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이연걸을 만나다 [1]
2006-03-20
글 : 김수경
사진 : 오계옥

불혹을 넘긴 이연걸과 인터뷰하며 처음 느낀 감정은 당혹감이었다. 내면과 자기수양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그에게 <황비홍> <동방불패>, 할리우드, 무술연기에 관해 묻는 것은 마치 스님에게 속인의 궁금증을 캐묻는 것처럼 어색하게 느껴졌다. <무인 곽원갑> 이후 전같은 액션영화는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도 속세의 삶에 거리를 두려는 심경 때문이리라. 정통파 무술배우 이연걸의 궤적을 새삼 훑어보는 이유는 이러한 결단이 평생 그를 지배한 일에 대한 성실함과 인간에 대한 겸손함의 산물처럼 보여서이다. 행동하는 액션스타에서 성찰하는 배우로 거듭나려는 이연걸을 말한다.

이소룡이 전설처럼 사라져간 ‘전신’이라면 이연걸은 살아 숨쉬는 우아한 ‘구도자’다. 과거 이소룡의 인기는 할리우드에 안착한 성룡의 몫이다. 하지만 무림고수 이소룡의 적통은 무술가 이연걸이다. 이연걸은 올해로 마흔세살이 됐고, 이소룡은 같은 나이였던 1974년 여름 세상을 등졌다. 신작 <무인 곽원갑>과 함께 10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 이연걸은 주름살이 실루엣처럼 드리워진 얼굴로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그는 “내가 생각하는 무술의 철학과 목적을 비롯한 모든 생각은 <무인 곽원갑>을 통해 전부 이야기했다. 내가 말하고자 했던 무술에 관한 이야기는 모조리 쏟아내서 앞으로는 더이상 보여줄 것이 없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무술은 우리에게 뒤돌아볼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길이 정해지면 나아갈 뿐”이라던 이소룡과 달리 “무술은 결국 자기 자신과의 싸움일 뿐”이라고 말하는 이연걸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걸까. 시대물의 이연걸은 고요하고 단아하다. 우아하게 손을 내저으며 경고하거나 옷자락을 걷으며 조용히 대결의사를 밝히는 <황비홍>의 태도에는 부드럽지만 단호함이 담겨 있다. 그곳에는 웃통을 벗고 기성을 토하며 상대에게 절대적인 위압감을 행사하는 이소룡과는 전혀 다른 투지가 존재한다. 이소룡이 “6초 안에 상대를 쓰러뜨리는” 땅에 발을 디딘 자신감이라면, 이연걸은 “경쟁의 시간은 내게서 이미 지나간 지 오래”이므로 “나의 상대는 나일 뿐”이라는 초월적 존재다. <소림사>에서 <무인 곽원갑>까지 이연걸이 그려온 중국의 무술영웅들은 이런 그의 생각이 반영된 걸로 보인다. 이소룡이나 성룡과 다른 이연걸만의 카리스마는 어떻게 만들어졌던 것일까.

<소림사> _ 무술신동, 스크린에 발차기하다

8살에 우슈를 시작한 이연걸은 9년간 매일 8시간 이상 무술을 수련했다고 한다. 온몸에 피멍이 들고 손가락뼈가 부러지고 관절이 으스러지는 혹독한 수업을 견뎌냈다. 11살이 된 이연걸이 1974년 전국무술대회 소년부에서 우승, 다음해 성년부에서도 우승하자 수업의 강도는 더 높아졌다. 현 중국무술원 오빈 원장은 이연걸을 문혜풍, 계향, 이자명 등 중국 무술 원로 5인방에게 맡겨 특별수업을 마련했다. 이후 전인미답의 중국무술대회 5연패를 성취한 이연걸은 17살에 영화계로 진출했다. 1973년 이소룡이라는 별이 사라진 뒤 대형 스타를 고대하던 홍콩 영화계는 그를 <소림사>의 주인공으로 발탁했다. 이연걸은 무술을 시작할 때처럼 담담히 영화에 도전했다.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무술에 입문했듯이, 영화도 그렇게 시작됐다”고 그는 말한다. 어린 시절을 다 바친 무술 수업에 대해서도 “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해 10년 넘게 연습하는 다른 운동선수들처럼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훈련이 나에게도 특별한 선택은 아니었다”고 덧붙인다.

<소림사>
<소림사>

이연걸의 데뷔작 <소림사>는 무술감독 없이 촬영된 영화다. 장신염 감독은 현장에서 캐릭터에 관해서만 설명했다. 배우 이연걸과 학교 친구들이 모든 액션장면을 중국체육학교에서 배운 경험으로 고안해냈다. 촬영이 1년 넘게 소요됐고 그들은 얼음이 둥둥 떠 있는 황허강에 몸을 던지기도 했다. 특히 마지막에 촬영한 강둑 결투 장면은 보호장구 하나 없이 허난의 살을 에이는 날씨 속에 4일간 계속됐다. 이연걸은 “마지막 촬영을 끝내자 손가락이 하나도 펴지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후속작 <소림사2: 소림소자>에서는 반대로 더위가 말썽을 부렸다. 이연걸이 무술학교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토대로 이야기를 구성한 <소림사2: 소림소자>는 항저우에서 촬영됐다. 평균 40도의 여름을 거쳐 촬영은 8개월 동안 진행됐다. 참을성은 이연걸에게는 신체의 일부와도 같았다. 9년 동안 혹독한 중국체육학교의 수업을 견딘 이연걸에게 영화현장의 혹독한 날씨나 촬영조건은 대수롭지 않았다.

<소림사3: 남북소림>에서는 프로덕션의 문제가 불거졌다. 문제의 발단은 대륙 스탭과 홍콩 스탭에 대한 차별이었다. 대륙 스탭들은 스티로폼에 담긴 점심을 먹는 동안 홍콩 스탭들은 홍콩에서 조달된 케이터링 서비스를 받았다. 무술연출에도 기여한 주연배우 이연걸보다 조연으로 출연한 홍콩 배우들의 급여가 훨씬 높기도 했다. 일출을 찍기 위한 촬영에서 갈등은 폭발했다. 새벽 2시부터 이연걸을 포함한 모든 대륙 스탭들은 현장에서 대기했다. 10시쯤에 모습을 드러낸 감독은 “조명이 잘못됐다”며 촬영을 연기했다. 이연걸은 프로듀서에게 항의하며 감독의 사과를 요구했다. 이 사건으로 이연걸은 영화계를 떠날뻔했다. 다행히도 홍콩의 한 영화사가 영화연출을 제안하며 이연걸은 다시 영화로 돌아왔다. 칭다오와 산둥에 세트가 마련되고 촬영에 돌입한 그의 감독 데뷔작은 지금까지 이연걸의 유일한 연출작이기도 한 <중화영웅>이다. 스물세살의 이연걸은 <무인 곽원갑>의 청년 곽원갑처럼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열정이 강했던 불같은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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