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당황할 때가 있다.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해야 하는 것이 바른 관객의 자세일 텐데, 남몰래(어차피 아무도 모르겠지만) 악당을 응원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저 인간은 주인공보다 잘생겼잖아, 잘생긴 남자가 이겼으면 좋겠어!” “흥! 착한 척하기는.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사랑 타령이란 말이냐!(아 참, 저 영화는 조선시대지)” 그러다보니 마음에 드는 악당 리스트도 차곡차곡 쌓여가게 마련이었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편파적이지만, 미움받는 악당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우기다보면 공정해질 수가 없다. 마음 내키는 대로 뽑은 멋진 악당 베스트 10이다.
10위 <반지의 제왕>의 나즈굴
선정 이유: 검은 두건을 쓰고 검은 말을 탄 반지의 악령. 말없는 카리스마와 외모에서만은 따라올 악당이 없다.
그는 누구인가: 절대반지를 만든 사우론은 인간과 요정과 난쟁이를 위해서도 몇개의 반지를 만들었다. 나즈굴은 그 반지의 힘에 매혹되어 영혼을 잃어버리고 반지의 노예가 되고만 인간의 아홉 군주를 일컫는 호칭이다. 형체가 없는 나즈굴은 검은 두건 아래에 암흑만을 품고 있기 때문에 누가 누구인지 구별하기 어렵지만, 나름대로 위계가 존재하여 나즈굴의 군주 아래에 여덟명이 팀을 이루고 있다. 차가운 검으로 프로도를 찔렀던 나즈굴이 대왕 나즈굴. 그들은 요정 아웬이 불러온 물결에 휩쓸려 말과 두건을 잃어버린 채 이상한 소리로 울며 달아나지만 조금씩 그 힘을 회복해간다.
경쟁자: 절대 제복을 벗지 않는 <은하철도 999>의 차장, 비슷한 유니폼을 착용한 <해리 포터> 시리즈의 디멘터.
9위 <스파이더 맨2>의 옥토퍼스 박사
선정 이유: 다리를 네개나 달고 젊은 스파이더 맨과 싸우느라 수고했다.
그는 누구인가: 닥터 옥토퍼스(앨프리드 몰리나)는 본래 옥타비우스라는 점잖은 이름을 가진 핵물리학자였다. 고아인 피터 파커(옷 갈아입으면 스파이더 맨)에게 아버지처럼 따뜻한 존재였던 옥타비우스는 핵처리 장치를 개발하다가 사고로 그 장치가 등에 붙어 문어모양 괴물이 되고 만다. 그의 거대한 다리 끝에는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세 갈래 촉수가 붙어 있는데, 그 무게를 모두 더하면 50kg이 넘는다고 한다. 너무 무거운 스트레스 탓인지 지구의 환경을 걱정하던 과학자가 건물을 파괴해 쓰레기를 양산하는 악당으로 변신한 것. 닥터 옥토퍼스는 <스파이더 맨>에 등장했던 악당 그린 고블린에 이어 <스파이더 맨> 시리즈 인기 순위 2위에 오른 바 있다.
경쟁자: 산업폐기물을 먹고 자라 거대해진 <프릭스>의 거미들.
8위 <공공의 적>의 조규환
선정 이유: 명석한 두뇌, 욕도 영어로 하는 긴 가방끈, 인조인간의 복근.
그는 누구인가: 펀드매니저 조규환(이성재)은 완벽한 인간이다. 수백억원이 들어오는 투자 성사를 눈앞에 두고 있는 그는 치밀하고 영리한 엘리트이고, 건달들과 17 대 1로 싸울 수 있는 강철중(설경구)과 거의 대등하게 주먹을 주고받을 정도로 싸움도 잘하고, 신경을 건드린 택시기사를 끝까지 쫓아가 때려 죽일 만큼 집념도 대단하다. 이처럼 문(文)과 무(武)를 두루 갖추었으니 조규환은 악당들의 모범이자 선망의 대상이라 할 만하다. 무엇보다 조규환은 웬만한 악당은 따라잡을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나쁜 놈이다. 그는 재산을 어려운 이들에게 기증하려는 마음 착한 부모를, 총도 아니고 칼로 수없이 찔러 살해하는데, 그 장면을 보면 친아들이 맞나 싶다. 너무 빈틈이 없어서 다소 긴장감이 떨어지는 악당.
경쟁자: 학벌과 재산과 한없이 악한 심성이 조규환과 비슷한 <공공의 적2>의 한상우(정준호).
7위 <양들의 침묵> <한니발>의 닥터 한니발 렉터
선정 이유: 자기도 악당이지만 남들까지 악당으로 만드는 놀라운 재주를 지녔다. 게다가 사람고기도 먹는다.
그는 누구인가: 저명한 정신과 의사 한니발 렉터(앤서니 홉킨스)는 리투아니아 영주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2차대전 당시 폭격으로 그의 집안은 거의 몰살당했고, 여동생 미샤는 굶주린 패잔병들에게 잡아먹혔다. 그 상처가 식인 습관으로 다시 태어났으니, 세상 참…. 천재적인 두뇌를 지닌 렉터는 다채롭고 우아한 살인을 보여주었다. 사람의 내장 중에서도 고급 부위만 골라내 요리했고, 해부교과서의 도면과 똑같은 모습으로 시체를 꾸미고, 스스로 혀를 물어 자결하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끝내 FBI에 체포돼 감옥에서 소일하다 만난 사람이 FBI 요원 클라리스 스털링(<양들의 침묵>의 조디 포스터, <한니발>의 줄리언 무어). 그는 정신과 의사와 예술가에 가까운 살인자의 두 가지 모습을 과시하며 아름답고 명민한 스털링을 사로잡는다.
경쟁자: <한니발>의 메이슨(게리 올드먼). 자기가 직접 먹지는 않지만 사람고기 먹여 돼지를 친다.
6위 <달콤한 인생>의 강 사장
선정 이유: “나이 먹으면 참을성이 없어져”라는 불후의 명언을 남기셨다. 가끔은 선문답도 구사하신다.
그는 누구인가: 어린 애인 희수(신민아)를 만나고 있는 강 사장(김영철)은 그녀에게 다른 남자가 생겼다는 의심을 하게 된다. 평범한 깡패였다면 현장을 급습하여 남자는 죽도록 패주고 여자는 머리채를 휘어잡아 끌고 다녔을 것이다. 그 다음엔 “사랑해, 다시는 안 때릴게”라며 징징댔겠지. 그러나 냉혹하고 무정한 강 사장은 심복인 선우(이병헌)에게 희수의 부정이 사실로 확인된다면 두명 모두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런 남자는 피해야만 한다. 그는 또한 독특한 방법으로 선우를 괴롭힌다. “말해봐요. 저한테 왜 그랬어요?”라고 물어보는 선우에게 제대로 된 대답 한마디 안 해주니, 나라도 끝까지 가보고 싶겠다.
경쟁자: “넌 누구냐?”라고 아무리 물어도 대답없는 <올드보이>의 이우진. 거 참, 웬만하면 대답 좀 해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