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성과 김태희가 출연하는 판타지영화 <중천>이 최초로 촬영현장을 공개했다. 현재 80% 정도 촬영을 마친 이 영화는 아시아의 수준급 스탭이 대거 참여하며 100억원 넘는 예산이 들어가는 대형 프로젝트다. 베이징 인근, 린안의 천목산, 헝디엔의 월드 스튜디오 등 중국의 곳곳을 거쳐 저장성의 작은 마을 방암에서 막바지 촬영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중천>의 현장을 들여다본다.
“우와아~.” 일제히 시선을 위쪽으로 돌리던 일행 30여명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온다. 3월19일, <중천> 촬영이 한창 진행 중이라는 중국 저장성 방암의 세트장은 그야말로 기암으로 둘러싸여 있다. 우뚝 솟아 있는 둥글둥글 곡면의 절벽이 꼭 엄청난 거인이 끌 따위로 산을 깎아놓은 듯하다. 그 절벽 가운데 쏙 틀어박힌 사찰의 모습은 더 비현실적이다. “근데… 저 산도 세트야?” “글쎄… 그런가?” 이곳에 사는 누군가 들었다면 피식 웃어버렸을 법한 이방인들의 대화가 이어질 무렵, <중천>의 세트장이 눈에 들어온다. 알록달록 색등이 달린 좁은 통로를 지나니 우묵한 공터에 거대한 나무 밑둥이 세워져 있다. 그 앞으로 펼쳐진 풀밭 위에는 복숭아 꽃이 만발해 있다. 한눈으로 보기에도 사람이 만든 티가 역력한 이곳은 이날 밤 촬영이 이뤄질 ‘위령수’ 오픈세트다. 이곳을 지나 이 세트장의 가장 위쪽으로 올라가면 인공으로 조성된 연못과 범상치 않은 모양새의 정자가 만들어져 있다. 바로 전날까지 촬영이 이뤄졌던 공간이라 그런지 건물과 가교에는 가짜 덩굴과 꽃이 매달려 있다. 세트의 모습이나 이를 품고 있는 자연환경이나, 모두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느낌이다.
보이는 바대로 <중천>은 본격 판타지영화를 지향하는 작품이다. <중천>의 배경은 이승과 저승 사이의 공간이다. 이 영화의 제목 ‘중천’은 바로 그곳을 지칭한다. 이 영화의 설정에 따르면, 죽은 육신을 버리고 중천으로 올라온 영혼은 7일씩 7개의 공간을 돌며 죄와 인연, 그리고 기억을 정리한 뒤 49재를 치르고 천상, 즉 저승으로 올라가게 된다. 기암 절벽 곳곳에 뚫린 구멍들과 어둑해지면서 하늘을 가로지르는 박쥐를 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오싹, 한기가 몰려든다. 때마침 주인공 정우성과 김태희가 촬영장에 도착하면서 잠시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현실감각을 찾는다. 두 선남선녀를 향해 돌진하는 방송 취재진들이 여기가 다름 아닌 생업을 위한 전쟁터임을 알려준다.
이내 현장의 소음도 커지기 시작한다. 어둠이 완전히 깔리기 전에 밤촬영 준비를 웬만큼 끝내놓으려는 스탭들의 움직임이 빨라졌기 때문이다. 한데, 분주히 움직이는 스탭들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WBC에서 한국팀이 패배했다는 소식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스탭들 대부분이 피곤한 표정을 지었던 건 필시 이날 촬영이 110회차째였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을 터. 보통 규모의 영화가 30~40회차 만에 촬영을 마친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중천>의 현장이 얼마나 고된지 알 수 있다. 게다가 2월과 3월의 절반 정도는 쏟아지는 비 탓에 촬영을 못해 2월 말로 예정됐던 촬영 종료 시점도 4월 초로 미뤄졌다. 저간의 사정을 미리 들어서 그랬는지, 한국인 60명, 중국인 140명(많을 때는 170명)으로 이뤄진 스탭들이 취재진을 바라보는 눈빛이 곱지만은 않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 머나먼 곳까지 와서 먼발치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순 없잖은가. 결국 스탭들에 대한 미안한 감정을 꿀꺽 삼킨 채 조신하게 촬영장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멜로가 축을 이루는 액션판타지
초대형 크레인에 매달린 100kW 조명이 환하게 비추고 있는 ‘위령수’ 세트는 낮에 본 모습과 달리 신비로운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카메라 앵글을 통해 들여다보니 더욱 그럴싸하다. 어마어마한 둘레의 나무가 뿌리를 드러낸 채 서 있고, 복숭아 꽃이 빛을 받아 화사한 느낌을 자아내니 자연의 정령들이 튀어나와 무도회라도 열 듯한 분위기다. 여기에 컴퓨터그래픽이 첨가되면 나무 줄기는 하늘 위로 끝 모르게 높이 솟아 있을 것이며, 반딧불이가 하늘을 뒤덮는, 더욱 환상적인 공간이 될 것이다. 이 가운데 새하얀 옷을 입은 채 김태희가 등장하니 선녀가 내려온 듯하다.
사실, <중천>에서 김태희는 정말 선녀처럼 보여야 한다. 김태희가 연기하는 소화는 이승에서의 기억과 인연, 그리고 미련을 떨쳐버린 영혼인 천인(天人)으로, 중천의 질서와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반면, 정우성이 연기하는 이곽은 산 사람인 채로 중천에 빨려들어온 존재다. 상세히 설명하자면, 구구절절 복잡한 <중천>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때는 통일신라 말기, 귀신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곽은 악귀들에 의해 약혼녀 연화를 잃고 왕실 소속 퇴마부대 처용대에 들어간다. 이곽은 처용대의 리더 반추(허준호)를 비롯한 대원들(박상욱, 소이현, 김광일, 유하준)과 끈끈한 정을 나누며 최고의 무사로 성장한다. 그러나 반추가 개인적인 원한을 풀기 위해 귀족들에 대한 반란을 도모하자 이곽은 그들 곁을 떠난다. 반란이 실패하고 처용대원 모두가 참수당한 지 얼마 뒤 이곽은 중천으로 빨려들어가고, 연화와 똑같은 모습의 천인 소화를 만나게 된다. 한눈에 소화가 연화의 영혼임을 알게 된 이곽은 그녀를 끝까지 지켜주겠다고 다짐하지만, 소화가 지닌 영체를 빼앗아 중천의 질서를 뒤집으려 하는 처용대원의 영혼을 만나면서 갈등에 빠진다. 결국, 이곽은 사랑하는 소화를 지키기 위해 형제와 같았던 처용대원들과 맞서게 된다. 조동오 감독은 “판타지이고, 액션이 많이 나오지만, 이곽과 소화의 멜로드라마가 중심축을 이룰 것”이라고 설명한다.
판타지를 살리기 위한 엄청난 물량의 조명
이날의 촬영분량은 처용대로부터 추격을 피해 이곽과 도망치던 소화가 영혼들의 결혼식을 접하고 축복을 내려주는 장면이었다. 천인이 되기 위해 이승의 기억과 인연을 모두 떨쳤던 소화의 내면이 서서히 변화하는 대목이며, 영화의 판타지 분위기를 돋워주는 신이기도 하다. “따제 안징!” ‘모두 조용하라’는 중국어가 현장에 쩌렁쩌렁 울려퍼지면서 이날 촬영이 시작됐다. 몇 차례의 테이크 뒤 조동오 감독이 낮고 큰 목소리로 오케이 사인을 내자 이 영화의 제작사인 나비픽쳐스 조민환 대표가 “현장에서 가장 즐거운 일은 김태희가 영화배우로 자리잡는 모습을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김태희가 촬영하는 도중 모니터를 묵묵히 지켜보던 정우성도 만족하는 표정이다. 중간에 잠시 내린 비 때문에 긴장하던 스탭들은 빗물이 잦아드는 모양새를 살피며 촬영을 이어나갔다. 곧이어 이곽이 소화에게 말을 거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이날의 촬영은 끝이 났다. 다음날 있을 낮촬영을 대비해 무리할 필요가 없다는 최정화 프로듀서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사실, 다음날의 낮촬영은 <중천>으로선 매우 드문 경우란다. 정우성이 “오히려 낮에 찍으면 적응이 안 될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이 영화는 대부분 밤장면으로 이뤄져 있다. 판타지의 느낌을 살리기 위한 것이지만, 난점 또한 많다. 특히 조명은 가장 어려운 점이다. 워낙 넓은 공간에서 촬영이 이뤄지는데다 전체적으로 디지털 색보정(DI)를 해야 하는 탓에 조명에 엄청난 물량을 쏟아야 한다. 헝디엔의 진황궁 세트에서는 상하이로부터 수백 킬로미터를 달려온 대형 크레인 8대가 동원되는 등 1500kW의 조명이 사용됐다. 조명 세팅에만 10일이 걸렸고, 양우상 조명감독은 넓은 공간을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현장을 지휘해야 했을 정도다.
“<무사>의 맥을 잇지만 진일보한 영화”
<중천>은 여러모로 <무사>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다. 우선, 중국에서 모든 촬영이 이뤄지는데다 <무사>를 연출한 김성수 감독과 <무사>의 프로듀서였던 조민환 대표가 함께 제작자로 나섰고, <무사>에 참여했던 장샤(중국쪽 프로듀서), 한충(중국쪽 미술감독), 리밍산(소품), 황바오룽(의상 제작) 등 중국 스탭이 그대로 일을 하고 있으며, 음악을 담당했던 일본의 사기스 시로가 다시 참여하니 말이다. 게다가 조동오 감독은 <무사>의 조감독이었고, 김영호 촬영감독도 당시 퍼스트였다. 굳이 바뀐 인물이 있다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란>에 참여해 의상상을 받은 바 있는 일본의 세계적인 영화의상 디자이너 에미 와다 정도다. 조민환 대표가 “<중천>은 <무사>의 맥을 잇지만 진일보한 영화”라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고보면, <중천>은 5년 전 <무사>의 여러 시행착오를 극복하려는 프로젝트로 보인다. <무사> 때 수백 킬로미터의 강행군이 소진했던 에너지를 고려해 70% 이상을 헝디엔 스튜디오에서 촬영했고, 어마어마한 엑스트라를 써도 별티 안 나는 아날로그 액션 대신 컴퓨터그래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로 했으며, 안정적 준비를 위해 중국에 지사를 만들었던 일 등이 그것이다. 규모도 커졌다. 55억원의 제작비는 100억원대로 불어났고, 필름 또한 <무사> 당시의 35만자를 넘어설 전망이며, 촬영회차 또한 <무사> 때의 119회를 훌쩍 오버할 분위기다. 그렇다면, <중천>은 200만명 정도의 관객을 동원하며 간신히 손익분기점을 넘겼던 <무사>의 흥행을 넘어설 수 있을까. 작품성 면에서도 좀더 나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4월 초 촬영을 마치고 기나긴 후반작업을 거친 뒤 연말이 되면 <중천>이 <무사>의 명예를 회복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