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돈 컴 노킹>의 샘 셰퍼드 [1]
2006-03-07
글 : 이다혜

근친상간, 유골단지, 정신병에 걸린 아버지/아들, 신경쇠약에 걸린 어머니/딸, 창밖의 황량한 풍경, 근친 살해, 엽총, 사냥, 가출, (환영받지 못하는) 귀환, 부모의 과오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아이들, 폭력적 아버지/아들, 알코올 중독, 죽은 식물이나 동물.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이 단어들로만 현대 미국사회의 황량함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은 남자가 있다. <파리, 텍사스>의 대본을 썼고 <사랑과 슬픔의 여로> <돈 컴 노킹>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샘 셰퍼드가 바로 그다. 뿐만 아니라 셰퍼드는 1960년대부터 뉴욕 오프 브로드웨이를 사로잡은 희곡가다. 수많은 서부의 비극으로 남을 사내, 샘 셰퍼드의 삶과 연극, 영화 이야기. 그는 왜 자꾸 서부로 뛰어드는가, 혹은 서부에서 탈출하는가.

사막의 모래알처럼 깔깔한 목소리, 몇 세기에 걸쳐 풍화된 듯 적막한 표정, 침묵이 어울리는 꼭 다문 턱선, 삐죽거리는 치열을 가진 샘 셰퍼드를 주목하게 하는 것은 그의 눈이다. 그 안에 품고 있는 게 그저 물인지 눈물인지는 모르지만, 사막에나 어울리는 선인장처럼 잔뜩 날을 세운 눈빛은 그를 기어이 기억하게 만든다. 그의 얼굴을 기억한다는 것은, 어쩌면 오래전에 당신의 마음을 흔든 충격에서 비롯하는 추억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딸인지도 모르고 비극적 사랑에 빠져버린 남자를 연기한 <사랑과 슬픔의 여로>의 샘 셰퍼드는 잘생겼지만 비극의 그림자를 드리운 중년의 사내였다. 그를 <블랙 호크 다운> <스텔스> <삼나무에 내리는 눈>를 통해 그저 인상적인 조역으로 기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쪽이어도 상관없다. <돈 컴 노킹>의 샘 셰퍼드는 그 어떤 선입견에도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황량한 미국 서부가 인격화된다면 <돈 컴 노킹>의 하워드가 될 것이다. 아무것도 살 수 없는, 한때 환상이 가득했지만 불모지로 남은 그 땅을 샘 셰퍼드는 체화해 보여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돈 컴 노킹>의 대본과 현대 서부를 배경으로 한 수많은 연극 각본을 써온, 생존하는 최고의 미국 현대 희곡작가중 하나이므로.

“이봐, 어린 친구! 네 아버진 밤낮 돈을 꿔. 늘 돈을 꾸는 얼간이지. 자동차 할부금, 사막에 있는 토지…. 항상 무슨 얼간이 같은 일을 꾸미고 있어. 그저 이번엔 너무 오래 되는 대로 내버려둔 거야. 그뿐이다.” ­ <굶주리는 층의 저주>

<파리, 텍사스>
<돈 컴 노킹>

샘 셰퍼드는 최고의 오프 브로드웨이 연극에 대해 시상하는 오비상을 11차례나 수상한 희곡작가다. 특이할 만한 것은, 그가 작품에 담는 인물들이, 배경이 엇비슷하다는 것이다. 기발한 소재를 가지고 매번 다른 이야기를 써내는 게 아니라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삶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그가 쓴 영화 각본 중 가장 유명한 <파리, 텍사스>와 개봉을 앞둔 <돈 컴 노킹>만 봐도 유사점이 눈에 띈다. 서부는 사람이 오래 살지 않은 폐허처럼 싸늘함만을 안겨주며, 가족은 안식처가 아니라 붕괴된 지 오래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오면서 문제가 시작된다. 결국 남자는 혼자 떠난다.

오프 브로드웨이 최고의 스타작가

그의 이야기들은 공상의 산물이 아니다. 1943년 11월5일 미국 일리노이주의 한 군부대 근처에서 태어난 셰퍼드의 아버지는 2차 대전 당시 전투기 조종사로 활약했다. 그에게 새뮤얼 셰퍼드 로저스 3세라는 거창한 이름을 지어준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으며 폭력적이었다.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가족은 자주 이주해야 했다. 미국의 곳곳, 그리고 괌과 필리핀을 거쳐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은 로스앤젤레스 동쪽의 시골 듀아트였다. 전쟁은 끝났고, 가족은 식물과 동물과 술에 취한 아버지를 상대해야 했다. 듀아트는 이후 셰퍼드 가족의 고통을 담은 자전적 희곡 <굶주리는 층의 저주>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십대의 셰퍼드는 농장에서 아보카도를 재배하고 양을 키웠으며, 로스앤젤레스 농산물 박람회에서 직접 키운 숫양으로 입상하기도 했지만 그가 속한 소도시는 도시화 바람을 타고 붕괴 일로에 있었다. 대학에서 농학을 공부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가 우연히 새뮤얼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지 않았다면, 잭 케루악과 같은 비트 세대 작가들의 책을 즐겨 읽지 않았다면, 그는 희곡을 쓰는 대신 술이 든 종이봉투를 겨드랑이에 끼고, 그가 창조해낸 희곡 속의 무력한 남자들처럼 나이를 먹어갔을지도 모른다. 그의 아버지처럼.

<마음의 거짓말> 연극공연

듀아트를 떠난 셰퍼드는 스무살에 뉴욕에 안착했다. 제너시스 극단의 설립자인 랠프 쿠크를 만난 그는 이름을 샘 셰퍼드로 바꿨다. 쿠크의 제안으로 오프-오프 브로드웨이를 위한 희곡을 썼다. 1년 뒤인 1964년 가을, 셰퍼드가 쓴 <카우보이>와 <바위 정원>이 무대에 올랐다. <빌리지보이스>를 비롯한 평단의 혹독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글을 썼다. “비평가들이 하는 말은 내게 중요치 않다.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활동해온) 내게 있어 브로드웨이는 그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셰퍼드의 이름이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은 66년, 그의 세 작품 <시카고> <이카루스의 어머니> <붉은십자가>가 오비상을 받으면서였다. 67년부터 그는 록펠러 재단의 보조금을 받았는데, 같은 시기에 ‘홀리메달라운더즈’라는 록그룹을 결성, 드러머로 활동하기도 했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거나 하고 싶은 게 아주 없는 아이처럼, 그는 닥치는 대로 글을 썼고 음악을 했으며 각성제와 마약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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