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인디밴드가 말하는 내가 사랑한 영화들 [1]
2006-02-28
글 : 김나형

많은 인디밴드들이 척박한 길을 걸어왔고 또 걷고 있다. 10년에 가까운, 댄스 일변도 암흑시대를 지날 때에도 그들은 힘든 길을 계속 걸어주었다. 그 덕분으로 지금은 메인 스트림에도 다양한 음악들이 출렁거린다.

백인 컨트리 음악의 전설이라 불리는 조니 캐시의 일생을 그린 <앙코르>가 개봉을 앞둔 지금, 인디밴드들은 어떤 음악영화를 가슴에 남기고 있는지 묻고 싶어졌다. 각기 색깔을 달리하는 8개 팀의 문을 두드렸다. 그중에는 더스티 블루나 얼스, 눈뜨고 코베인 같은 (진정 인디밴드라 불러도 좋을) 밴드들도 있고, 캐스커나 허밍 어반 스테레오, 예레미, 재주소년처럼 이미 이름을 많이 알린 밴드들도 있다. 그리고 부가킹즈는 오랜 인디 생활을 거쳐 이미 메인스트림에 올라섰다.

음악영화의 수가 그리 많지 않은지라 밴드들이 꼽는 영화들이 비슷하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그들은 그들의 음악만큼이나 다양한 영화들을 골라주었다.

캐스커 Casker

프로듀서, 디제이/ 이준오 성격 더럽지만 의외로 섬세. 하루에 한끼 먹음(단, 많이 먹음). 직업이 취미이자 특기(필살기는 인터넷쇼핑).

캐스커는 이준오의 원맨밴드다. 한국 음악신에 시부야케의 씨앗을 정식으로 뿌렸다고 볼 수 있을 1집 <철갑 혹성>을 발표한 그는 이후 포춘 쿠키, 허밍 어반 스테레오, 이온 같은 동료, 후배 뮤지션들의 음악 작업에 참여해왔다. 시부야케 느낌이 강했던 <철갑혹성>과 달리 2005년의 2집 <Skylab>은 고탄 프로젝트, 데 파즈 같은 유럽 일렉트로니카, 라운지 뮤지션들의 음악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근래의 음악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캐스커의 음악 역시 딱히 무슨 장르라고 칭하기는 어렵다. 정통 라운지처럼 시작된 곡이 부드럽고 따스한 느낌의 여성 보컬로 스며갈 때면, ‘이준오가 만든 음악’이라는 표현만이 그저 적당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2집 앨범 일본 진출과 3집 앨범 발매가 현재 목표라는 그는, 왠지 그 다운 영화 3편을 꼽아주었다.

캐스커가 꼽는 음악영화

이보다 더 평화로울 수 없다, <인터스텔라 5555>
나는 마스모토 레이지의 광팬이다. 1집 앨범의 타이틀 <철갑혹성>도 <은하철도 999>에서 따온 것이다. 마스모토 레이지와 다프트 펑크의 조합이니,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데 더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가장 가슴에 남는 장면은 역시 <one more time>의 중간 간주 부분. 그보다 더 평화로울 수 있을까? 음악과 영상이 가장 잘 매치되는 신이라 생각한다. 이 장면만 보면 뭔가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그 쓸쓸함에 대하여, <벨벳 골드마인>
극장에서 처음 봤을때는 일단 너무도 글램(!)한 영상에 반했었지만, 지나고 생각하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핵은 정말 짧고 화려했던 글램록의 시기가 끝난 이후, 쇠락한 과거를 회상하는 남은 자들의 쓸쓸함이 아니었나 싶다. 사람들은 트렌드를 따라가고 그 이행에 실패한 사람들은 외롭다. 그 트렌드라는 것이 한없이 가볍고 덧없기에 더욱 그렇다. 커트 와일드(이완 맥그리거)는 뒷날 쓸쓸한 펍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려 했지만 결국 우리만 바뀌었어.” 음악과 세상에 배신 당한 사람들의 넋두리라고 쏘아붙일 수도 있겠지만… 현실이라는 것은 역시 비극의 요소를 충분히 갖고 있지 않은가.

얼스 Earls

보컬/ 신승훈 특이사항, 보컬이면서도 성형 안 했음. 기타/ 우경제 소심, 온순하나 속으로 계산 다함. 드럼/ 최경민 자칭 개그맨 타칭 어이없음, 이달의 목표는 키우는 캐릭터 만랩 찍기. 건반/ 임승범 난 B형이라 그럴까. 흥분하는 게 특기다. 베이스/ 김형배 날씬하던 내 얼굴…. 얼굴 살 빼고 말리라.

얼스는 펑크(Funk)의 불모지라 해도 좋을 한국에서 정통 펑크를 들려주는 팀이다. 그들의 음악에는, 제임스 브라운이나 타워 오브 파워의 그것처럼 흥겨운 리듬과 어딘지 친숙한 우리 주변의 냄새가 섞여 있다. 한상원 이후 목말라 있었을 펑크러버(Funk-lover)들에게, 그래서 얼스는 반갑고 고마운 그룹일 수밖에 없다. 재즈 아카데미에 재학 중일 때 만난 멤버들이 2002년 정식으로 팀을 꾸린 것이 얼스의 시작. 때로는 다른 뮤지션들의 세션맨으로서, 때로는 그룹 얼스로서, 클럽·페스티벌·레코딩룸을 바지런히 오가며 꾸준히 그들의 길을 걸어왔다. 올해 초 1집 <The Merrymaker>를 발매했고, 사운드 데이, 클럽 FF 등 홍익대 클럽에서 공연하고 있다.

얼스가 꼽는 음악영화

뱃속을 울리는 배 안의 피아노 소리, 임승범_<피아니스트의 전설>
로저 워터스의 <The Child>가 너무 좋아서 한참 듣고 다녔다. 그 노래가 이 영화의 O.S.T에 있는 곡이란 걸 나중에야 알고, 영화를 보게 됐다. 비디오 대여점에도 없어서, 어찌어찌 겨우 구해 보았다. 엔리오 모리코네의 섬세하고 깊이있는 음악들이 아주 매력적이었다. 주인공 ‘나인틴 헌드레드’가 사랑하게 된 여자를 바라보며 했던 피아노 연주는 특히 최고였다. 평생을 배 안에서 산 그가 버지니아호를 떠나지 못하고, 결국 배에 혼자 남아 죽는 라스트신도 떠오른다. “막 배에서 내리려고 했을 때, 수백만개의 건반이 보였지. 너무 많아서 절대로 어떻게 해볼 수 없을 것 같은…, 수백만개의 건반. 그걸론 연주를 할 수가 없어. 피아노를 잘못 선택한 거야.”

그에게 장애는 축복이었을지도, 신승훈_<레이>
이건 만용이지만, 나는 가끔 장애를 갖고 싶다고 생각한다. 예술적 성향이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하기에 ‘장애를 갖게 되는 대신 또 다른 세계에서의 자신과 사물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을 품나보다. <레이>도 그래서 좋았다. 솔의 거장인 동시에 장애를 가진 한 인간의 삶을 그리고 있으니까. 특히 머릿속에 남아 있는 건, 레이가 조지아 발 버스를 타는 장면이다. 전쟁에 참전했다가 눈이 멀었다고 천연덕스럽게 둘러대는 레이와 그 말에 태도 돌변하여 ‘내가 자네 자리를 잡아주겠네’라고 말하는 백인. 인간은 얼마나 간단하고 멍청하고 이기적인가 말이다. 근데…, 감동은 다른 데서 받았는데 나는 왜 이 장면이 머릿속에 있지!!

재주소년 才洲少年

보컬, 어쿠스틱 기타/ 박경환 성격, 비열함. 특이사항, 굉장히 비열함. 향후 한달간 가장 큰 계획, 녹음완료 뒤 싸보와 여행가기. 기타/ 유상봉 성격, 소심함. 특이사항, 유머감각 있음. 향후 한달간 가장 큰 계획, 녹음완료 뒤 경환과 여행가기.

박경환, 유상봉으로 결성된 듀오 밴드 재주소년. 두 소년이 모두 제주에서 대학을 다니기에 ‘제주소년’이라는 이름이 얘기되다가, 제주의 洲와 재주의 才자를 합쳐 ‘재주소년’이 되었다. 델리 스파이스 김민규가 그들 앨범을 프로듀스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슬픈 듯 순수한 그들의 음악은 귀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방송을 타기 시작했다. 라디오 청취자라면, 이적의 드림온, 이소라의 음악 도시 같은 프로에 게스트로 나와 ‘조용한 엽기 발언’을 하던 그들의 입담도 기억하고 있으리라. 2005년 발매된 2집 <Peace>는 1집 <재주소년>보다 한결 경쾌하고 명랑한, 또 다른 색깔로 칠해졌다.

재주소년이 꼽는 음악영화

예술과 생활의 교집합은 불가능할까, 박경환_<꽃피는 봄이 오면>
혼자 집에서 며칠 동안 비디오만 보던 때 본 영화 중 하나다. 음악을 한다는 것과 생계유지를 하며 살아간다는 것의 상관관계를 깊이 생각하게 해주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도 그랬지만. 그래도 <꽃피는 봄이 오면>쪽이 조금은 더 밝게 표현한 것 같아 마음에 든다. 아이들이 <사랑의 트위스트>를 연주하며 선생님과 함께 즐거워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왠지 몰라도 그 장면에서 나는 속이 상했다.

각성제 같은 그 파워, 유상봉_<헤드윅>
2003년 봄, 어느 오후. 독특한 캐릭터의 형 둘과 지하 연습실에서 본 영화다. 작업과 불규칙적인 일상에 지쳐 있을 때였는데…, 록킹하고 스펙터클한 음악이 마음에 들었다. 화려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그런 느낌이 좋았다. 헤드윅이 <사랑의 기원>을 부르던 장면이 기억난다. 연주하는 밴드와 신비로운 에니메이션. 그리고 그리스 신화에나 나올 법한 가사가 마음에 들었다. 잠이 덜 깨서 몽롱한 상태에서 보고 있었는데 그때 잠이 확 깼다. 사랑의 기원이라니…, 호기심 가득해졌던 것 같다.

더스티 블루 Dusty Blue

보컬, 세컨기타/ 김이안 성격 알콩달콩. 요추 4, 5번 디스크 익스플로전 상태. 드럼/ 손승호 성격 물으면 “나랑 결혼할 거냐!!”며 화낸다. 한달 동안 10kg 감량 경력을 자랑. 리드 기타/ 나상진 뾰족, 까탈, 섬세하면서 다정하고 순진한 집념의 사나이… 라고 본인이 말했음. 베이스/ 민경준 자기 성격을 잘 모름. 남들이 알 거라는 말로 면피를 시도. 향후 한달간 가장 큰 계획은 부모님 설득하기. 음악하고 싶어요.

‘더스티 블루’는 기형도의 시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따왔다. ‘더스티 블루’ 라인업이 확정된 것은 2003년 11월. 이전부터 이미 오랫동안 밴드 생활을 해온 사람들답게 일단 목표를 정한 그들은 부지런히 움직여, 이듬해 봄 <사라져> <Load to High> <너의 마지막> 3곡을 완성했고, 여름엔 <Unknown Artist>라는 제목의 앨범을 내놓았다. 부드럽고 예쁜 음악이 대세를 이룬 요즘, ‘더스티 블루’의 존재는 특별하다. 손승호, 민경준의 탄탄한 드럼·베이스 위에 나상진의 시원한 록 기타와 김이안의 호쾌한 보컬이 더해져 남성적 매력을 발산한다. 그리고 그 에너제틱함 속에는 (그들의 이름이 그렇듯) 우수가 깃들어 있다. 프리 버드를 중심으로 롤링 스톤즈, 스팟 등의 클럽에서 활발히 공연 중. 매력에 비해 대중적 인지도가 높지 않은 것이 아쉽다.

더스티 블루가 꼽는 음악영화

욕망에 충실하라니깐, 손승호-<록키 호러 픽쳐쇼>
대학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다. 친구는 1970년대 영화를 왜 돈을 내고 봐야 하는지 심각하게 회의하고 있었다. 그에게 온갖 감언이설과 고단백, 고지방, 고칼로리 식품을 제공한 끝에 코아아트홀에서 <록키 호러 픽쳐쇼>를 보았다. 수잔 서랜던은 그야말로 쇼킹했다. 그녀의 그렇게 젊고 예쁘며 섹시한 모습을, 여타 영화들에선 도저히 찾아볼 길이 없다. 근육질의 남자에게 자신을 만져달라고 교성을 지르는 수잔 서랜던을 1980년생인 내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나.
이 영화는 엄청 유치하고 뒤집어져라 웃기지만, 그로테스크한 섬뜩함으로 보는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한다. 흥겨운 로큰롤의 향연 속에 “욕망에 충실히 행동하라”는 메시지를 숨겨놓고, 엄숙한 도덕관념을 비꼰다. 휠체어를 탄 박사가 “이 미치광이의 소굴을 빨리 벗어나야겠어”라며 다리를 들어올리는 장면이 압권이다. <식스 센스>의 반전은 저리 가라다.

드라마틱한 음악가에 대한 영화적인 영화, 김이안_<레이>
눈이 보이지 않는 위대한 음악가의 삶을 그야말로 영화적으로 그려놓았다는 생각이다. 정신적으로 마음껏 피폐한 상태에서 보았는데, 영화가 끝난 뒤 알 수 없는 힘이 나더라. 레이의 까만 선글라스에, 그가 치는 건반이 비친다. 실제로 그에게는 보이지 않을 자신의 손놀림. 그 움직임을 따라가는 듯, 선글라스 밑으로 웃고 있는 레이의 모습…. 음악으로 행복할 수 있었던 한 인간의 모습이 전해져왔다. 거장으로서의 모습이 아닌,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연주자의 모습이.

그 바이올린의 슬픈 얼굴, 나상진_<레드 바이올린>
악기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아주 재미있게 봤다. 특히 기타리스트들은 자기 악기에 대한 애착이 매우 강하니까. 나도 중고 기타를 쓰고 있다. 어떤 사람들의 손을 거쳤을지 모르는.
날씨 좋은 날, 커피 사들고 강변CGV에서 봤다. 연습을 너무 무리하게 했다가 인대가 늘어나 기타를 못 치는, 아주 암울한 상황이었다. 바이올린이 총에 맞는 장면, 바이올린이 마치 사람같이 느껴졌다. 튀는 파편 뒤로 슬픈 표정을 한 바이올린.

록 스피릿에 대한 교과서, 민경준_<스쿨 오브 락>
집에 같이 사는 형님의 반 강요. “록 스피릿과 액션을 보고 배우란 말이야!” 역시 잭 블랙의 록 스피릿이 돋보였다. 반대하던 학부모들이 마지막 공연 때 같이 어우러지던 장면은, 부모님들께 (음악을 하겠다는) 의사를 확실히 밝히지 못한 내 처지 때문에 더 마음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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