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미리 보기 [1]
2006-03-21
글 : 문석

3월16일 개봉하는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은 놀라운 패기의 영화다. 지방도시의 한 섹시한 여성 교수와 그를 둘러싼 뭇 남성의 이야기를 그리는 이 영화는 주류영화의 화법과 거리를 두는 가운데, 일관된 스타일을 고집스럽게 추구한다. 초반부터 기묘한 앵글과 독특한 리듬감이 보는 이를 어리둥절하게 그리고 긴장하게 만드는 <여교수…>는 끝날 때까지 그 범상하지 않은 형식미를 고수한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사변적이나 관념을 앞세우는 ‘아트영화’는 아니다. 몸과 마음의 나사가 몇개쯤은 풀린 듯한 캐릭터들이 종횡무진 좌충우돌하는 이 영화는 소극(笑劇)에 가깝다. 물론, 웃음 그 자체만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코미디영화들과는 완전히 다른 노선을 추구하지만, 저열한 인간 군상이 빚어내는 희한한 호흡의 코미디는 심상치 않은 재미를 전해준다. 이 집요하면서도 능청스러운 영화는 ‘단편 영화계의 스타’ 이하 감독의 데뷔작이다. 포기와 타협을 통해 통과하기 십상인 상업 영화계의 문턱을 빡빡한 뚝심으로 정면돌파한 이 신인감독의 고집스런 영화를 만나보자.

이하 감독의 첫 장편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기다려온 영화다. 단편 <1호선>과 <용산탕>에서 보여준 섬세한 감정 묘사, 마이너리티에 대한 따뜻한 애정, 세상의 공기에 대한 범상치 않은 포착력 등이 상업영화라는 틀 안에서 어떻게 발현될지 궁금증을 자아냈기 때문이다. 일말의 우려도 있었다. 무엇보다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이라는 기이한 제목이 이하 감독 본연의 색채와 무관할지 모른다는 걱정을 불러일으켰던 것. 그러나 얼마 뒤 영화가 만들어지는 도중 간간이 흘러나왔던 소문은 안심도, 불안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시나리오 단계부터 촬영, 후반작업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들려왔던 소문의 내용은 ‘감독의 고집이 장난 아니더라’는 얘기였다. 신인감독의 제작현장에선 좀처럼 접하기 힘든 이 풍문은 결과적으로 영화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완성품으로 나타난 <여교수…>은 이 소문이 괜히 퍼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당연하게도 여교수 은숙(문소리)이다. 심천이라는 지방의 대학에서 염색을 가르치고, 지역 환경단체에서 일하는 그녀 주변에는 남자들이 파리떼처럼 꼬여 있다. 같은 환경단체에서 일하는 두명의 교수와 초등학교 교사 유 선생(유승목)이 그들. 하지만 은숙의 관심은 지역방송사 김 PD(박원상)에게 꽂혀 있다. 순탄치만은 않지만 그럭저럭 김 PD와의 행복한 로맨스를 즐기고 있는 은숙에게 갑자기 먹구름이 다가오니, 중학 시절 안 좋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박석규(지진희)가 심천에 등장한 것이다. 심천의 어느 대학에 초빙된 만화가 석규는 은숙네 환경단체의 의뢰를 받아 교육용 만화를 그리게 되면서 은숙과 대면한다. 그의 출현에 은숙은 한 친구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던, 중학 시절의 음란한 과거가 드러날까 두려움에 휩싸인다. 여기에 은숙과 석규의 관계를 오해한 유 선생이 질투심에 휩싸여 이들의 과거를 캐면서 불안은 고조된다.

배우들 동작 그만!…의도적인 낯설게 하기

이하 감독이 부렸다는 고집은 굳이 눈을 부릅뜨지 않아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영화의 초반부, 은숙은 같은 환경단체 활동가인 안 교수, 문 교수, 유 선생과 함께 술집에 앉아 있다. “안경은 내가 벗었는데 왜들 좋아서 난리예요?”(은숙), “아, 원래 여자가 벗으면 남자가 좋은 거지”(안 교수) 따위의 시답잖은 이야기를 꺼내는 인물들의 모습이 하나씩 등장하는데, 뭔가 이상하다. 술집 테이블 너머의 상대를 바라보는 인물들의 시선이 정면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맞은편을 바라보는 장면이더라도 약간은 측면을 바라봐야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법이거늘, 이 술집 속 사람들은 카메라 렌즈 부근을 쳐다보며 이야기를 한다. 인물들의 정면을 향한 시선은 영화 전편에 걸쳐 계속 등장한다. 가뜩이나 스크린 너머로 똑바로 쳐다봐서 이상한 느낌인데, 인물의 주변 또한 휑뎅그렁하다. 그러니까 인물이 소품이나 미술적 장치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썰렁한 공간 앞, 그것도 부담스럽게 정중앙에서 행동을 한다는 말이다.

“생소하게 보이도록 하자. 실수로 보이게만 하지 말자.” 이하 감독은 영화 촬영을 앞두고 최주영 촬영감독과 비주얼 컨셉에 관해 이렇게 합의했다고 한다. 인물들이 시종 정면을 쳐다보며 대화하는 것도 “영화에서 인물이 정면을 응시하고 이야기하면 자연스러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생소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과연, <여교수…>의 영상은 생소함 그 이상이다. 이 영화에선 인물들이 거리에서 택시를 잡건, 야외에서 무언가를 하건, 행인은커녕 지나가는 자동차 한대조차 발견할 수 없다. 현실감을 불어넣기 위해 사용하는 행인 같은 장치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첫 장면의 수녀들처럼 역할이 없는 보조연기자가 등장하는 몇몇 경우도 극히 제한적인 방법으로 사용된다.

<여교수…>에선 뒤통수가 비치는 인물이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대사를 하는 경우도 자주 등장하고, 인물들의 정지동작에 가까운 모습도 보인다. 많은 경우 배우들의 연기는 선형적 동작이 아니라 정적인 포즈에 가깝다. “배우들도 초반에는 어색해했다. 배우란 본능적으로 뭔가를 보여주려 하는 사람이니 말이다. 그들이 움직이지 않도록 하는 게 인간적으로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이하 감독의 태도는 현장에 처음 들른 방문객에는 이상하게 보였을 수도 있다. “내 연출이란 건 무언가를 하지 못하게 통제하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배우들을 못 움직이게 하고, 필요없는 미술적 장치를 걷어내고….” 대사와 대사 사이, 컷과 컷 사이에도 썰렁한 공백 또는 침묵이 흐른다. 은숙과 석규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채 다시 만난 날, 술에 취한 두 사람은 화장실 앞에서 마주친다. 그리고 “화가라면서요?”(은숙), “…아니요, 화가가 아니고 만화갑니다”(석규), “…아…”(은숙), “…”(일동), “제가 뭐 마음에 안 드는 거라도 있습니까?”(석규), “…나는 뭐 마음에 들어요?”(은숙) 등 무의미한 대화가 오간다. 이 영화 속 대화는 외려 침묵 사이를 이어주는 도구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예사롭지 않은 시도들을 펼친 이하 감독은 도대체 어떤 의도를 가졌던 걸까. “생소함 그러니까 영화 속 인물들이 우리와 다른 사람이라서 오는 생소함이 아니라, 그동안 보지 않았던 같은 사람의 다른 모습을 보고 있다는 느낌 그러니까 매일 보는 얼굴을 어느 날 정면에서 봤을 때 오는 생소함 있잖나.” 그 생소함은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현실’을 리얼리티로 받아들일 개연성을 제거한다. 뒷배경이 깨끗하고 주변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앵글의 한가운데 자리한 인물이 정면을 보며 정지한 채로 말하는 이 영화 속 장면들은 차라리 잘 통제된 무대극에 가깝다. <여교수…>에서 미니멀리즘을 읽어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극단적으로 단순하고 최소의 표현으로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이 전략은 우리의 못난 얼굴과 닮아 있는 지지리 궁상 남녀들의 삶을 낯설게 볼 수 있도록 해준다. 은숙, 석규, 유 선생 등 현실에서 지긋지긋할 정도로 흔하게 볼 수 있는 <여교수…> 속 인물들은 이 고집스런 감독의 손길 안에서 지저분한 일상의 잔때를 털어내고 뽀얀 알몸을 드러낸다.

그렇게 영화 안에서 재구성된 그들의 낯선 모습은 우리와 더 큰 거리감을 만드는 듯 보이지만, 도리어 이하 감독의 의도처럼 “영화 속 인물들의 생소한 정면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뒤통수를 느끼게” 한다는 쪽이 더 맞는 듯하다. 영화 속 그들의 허위와 가식으로 수놓아진 그들의 가면은 실은 우리의 거짓된 표정과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세밀하게 쪼개져 무대 위 핀 조명을 받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우리의 습자지처럼 얄팍한 탈바가지이며, 마음속 그늘 안에 숨어 있던 ‘1986년의 폐 수영장’인 셈이다. 하지만 <여교수…>는 자신의 낯선 내면과 묻어둔 기억을 바라보면서 절규하며 괴로워하기보다는 씩 웃을 수 있게 하는 영화다. 무엇이든 인정해야 할 것을 꿀꺽 받아들이고 나면 편해지는 심리와 유사하게 말이다. 설사 그것이 아주 본질적인 부분을 눙치고 대충 얼버무려 넘어가는, 불충분한 수준일지라도.

노골적인 고집이 빚은 성과

분명, 어떤 영화의 성취를 그 결과물보다 감독의 집요한 추구나 고집 같은 항목으로 평가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여교수…>에 대한 비판들 이를테면 “형식과 스타일을 지나치게 과시적으로 드러낸다”거나 “메아리 없는 냉소주의가 엿보인다”는 등의 지적은 타당해 보인다. 무엇보다 <1호선>이 붙들어낸 내면의 끈적한 공기를 이 영화에서 찾을 수 없다는 점은 가장 큰 아쉬움이다. 하지만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상업 영화계라는 경직된 틀을 넘어서는 과정에서 얼마간의 양보와 타협이야 있었겠지만 신인감독이 데뷔작을 통해 자신이 하려는 바를 이 정도로 집요하게 구현해낸 경우는 흔치 않다. 이하 감독은 “매 테이크에서 0.5초씩의 공백을 줄였는데, 지금 생각하니 너무 아쉽다”고 말하지만, 형식에서건 주제의식에서건 감독이 애초 품은 뜻을 상업영화의 경지 안에서 끝까지 밀어붙였다는 점만으로도 이 영화는 대단히 특별한 데뷔작이라 부를 만하다. 한국 영화계에선 쉽게 만날 수 없는 범상치 않은 코미디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은 ‘이 감독의 노골적인 고집’의 빛나는 성과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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