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티크베어가 연출한 <천국>(2002)은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와 그의 동료 작가 크지슈토프 피시비츠가 쓴 시나리오로 만들어진 영화였다. 키에슬로프스키는 ‘세 가지 색 연작’에 이어 <천국> <지옥> <연옥>으로 이뤄질 또 다른 매혹적인 3부작을 세상에 내놓을 생각이었으나 때이른 죽음은 그에게 더이상의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더불어 진지한 영화 관객의 기대 하나도 앗아가버린 그의 죽음이 오는 3월13일이면 벌써 10주기를 맞이한다. 3월3일(금)부터 16일(목)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최근 영화사의 한 안타까운 이별로 남을 사건을 추념하는 행사가 열린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과 ‘세 가지 색 연작’을 상영하는 ‘서거 10주기 기념 키에슬로프스키 특별전’은 영화라는 물리적 매체로 가시적 영역 너머에서 작동하는 삶의 불가해한 힘들을 사유하고자 했던 한 시네아스트의 노고와 재능을 되돌아보게 해줄 것이다. 아울러 ‘프랑스 누벨바그 특별전’ 프로그램도 함께 진행되는데, 현대영화를 잉태한 영화들 중 하나로 꼽히는 로베르 브레송의 <소매치기>부터 장 뤽 고다르의 가장 사랑받는 영화인 <미치광이 피에로>까지 6편의 영화가 상영될 예정이다.
추천 상영작
<연인들> Les Amants/ 1959년/ 90분/ 흑백/ 감독 루이 말/ 출연 잔 모로, 장 마르크 보리
<데미지>(1992)로 논란을 일으켰던 루이 말은 그 이전에도 스캔들을 일으킨 영화를 만들곤 했었다. 어린 매춘부가 나오는 <프리티 베이비>(1978)나 근친상간을 가볍게 다룬 <심장의 속삭임>(1971)이 그런 영화들이었는데, 그것들보다 훨씬 앞서서 논란을 불러온 것이 <연인들>이다. 숨막히는 부르주아 가정을 벗어나 열정이 있는 삶을 향해 ‘불확실한 여행’을 감행하는 여인 잔느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는 개봉 당시 비도덕적이라는 이유로 종교계의 격심한 반발을 샀다. 하지만 젊은 관객과 평자들은 <연인들>에서 쾌락의 아름다움을 찾는 것의 순수함을 포용하면서 이 ‘동시대적인’ 영화를 열렬히 끌어안았다. 에릭 로메르가 당대 프랑스 영화사에서 중요한 영화라 평가한 <연인들>은 장 르누아르와 클로드 샤브롤을 잇는 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클레르의 무릎> Le Genou de Claire/ 1970년/ 110분/ 흑백/ 감독 에릭 로메르/ 출연 장 클로드 브리알리, 베아트리스 로망
에릭 로메르는 1960년대 초반부터 약 10년 동안 자기 앞에 나타난 ‘욕망의 대상’을 두고서 선택의 문제로 내적인 싸움을 벌이는 남자의 이야기를 변주해가며 여섯편의 ‘도덕 이야기’를 만들었다. <클레르의 무릎>은 그 연작의 다섯 번째 영화로 앞선 작품인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과 함께 연작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기도 하다. 이번의 주인공은 결혼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홀로 휴가를 보내는, 그래서 일종의 ‘과도기’에 놓인 중년 남성 제롬이다. 영화는 그가 10대 소녀 클레르의 무릎에 강박적으로 탐닉하면서 흘러가는 이야기를 화면 위에 펼쳐놓는다. 로메르의 영화답게 미묘한 에로티시즘의 공기가 풍기는 이야기 속에서 ‘만남’은 욕망과 서스펜스와 위험을 함께 생성하며 그로부터 삶이 품은 수수께끼의 편린이 드러난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Le Double vie de Veronique/ 1991년/ 98분/ 컬러/ 감독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출연 이렌 야콥
폴란드에 사는 여성 베로니카가 말한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요… 이 세상에 나 혼자가 아니라는….” 그녀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베로니크라는 프랑스 여인은 자신에게 갑자기 원인도 모를 슬픔이 찾아든 것을 느낀다. 서로 만난 적은 없지만 동일한 특성과 자질들을 공유하는 이 두 여인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영화는 이런 수수께끼를 던지며 보는 이들에게 정체성과 세상의 구조의 문제에 대한 사유를 자극한다. 영화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 우리는 운명, 우연, 병렬 등의 요소가 삶의 작동 원리임을 보여주는 불가해하게 아름다운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그렇다고 여기서 무언가 ‘해답’이 주어지는 건 아니지만 거기엔 배회한 것 자체가 삶과 존재에 대한 꽤 풍요로운 사유의 체험이 되게 하는 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