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비홍> _ 액션영화의 ‘진맛’을 처음으로 맛보다
이연걸에게 진정한 도약이 된 영화는 널리 알려진대로 <황비홍>이다. <황비홍>에 대해 이연걸은 “좋은 액션영화를 만들기 위한 감각을 알려준 영화”이며 “격투장면이 관객에게 어떻게 보여지는지를 처음 깨달았던 계기”라고 설명한다. 그는 “이전까지는 액션장면을 구성하고 연기하기에 주력했고, 그것이 어떻게 보여질지는 그다지 고민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액션장면을 상의하려고 집으로 찾아온 이연걸에게 서극이 보여준 자료는 자연다큐멘터리였다고 한다. 사자가 먹이를 잡는 과정을 보여준 서극은 “우리 액션장면은 이렇게 진행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의아해하던 이연걸은 반복해서 그 장면을 살펴보면서 “순식간에 일어나는 폭력 이전에 고요함이 주는 긴장”을 마음속에 새겼다. 불과 바람이 일렁이고 두 인물이 합을 겨루기 전에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황비홍>의 마지막 격투장면은 그렇게 탄생했다.
<황비홍>의 성공은 시리즈로 나온 후속편과 <동방불패>로 이어졌다. <동방불패>의 영호충은 이연걸이 배우 인생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캐릭터였다고 한다. 촬영 내내 영호충을 납득하지 못했던 이연걸은 정소동 감독에게 끝없이 캐릭터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다. 이것은 이연걸이 생각하는 영화의 본질과 맞물리는 사례다. 이연걸은 “사람들은 영화를 허구라고 쉽게 말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진실된 것을 관객에게 1시간 반 동안 보여주고 설득하는 일이 영화라고 나는 생각한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한때 홍콩에서 양산된 코미디물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관심도 없고 향후에도 작업을 고려한 바 없다”고 밝혔던 일도 같은 맥락이다. 다섯명의 여인과 어울리며 노래를 부르는 바람둥이 무사 영호충은 이연걸이 연기한 캐릭터 중 가장 쾌활한 인물이다. 정소동, 당계례, 마옥성 등 당대의 무술감독들이 총집결한 <동방불패>는 서극의 각본과 황점의 음악이 어우러져 <황비홍>과는 또 다른 홍콩무협의 영역을 개척했다. 이연걸은 “영화의 대성공에도 내가 캐릭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괴로웠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흑협> _ 할리우드의 문을 두드리다
이연걸은 도전의 즐거움만큼 많은 상처를 입었다. <소림사>에서는 다리가 부러졌고, <소림사2: 소림소자>에서는 목관절 손상, <소림사3: 남북소림>에서는 등관절 손상, <중화영웅>에서는 코뼈가 부러졌으며, <용행천하>에서는 손목관절을 다쳤고, <황비홍>에서는 왼쪽 발목과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다행히 “무술과 영화를 좋아하는 한 가능한 지점까지는 해보겠다”고 결심한 이연걸에게 이후 큰 부상은 없었다. <황비홍> <동방불패>를 끝낸 이연걸은 1992년 <황비홍2: 남아당자강>을 시작으로 3년간 11편에 출연했다. 그는 <방세옥> 시리즈를 함께한 원규 감독과 <보디가드> <영웅> 등의 현대물에 재도전하고 흥행에서도 성공을 거둔다. 1996년작 <흑협>은 <매트릭스> <킬 빌>의 원화평 무술감독이 홍콩에서 마지막으로 무술을 설계한 액션영화다. 미국 아티잔영화사는 더빙과 특수효과를 보완해서 <흑협>의 미국 극장 개봉을 감행한다. <흑협>은 후일 이연걸이 <리쎌 웨폰4>로 미국에 진출하는 기반으로 작용했다.
할리우드 진출에 관해 이연걸은 “오디션을 받고 필요한 일을 하나씩 배워가며 나만의 생존방법과 영역을 만들어내려 노력했다. 모든 걸 처음 배우는 학생의 마음으로 임했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 개봉 당시 팬들의 원성으로 이연걸에 대한 광고 문구를 집어넣는 해프닝이 발생했던 <리쎌 웨폰4>로 할리우드에 입성했고 이후 <로미오 머스트 다이>와 <더 원>에서 주인공을 맡았다. 뤽 베송이 제작한 프랑스영화 <키스 오브 드래곤> <더 독>을 통해 다양한 합작영화의 참여를 모색했던 그는 2002년 중국 대작 <영웅>으로 대륙으로 복귀한다. “<와호장룡>의 아류”라는 평단의 거센 비난에도 <영웅>의 도입부에서 견자단과 이연걸이 벌이는 격투장면은 당대의 액션 시퀀스로 팬들의 가슴에 남았다. 원화평에 의해 영화계에 입문한 견자단은 이연걸과 1963년 동갑내기이다. 두 사람은 중국체육학교에서 오빈 사부에게 동문수학했다. 두 실제 무술가가 <황비홍2: 남아당자강> 이후 오랜만에 벌인 격투는 영화적으로도 높은 성취를 끌어냈다. 대역을 쓰지 않는 촬영 환경과 절륜한 무술 실력이 어우러진 이 액션장면의 카메라워크는 인상적이다. 액션과 리액션으로 연결하기보다는 인물의 움직임을 극대화하는 수평적 프레임을 취한 화면구성은 격투의 긴장감을 제대로 담아냈다. “평화를 추구하는 액션영화이기 때문에 출연을 결정했다”는 이연걸은 이때부터 불교에 귀의하거나 영화계에서 은퇴한다는 소문에 휩싸였다.
<무인 곽원갑> _ 35년차 무인, 26년차 배우의 비망록
<무인 곽원갑>에는 이연걸의 자전적 요소가 강하게 드러난다. 영화의 젊은 곽원갑처럼 이연걸도 어린 시절에는 무술대회와 남들과의 대련에 신경을 곤두세웠을 것이다. 40대의 이연걸은 “나의 인생에는 불행도 행복도 없다. 다만 마음의 자유가 있을 뿐”이라고 강조한다. 그가 인생관이라고 칭한 <역경>의 ‘자강불식’(自彊不息: 스스로 최선을 다하고 멈추지 않는다)은 경쟁보다는 구도(救道)에 가까운 태도다. <무인 곽원갑>은 죽어가면서도 상대를 죽이는 살수를 스스로 거두는 자기 완성이 진정한 무술이라고 설파한다. 이연걸도 <무인 곽원갑>을 통해 기능적 무술의 화려함보다는 그런 무술의 내면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무인 곽원갑>을 기점으로 액션스타 이연걸은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그가 영화계를 떠날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좋은 감독의 제안이 있고 맘에 드는 배역이 있으면 당연히 출연한다. 다만 그것은 <무인 곽원갑> 같은 내 이야기가 아니라 영화 전체의 일부가 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연기는 계속하지만 과거 같은 액션영화는 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이연걸의 차기작으로 알려진 작품은 <제5원소> <키스 오브 드래곤>의 시나리오 작가 로버트 마크 케이먼이 개발중인 <뉴욕의 티베트 원숭이>(가제). 이 작품의 원래 아이디어는 이연걸이 제안했다고 한다. 이연걸은 <뉴욕의 티베트 원숭이>가 “액션없는 액션영화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스스로 무술이라는 트레이드 마크를 봉인한 액션스타 이연걸이 앞으로 어떤 방법으로 무술의 내면을 스크린에 보여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