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1936년에도 <자유부인>은 있었다, 한국영상자료원 수집발굴전
2006-03-01
글 : 오정연
최고(最古)작 <미몽> 등 미공개작 3편 공개

한국영상자료원이 지난해 말 중국전영자료관에서 발굴한 1930∼40년대 한국영화 3편을 공개하는 수집발굴전을 개최한다. 오는 3월2일부터 5일까지 영상자료원 고전영화관에서 열리는 이번 발굴전에서는, 영상자료원에서 보존하는 한국영화 중 최고(最古)작이 된 <미몽>(1936)을 포함, 3편의 미공개작과 더불어 <군용열차>(1938) 등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8편의 영화를 함께 감상할 수 있다. <군용열차> <지원병> 등 지난해의 수집발굴전을 통해 공개된 영화들이 한국영화사 아카이브를 10년가량 앞당겼다는 데 큰 의의가 있었다면, 이번 기회에 만나게 될 영화들은 영화적인 완성도와 독특함을 겸비한 수작들이다. 1930년대의 자유부인(<미몽>)을 비롯하여, 눈물없이 볼 수 없는 멜로의 주인공이 된 지원병(<조선해협>), 영화 만들기의 어려움 속에서 사랑을 이루는 배우지망생(<반도의 봄>) 등 저마다 다른 면모를 지닌 영화 속 주인공들도 흥미롭다. 우리에겐 아직도 항일투사와 친일파들이 존재했던 시기로만 다가오는 그때 그 시절. 선조들의 생생한 일상과 그 안에 감춰진 욕망이 궁금하다면 놓쳐서는 안 될 기회다.

작품 소개

<미몽> 양주남/ 1936년/ 35mm/ 흑백/ 47분
“당신 대체 어딜 가는 게요?” “데파트에 가요.” “뭔 옷을 또 산다는 게요?” 일명 ‘죽음의 자장가’라고도 불리는 영화 <미몽>은, 오늘날의 평범한 부부의 가시 돋친 말싸움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은 대화로 시작한다. 그러려면 차라리 집을 나가라는 남편이나 자기도 데려가라 떼를 쓰는 어린 딸은 아랑곳않고 비싼 옷 쇼핑에 여념이 없는 이 여자, 애순(문예봉). 20년 뒤에 등장했던 <자유부인>과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자유분방함을 자랑하는 그는, 사랑했던 정부가 실은 가난한 범죄자임을 알게 되자 망설임없이 경찰에 신고하는 결단력까지 겸비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현대 무용가를 향해 열렬히 구애하던 그이지만, 자신의 욕망이 사랑하던 딸의 목숨까지 위태롭게 만들게 되자 후회어린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파격적인 애순의 캐릭터 못지않게 눈길을 끄는 것은 할리우드 고전영화의 만듦새를 의식하지 않은 영화의 스타일. 대부분의 장면에서 180도 법칙은 지켜지지 않고, 비슷한 앵글과 사이즈의 숏이 반복된다. 사운드의 유사성을 염두하여 시퀀스를 연결시키거나, 교차편집을 통해 인물의 상황을 극대화하는 등 편집기사 출신 감독의 세심한 손길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나는 조롱 속에 든 새가 아니니까요”라는 애순의 대사가 이어지는 동안 실제 새장을 보여주는 장면에선 몽타주 이론의 흔적도 엿보인다.

<반도의 봄> 이병일/ 1941년/ 35mm/ 흑백/ 84분
춘향과 몽룡의 달콤하고 은밀한 데이트 현장에서 시작하여, “오라이, 컷!” 사인과 함께 영화 촬영장 풍경을 묘사하는 <반도의 봄>은 당시 영화 촬영현장, 극장가 풍경, 영화사나 레코드사 사무실 등 대중문화 현장의 디테일을 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료적 가치를 지닌 영화다. 여배우가 되기 위해 평양에서 상경한 정희는 영화제작자 영일의 소개로 음반회사에 취직한다. 이후 영일은 자신이 제작하는 <춘향전>의 감독에게 말을 듣지 않는 여배우 대신 정희를 캐스팅하도록 조언한다. 정희의 연기력은 수준급이었으나 문제는 제작비 부족. 음반회사의 공금을 <춘향전>의 제작비로 유용한 영일은 구속되고, 영일을 도우려는 정희의 노력도 결실을 맺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고통은 잠시뿐이고 예술은 길다. 우여곡절 끝에 영화는 완성되고, 주인공들의 사랑도 보답을 받는다. 발성영화에서 조선말 사용을 금지시킨 1939년 이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과도기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극중 영화인 <춘향전>의 대사는 모두 한국어로 처리되지만, 카메라 뒤에서 감독과 스탭은 일본어로 대화하고 주인공들의 사적 대화는 한국어인데 제작사 간부들의 회의는 일본어로 진행되는 식이다. 1930년대 중반에 만들어진 <미몽>의 다분히 연극적인 연기 스타일과 비교해서 좀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배우들의 연기도 눈에 띈다.

<조선해협> 박기채/ 1943년/ 35mm/ 흑백/ 75분
모든 대사가 일본어로 이루어졌고, 전사한 형의 영정 앞에서 일본군 지원을 결심하는 주인공 성기(남승민)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여러모로 당시 제작된 군국주의 어용영화의 전형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난해 있었던 수집발굴전에서 상영됐던 <군용열차>(1938), <지원병>(1941) 등 징용제를 옹호한 다른 영화들과 <조선해협>의 친일 정도는 다소 차이가 있다. 다른 영화의 주인공이 일본군에 지원함으로써 문제가 해결되거나, 그들이 황국신민으로서의 투철한 정체성을 자랑했던 것에 비해 <조선해협>에서 일본군 지원은 주인공 남녀의 사랑을 방해하는 형식적 장치에 그친다. 자신의 임신 사실을 성기에게 알리지 않았던 그의 동거녀 금숙(문예봉)과 성기가 결국은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는 과정이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치열하게 묘사된 전쟁신 등이 볼거리가 되어준다. 그러나 <미몽> <반도의 봄>에 비해 영화적 스타일 면에서는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 조선해협을 사이에 두고 일본과 한국에서 두 남녀가 시도하는 극적인 전화 통화 이후 이어지는 해피엔딩은, ‘최고의 반전(?)’으로 꼽힐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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