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째: 5월24일
홍콩 스탭은 한국말로, 우리는 만다린이나 광둥어로 인사를 한다. 슬슬 서로를 이해하고 더 알아가려 하는 것 같다.
골동품 가게를 찍은 뒤 광장으로 옮겨 총격신의 잔여 촬영을 했다. 성재 형(정우)이 내(박의)가 쏜 총알을 어깨에 맞은 뒤 계단에 넘어지고 총을 쏘며 다시 올라오는 장면이 멋지게 찍혔다. 촬영 중 내리기 시작한 가랑비로 감독님이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신 때문에 스탭들이 한바탕 정신없이 뛰어다닌다.
19일째: 5월 30일
이틀 전 시내의 한 중식당에서 진짜 킬러가 식사를 하던 남자를 총으로 쏘고 사라진 사건이 있었다. 진짜 킬러가 있는 곳…. 오늘은 극장과 호텔에서 박의가 살인을 하는 두신을 찍었다(각주: “내가 실제 킬러가 있는 도시 암스테르담에서 킬러 역을 하고 있구나, 생각했지요. 특히 킬러 사건이 난 이후 스탭들이 그 시간에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캐묻는 등 꽤 재밌는 에피소드였습니다. 실제 킬러 박의로 생활하고 싶었던 나에게 꽤 인상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내가 맡은 캐릭터에 더욱 빠져들 수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20일째: 5월31일
저녁 시간 카페로 자리를 옮겨 박의와 혜영 신을 촬영했다. 카페 이름 ‘1900’. 말 그대로 1900년에 개업한 카페다. 작은 평수에 작은 테이블들이 촘촘히 놓여 있는 이곳 역시 시간이 배어 숨쉬고 있다. 실내 촬영을 하던 중 어느새 카메라를 밖으로 옮겨 박의가 뛰는 장면을 촬영했다. 몇번 뛴 뒤 다시 실내로 들어와 실내 촬영을 계속했다. 그야말로 다음 컷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감독님 말고는…. 난 그저 눈치껏 순발력 있게 대응할 뿐이다.
23일째: 6월3일
혜영 스튜디오. 정말 하늘이 돕는 건지 비 신을 찍어야 하는데 진짜 비가 내린다. 그것도 장대비가. 스튜디오는 3층에 보통 건물 6∼7층 높이여서 비가 안 왔다면 그냥 보통 날씨의 분위기로 찍어야 했을 것이다. 조감독 데이빗이 “감독님, 진짜 비가 오는데요” 하니 감독님은 미리 알고 스케줄을 정했다는 표정이다^^(각주: “운명에 관한 영화를 찍으면서 더욱 ‘운명’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고 할까요. 공교로운 상황이 여러 번 반복되니깐 무서웠어요. 하지만 유위강 감독님의 그 여유. 마치 날씨 변화를 알고 있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말씀하시는 그 모습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중요한 감정 신들이기에 오늘도 카메라 두대로 찍어나갔다. 며칠 전 프로듀서 앨런이 “감독님, 필름을 너무 많이 쓰는데요” 하며 제작비에 대한 염려로 경고를 하자 감독님은 “So What!”으로 답을 했다고 한다. ^^
지현은 리허설부터 감정이 오르기 시작하고 두번 정도의 리허설을 한 뒤 오늘의 첫 번째 신을 간단히 끝냈다. 오늘의 두 번째 신. 이번에도 리허설부터 지현은 감정이 북받쳐오른다. 혜영과 정우, 박의 세 사람의 감정의 엇갈림. 우리 영화에서 처음으로 한 공간에서 세 사람이 만나는 장면이다. 세 사람 모두에게 굉장히 중요한 감정 신이다. 열심히 한 만큼 좋은 장면이 되길…. 그리고 관객도 동감할 수 있는 장면이 되길 바란다. 촬영이 시작된 뒤 처음으로 자정을 넘겨 끝냈다.
26일째: 6월6일
조 사장 사무실(각주: ‘펠릭스 메리티스’라는 18세기 건물로, 벽돌 하나하나가 거의 박물관 유적급으로 인정받는 곳에서 촬영됐다. 실제 연극인들이 연기 연습을 하기도 한다). 날씨가 어제부터 쌀쌀해졌다. 조 사장은 ‘외팔이’ 시리즈로 유명했던 강대위(각주: ‘깡따위’라는 이름으로 홍콩 무협의 60, 70년대 전성기를 이끈 홍콩영화의 배우 겸 감독. <데이지>로 오랜만에 스크린에 컴백한다)가 맡아주셨다. 아저씨는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인상에 단단하면서도 중후한 모습을 지닌, 여유 있으면서 자상한 분이셨다. 중국어(만다린) 대사를 주고받으려니 긴장이 됐다. 성조를 맞춰야 한다는 부담감이 연기에 장애가 된다. 이왕 하는 거 잘하고 싶은 욕심도 있고…. 사무실은 연기아카데미 건물로 중앙에 있는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이어지는 구조인데 1층에서 건물 천장이 올려다 보인다. 아저씨는 역할에 맡게 자상한 가운데 사악함이 살짝 드러나는 연기를 보여주셨고 역시 베테랑임을 입증해 보이셨다. 드라마 신을 전부 찍었는데 짧지만 굵은, 아주 마음에 드는 장면들이 나올 것 같다.
27일째: 6월7일
날씨는 여전히 쌀쌀하다. 오후 4시 집합이라 아침에야 잠이 들었더니 컨디션이 최악이다. 액션 신을 찍어야 하는데…. 촬영은 중앙 계단과 복도를 이용해 이루어졌다. 천장에 설치한 도르래와 와이어를 이용해 카메라를 매달고 카메라 D.P. ‘만쳉’이 매달리니 네덜란드 현지 스탭들이 감탄을 한다. 흐뭇하다. ^^ 감독님은 총격전의 시작을 박의의 그림자와 위층에서 떨어지는 성모상, 그것을 쏘는 박의로 설정하셨다. 뜬끔없지만 멋은 있을 것 같다. 디온이 디자인한 움직임으로 계단을 올라가며 나오는 졸개들을 쏘고 피하고 하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열심히 했는데 컨디션이 안 좋아 몸이 무겁기만 하다. 쩝, 멋지고 총이 잘 어울리는 모습이어야 할 텐테…. 내일은 더 열심히 해야겠다. 참, 뛰고 구르는 건 오늘 다 끝냈구나. 아쉽다. 감독님은 내가 무릎 보호대를 하는 걸 보고는 “그런 거 왜 해!?” 하는 식으로 보고는 틈만 나면 “괜찮냐”고 묻는다. ^^
28일째: 6월 8일
조 사장 사무실. 어제보다는 가벼운 컨디션으로 계단과 복도에서의 총격 신과 사무실 안에서 조 사장과의 대치 그리고 스턴트 위주의 촬영을 했다. 네덜란드 현지 스탭들은 이번 3일간의 촬영으로 완전히 우리 <데이지>를 인정하는 것 같다. 조 사장과의 대치에선 한국어와 만다린 두 버전으로 찍었다. 감독님은 한국말이 듣기 좋다고 한다. 박의의 감정이 독백식의 혼잣말을 할 수도 있고 조 사장을 진심으로 대하고 싶어하는 느낌인 것 같아 내가 제안을 했고 감독님께서 흔쾌히 받아들여주셨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이라 그런지 찍고 나니 약간의 허무감이 들었다. 강대위 아저씨의 촬영분은 이렇게 3일로 끝났고 토요일 홍콩으로 돌아가신다고 한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연기하면서 교감은 컸던 것 같다. 해는 조금 더 길어져 11시나 되어야 어둠이 덮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