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충무로 日流 열풍 [1]
2006-03-09
글 : 이성욱 (<팝툰> 편집장)
일러스트레이션 : 헌즈

<파이란>의 원작이 일본 소설이고, <올드보이>의 원작이 일본 만화이며, <내 머리 속의 지우개>의 원작이 일본 드라마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쩌다 뿌리가 닿았다고 열매의 시큼달콤한 맛과 꽃의 향기에 시비를 걸 수 없다. 어느덧 그 뿌리에 젖줄을 대려고 경합하는 충무로의 모습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일본 판권 확보 경쟁과 이에 따른 가격 상승의 풍경은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입도선매하려는 한때의 한류 열풍과 닮은 구석이 있다. 그러니 이를 두고 일류(日流)라 이름 붙여도 이상할 게 없다. 충무로의 일류 현상을 불러온 이유는 무엇이고, 그 기대효과는 어떤 것일까. 섣부른 판단이 곤란한 진행형 흐름이나 산업과 텍스트 양면에서 중간점검을 해본다.

일본 아사다 지로 원작, 홍콩 장백지 출연의 ‘선구적인’ 범아시아프로젝트 <파이란>이 성공했던 2000년대 초반의 풍경 두 가지. 하나, 일본 프로듀서가 박찬욱, 김지운, 정지우 세 감독에게 동시에 같은 제안을 넣었다.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한국에서 영화를 만들고, 동시에 일본에선 한국 만화를 원작으로 일본 감독이 영화를 만들자는 기획이었다. 세명의 감독이 입맞춘 듯 똑같이 지목한 일본 만화는 SF물 <기생수>.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빛을 보지 못했다. 제임스 카메론이 이미 <기생수>의 판권을 사들인 뒤였다. 둘, 당시 신생영화사였던 제네시스는 일본 만화 <미녀는 괴로워>에 눈이 솔깃했다. <슬램덩크>처럼 흥미롭다 싶으면 수십권으로 이어지는 경우와 달리 다섯권의 짧은 호흡이어서 극화하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한 데다가 여자배우 원톱이어서 캐스팅도 무난해 보였다. <엽기적인 그녀>처럼 전복적인 여성 캐릭터라는 점이 특히 매력적이었다. 줄이 닿겠지 싶어 라이선스로 국내 출판을 했던 서울문화사에 말을 넣었다. 당시만 해도 판권 확보 경쟁은 상상하기 힘든 때라 ㅈ영화사와 ㄱ감독이 에이전시를 통해 고단샤와 판권 구매 협의를 벌이던 중이란 건 나중에 알았다. 서울문화사의 계약서에 한줄 적혀 있던 우선권 부여 문구로 순조롭게 판권을 따냈다.

현재 제작영화 10% 이상 일본콘텐츠가 원작

이 두 가지는 일본 원작에 대한 수요가 최근의 일이 아니며, 한-일간의 국지적인 현상도 아니라는 점을 예시한다. <올드보이>의 성공 이후에는 ‘웬만한 일본 만화는 실시간으로 들어오는 만화방이 연대 앞에 있다. 웬만한 프로듀서는 거기서 다 만날 수 있다’더라는 풍문이 충무로에 떠돌았다. 그리고 지금, 소설과 만화 등 원작을 일본에서 가져온 10여편이 촬영 개시를 기다리고 있다. 판권 계약을 마쳤거나 각색 중이긴 하나 지면으로 공개하기에 아직 이르다는 작품이 또 그만큼이다. 연간 제작되는 한국영화의 10% 이상이 이야기와 소재를 일본에서 공수해오고 있다는 이야기다.

<올드보이>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사실, 영화로 재가공할 이야기 보따리를 일본에서 꾸리려는 현상은 이상하지 않다. 재패니메이션을 선두로 한 소프트웨어 개발의 오랜 역사도 그렇거니와 인구 수와 경제력에서 시장 규모가 절대적으로 큰 만큼 장르의 다양성과 자생력이 강력하고 풍성하다. 또 대중문화의 자양분에 내용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자본주의 발달사와의 관계를 빼놓을 수 없는데, 이는 기호와 취향에 대한 강한 흡인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소설의 경우 사회성 짙은 전후문학이 70년대를 끝으로 저물고 80년대 이후 사소설의 현대적 경향이 주류를 차지했다. 한국의 소설계는 90년대 중반 이후 사소설적 경향을 본격적으로 띠기 시작했다. 선진 자본주의의 소비 패턴이 시기적으로 앞서고 일상적으로 녹아들어간 일본 소설이 상대적으로 신선도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일반적 관찰보다 의미있는 산업적 고찰은 시장 통합 효과에 대한 기대에 있다. 한국영화의 일본시장 의존도가 가파르게 올라가는 시점에서 충무로의 기획·제작력으로 재가공해 일본시장에 효율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 드라마를 원작으로 한 <내 머리 속의 지우개>를 원자재로 들여와 국내에서 생산, 성공을 거두고 일본시장으로 되돌아가 다시 홈런을 치는 경우다. 한·일 영화교류의 중요한 창구 구실을 해온 이봉우 씨네콰논 대표는 충무로의 일류(日流) 현상에 대해 “원래 일본에 대한 관심이 높은 데다가 <올드보이>와 <내 머리 속의 지우개>의 성공이 박차를 가한 것 같다”며 일본 원작의 영화화를 단순히 소재나 줄거리를 구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일본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또 다른 전략이자 두 문화권의 교류로 바라보는 접근법에 대해선 “당연하고 합리적”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작가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것이 곧 일본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므로 어떻게 한국적인 정서를 담는가가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판권 경쟁 나날이 치열…일본에 뺏기기도

2월21일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사 ‘GONZO’를 그룹 내 기업으로 가지고 있는 (주)GDH와 영화, 애니메이션, 드라마 및 DVD 시리즈 제작 등에서 상호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MK픽처스의 심재명 대표는 “일본과의 관계가 과거처럼 다 만들어놓고 수출입하는 게 아니라 만들기 전부터 교류를 시작하는 콘텐츠의 교호 제작, 펀드의 공동제작이 좀더 선진적이고 적극적인 형태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MK픽처스는 액션하드보일드 소설 <상흔>의 판권을 일본쪽에 그대로 둔 채 공동 제작 형태로 시나리오를 ‘업그레이드’하고 있으며, <쉬리>를 TV와 DVD용 시리즈로 만들자는 일본쪽 제안을 검토 중이다.

이 틈에, “지인들의 부탁으로 판권을 몇번 알아봤는데 이미 죄다 팔렸더라. 충무로의 싹쓸이 경쟁에 가격이 꽤 올랐다”(영화사 봄의 오정완 대표)는 이야기는 구문처럼 돼버렸다. 시장에선 충무로 내부가 아닌 일본 내부의 제작자들과 치열하게 경합 중이다. <니키타>의 만화버전이라 할 SF멜로 만화 <최종병기 그녀>의 경우 ㄴ영화사에서 ㅂ감독에게 맡겨 시나리오까지 써놓았건만 2년간의 오랜 경쟁 끝에 일본 제작사에 판권을 놓치고 말았다. 아사다 지로의 소설 <안녕 내 소중한 사람>이 국내 출판된 지 두달이 채 안 돼 계약 요청을 넣은 국내 제작사는 다섯 군데가 넘었으나 이 작품의 판권도 일본 안에서 사라졌다. 배우가 먼저 읽고 제작자에게 추천한 호러멜로 소설 <사랑, 사라지고 있습니다>는 영화사 집의 이유진 대표가 “컨셉이 좋아서” 바로 접촉을 했으나 이미 일본 영화사와 협상 중이었고 결국 공은 다시 넘어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