말 놀라웠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개각도 촬영인데 나중에 <무사>에서 그 기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화면의 채도가 굉장히 낮았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는 ENR 현상 때문인데 일반적인 현상에 새로운 과정을 첨가한다는 건 전체적으로 현상시스템을 바꿔야 하는 것이라서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살인의 추억>에서 그와는 조금 달라도 최대한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블리치 바이패스를 시도했다. 그리고 카민스키는 그 장면을 제대로 촬영하기 위해선 일정하게 흐린 날씨가 유지돼야 하기 때문에 몇 가지 시도를 했다. 나도 그중 하나를 듣고 <무사>를 찍을 때는, 해를 가리기 위해 커다란 검은 연기를 피우기도 했다.

“화면보다 시나리오를 먼저 생각한다”

김우형/ <해피엔드> <거짓말> <나쁜 영화> <바람난 가족> <그때 그사람들> <오래된 정원> 등

“스필버그 영화에는 어지간한 촬영감독들은 구사하지 못할 카메라 무빙이 자주 눈에 띈다. 그런 무빙을 하려면 완벽하고 진지한 조명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카민스키는 완벽한 조명과 빠른 작업 속도를 병행할 수 없을 경우 연출자의 의도와 성향을 더 존중한다. 상대가 스필버그라서 꼼짝 못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진 않다고 본다. 카민스키는 영화에서 중요한 것이 결국 감독이 하는 이야기라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의 주인이 감독이라는 걸 안다. 자기가 하고 싶고 좋아하는 어떤 화면이, 시나리오에서 요구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우선적으로 따지는 것 같다. 영화를 찍다보면 이렇게 하면 멋진 화면이 나올 것 같다는 유혹의 순간이 있다. 그 순간에, 보기에 좋은 것보다 시나리오를 먼저 생각하는 건 쉽지 않다.”

“필터도, 조명 방식도 그만의 것이 있다”

김지용/ <달콤한 인생> <음란서생>

“카민스키가 단편 <점보 걸>을 찍을 때 조명감독으로 일한 적이 있다. 당시 받은 느낌은 조명을 디자인할 때 배우들의 동선을 상당히 넓게 확보해서 카메라가 많이 움직일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굉장히 즉흥적으로 감독과 의견을 교환해서 이를 반영하고, 작업속도도 빨랐다. 내 생각에 그의 스타일은 상당히 센 편이다. 필터도 자기만 쓰는 것이 따로 있고, 조명 방식도 그렇다. 가장 부러운 것은, 스필버그의 영화 혹은 커다란 예산이 들어간 상업영화를 찍으면서도 과감한 시도를 행할 수 있는 자신감이다. 한 사람과 계속 작업을 하기 때문에 연속된 작품 속에서 일관된 스타일을 발전시킬 수 있는 것 같다. <마이너리티 리포트> 이후 영화들은 이전까지 해왔던 다양한 시도를 바탕으로, 단순한 컨셉을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게 된 것 같다.

“비주얼을 위해 최대한 테크닉을 동원한다”

김병서/ <태풍태양> <…ing> 등

“할리우드의 비주얼 트렌드가 다리우스 콘지에서 야누스 카민스키로 넘어갔다. 단순히 스필버그의 촬영감독이어서가 아니라 자신만의 힘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볼 수 있듯 리얼리즘이든 표현주의든 자신이 생각하는 비주얼을 위해 최대한의 테크닉을 동원하는 촬영감독이다. 그가 뭔가 시도를 했을 땐 누구나 동의할 수 없을 만큼 특정한 비주얼을 ‘탁’ 잡아내는 것이 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다시 영화를 하는 동시대인들에게 자극을 주는 것이 아닐까.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캐치 미 이프 유 캔>. 카민스키의 다른 영화에 비해 촉촉하달까, 시대의 공기를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와이 순지와 작업을 많이 한 촬영감독 시노다 노보루를 좋아하는데, 빛이나 무드를 만들어내는 것이 매우 비슷하다.”

“관객과 감독 사이에서 영상으로 조절하는 능력”

정정훈/ <유리> <찍히면 죽는다>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사이보그지만 괜찮아> 등

“상업영화적인 구도와 기법, 그리고 그에 맞는 장비를 잘 쓰는 사람이다. 비토리오 스트라로나 콘래드 홀 같은 전통적인 촬영감독 거장들과는 좀 다르다. 다리우스 콘지 역시 상업영화에 어울리고 촬영의 깊이감에서는 콘지에게 더 점수를 줄 수 있겠지만 카민스키는 관객과 감독 사이에서 영상으로 조절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일반적으로 감독들은 남의 영화 따라하는 걸 싫어하고, 전에 다른 영화에서 나왔던 것들은 진부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영화에는 새로운 것이 나오길 바란다. 카민스키는 호기심도 많고 계속 공부를 하면서 끊임없이 감독에게 제시를 했던 것 같다. 감독 입장에선 계속 그런 촬영감독과 작업하고 싶은 게 당연하다.”

“과감한 실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김동은/ <B형 남자친구> <가발> <구타유발자들>

“카민스키는 언제나 과감한 실험을 거친 뒤 이를 바탕으로 그림을 만든다. 한국의 제도권 영화들은 실험보다는 안정적인 틀 안에서 영상을 마무리하는 걸 요구한다. 할리우드와 충무로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는 제도를 거부하는 에너지, 힘이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시도들은 드라마를 해석하는 능력 때문에 더욱 돋보인다. 최근 <쉰들러 리스트>를 다시 봤는데, 드라마의 에너지를 영상에 옮기는 힘은 옛날부터 탁월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함께 작업했던 스필버그와 카민스키는 이제 눈빛으로 얘기할 수 있는 수준인 것 같다. 나는 단편 <빵과 우유>에서 만난 원신연 감독과 <가발>에 이어 <구타유발자들>을 찍었다. 세 번째에는 내가 어떤 이미지나 컬러, 톤을 제했을 때 감독이 긴 설명없이도 나를 믿어주는 것이 상당히 편했다. 스필버그와 카민스키는 오죽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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