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손님은 왕이다> 뒷이야기 [2]
2006-02-28
글 : 이영진
사진 : 이혜정

신인감독, <손님은 왕이다> 준비에 들어가다

# 사채업자: 따님 병원비가 급하다 그래서 가져간 거 아니오? 그래서 나도 안타까운 마음에 드린 거구… (후략)
김양길: 갚을게. 꼭 갚는다구. 이번에 영화사에서 나 주인공으로 박아놓고 준비하는 영화가 있어. 그거 계약만 하면 말이야. 아, 진짜야. 이번엔 주인공이라니까. 그 출연료 나오면 바로 갚을게. …(중략)
사채업자: 짤러! (영화 <손님은 왕이다> 중에서)

실상은 달랐다. 2004년 2월, 오기현은 7년 동안의 타지 생활을 끝내고 귀국했고, 곧바로 대학로에 있던 명계남의 이스트필름을 찾았다. ‘장밋빛 미래’는 없었다. 가는 날이 이삿날이었을 뿐. 명계남은 월세 내기가 버거워서 조우필름과 살림을 합한다고 했다. 여의도에 있는 조우필름을 찾았을 때, 그는 또 한번 놀랐다. 제작사 대표가 순돌이 아빠처럼 직접 전기 배선공사를 하고 있어서였다. “조종국 대표를 처음 봤을 때 한국전력 직원인 줄 알았다.”

미국은 미국일 뿐. 그는 한국에서 감독 되는 법을 따로 익혀야 했다. 명계남의 소개로 알게 된 이성강 감독의 <살결> 작업을 잠시 도우면서, 그는 자신의 시나리오를 고쳐 썼다. 여기저기 시나리오 공모에도 응했다. 그동안 <명배우 죽이기>는 <손님은 왕이다>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다. 또 지문이 많은 미국식의 시나리오 또한 투자를 받기 위해 내러티브가 두드러진 형태로 다시 써야 했다. “배우를 정할 때 연옥 역에 성현아가 어떻냐고 했더니 다들 미쳤구나 하는 얼굴이었다. 스물세 장면밖에 나오지 않는 조연에 주연급 연기자를 쓰자고 했으니까. 뒤늦게 내가 세상 물정 모르는 걸 알았다.”

<손님은 왕이다> 촬영현장
<손님은 왕이다> 촬영현장

난관은 또 있었다. 4고를 쓸 무렵, 그는 TV에서 솔깃한 이야기의 진실 여부를 가리는 오락 프로그램을 봤다. 이발사에게 어느 날 낯선 협박자가 찾아온다는 설정이었고, 그것이 일본의 추리소설가인 니시무라 교타로의 단편소설 <친절한 협박자>의 줄거리라는 걸 알았다. 미국에서 시나리오를 쓸 때 그는 절친한 시인 김창진의 귀띔으로 미스터리 동호회의 한 게시판에서 쓰여 있던 흥미로운 설정에서 힌트를 얻어 시나리오를 썼던 것이다. 뒤늦게 원작자에게 연락을 취해야 했고, 영화화 허락을 받기 위해 시나리오를 일본에 보내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이게 영화야? 이게 영화가 되긴 되는 거야, 그랬다고. 내가 김구 선생처럼 위대한 것도 아니고 게다가 아직 멀쩡히 살아 있잖아. 시나리오를 본 것과 영화를 만드는 것과는 다르다고. 실제 배우 명계남을 소재로 썼으니까. <너는 내 운명>의 황정민이나 전도연도 실제 인물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직접 그분들이 나와서 연기를 하는 것도 아니잖아. 가공을 해야 하는 배우 입장에서 복잡해지는 거지.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도 그랬다고 하지만 난 못 봤거든. (웃음) 조우필름의 조종국 대표가 소재일 뿐이다라고 해서 영화로 만들 수 있다고 하기에 디지털로 그냥 한번 찍어볼까 그랬다고. 투자자나 시장에서 용인이 될까 걱정도 되고. 근데 그것도 해결되니까 하는 수밖에 없는 거야. 혹시라도 내가 잘못해서 관객에게 프라이비트 무비로 보이면 어떻게 하나 고민은 지금도 있지만.”_명계남

대선배 배우, 후배 배우들과 맞짱뜨다

# 김양길 역이 배우로서 마지막 영화가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더이상 영화 속 명계남이라는 배우가 맡은 역을 통해 세상과 대화할 수 있다고 기대하지 않으니까요. 말하자면, <손님은 왕이다>는 주연이어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저의 마지막 영화이기에 의미가 있습니다.”(연극 <콘트라베이스> 팸플릿에서)

“명 대표님이 나서기 시작하면 신인감독인데 현장을 컨트롤 못하는 거 아냐?” 오기현은 촬영 전 부담이 적지 않았다. 제작진 내부에서 적지 않은 오해가 순배없는 술잔 돌 듯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명계남은 “제 나이보다 10년은 늙어 보이지만 10년은 젊게 사는 사람”이라는 문성근의 말에 고개를 끄떡였던 오기현으로서는 그런 반응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동료 배우들도 다를 게 없었다. 모니터하면서 담배를 피우다가도 명계남이 나오면 슬그머니 사라지는 성현아와 명계남이 형이라고 부르라고 해도 좀처럼 계남이 형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성지루가 그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근거없는 오해는 당사자가 풀어야 했다. 오기현의 귀띔에 명계남은 첫날 촬영 이후 곧바로 성현아에게 전화를 했고, 그날 이후 성현아의 도둑 담배는 당당한 흡연이 됐다. 칼을 들이대도 “계남이 형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성지루는 극중 역할을 고려해서 그대로 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선균에게는 “미리 겁먹지 말고” 마음껏 지르라고 했다. 이선균과 명계남이 맞닥뜨리는 첫 장면. 창동 지하철 역에서 이선균은 마음껏 명계남에게 발길질을 했고, 그날 명계남은 갈비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명계남은 그날 오기현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내가 다친 것을 절대 선균이에게 알리지 말라”고.

그러나 이런 몸 고생은 배우에게는 아무래도 좋았던 모양이다. 명계남은 오기현에게 김양길과 명성남을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며 “이러다간 정신병 걸리겠다”는 하소연을 여러 번 털어놨다. 김양길은 연극을 하듯이, 명성남은 그냥 평소 명계남의 모습대로, 라는 원칙을 몸으로 옮겨내기란 쉽지 않았다. 제작진이 하루도 쉬는 날 없이 2개월 동안 빡빡하게 촬영을 진행하는 동안 명계남은 배우로서 그동안 맡아왔던 분신들을 재연하고, 또 평소 자신의 일상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혼란에 빠져 있었지만, 오기현은 김양길, 아니 명성남, 아니 명계남을 지켜보는 또 다른 재미를 만끽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1인2역을 해본 적이 있나. 뒤죽박죽이지. 나중에 시사회 때 보니까 부끄럽고, 쑥스럽더라고. 내 이야기를 소재로 해서 그렇다는 게 아니라 거르지 않고 나를 담아서 부끄럽고, 쑥스럽다는 거야. 처음엔 감독이 머리 아프겠구나, 미리 편집까지 계산하고 연기를 요구해야 할 테니까, 그랬는데 엊그제는 오기현이 나쁜 놈이라고 욕했다고. 자기는 감독이고 하고 싶은 거 다하는 동안 나는 죽어났으니까. (웃음) 촬영하면서 좀 놀아야 하는데, 너무 역할에 빠져들어 있는 건 아닌가 걱정이 돼. 나에 대한 비호감 때문에 괜히 재주있는 감독 앞길 막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_명계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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