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시리아나>의 제작배경 [1]
2006-04-05
글 : 김현정 (객원기자)

2001년 9월11일은 전세계가 충격에 빠진 날이었다. 그날 이후 오사마 빈 라덴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우디아라비아인이 되었고, 미국은 복수를 준비했고, 그날을 기억하는 영화와 드라마와 수많은 책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날 이후 세계가 변했을까? 냉정한 영화 <시리아나>는 미국과 중동을 하나로 묶고 있지만 너무 거대해 보이지 않는 그물을 더듬어 찾아내며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유목민에게 길을 비켜주는 지혜로운 왕자의 개혁은 신기루가 되고 워싱턴은 다시 한번 샴페인을 터뜨릴 것이라고. 그러나 <시리아나>는 희망을 강요하지 않기에 오히려 가치가 있는 영화다. 존재하지도 않는 희망에 젖어 사는 이들은 다만 불우한 현실을 단단하게 굳히는 역할만 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자본으로 만들어졌지만 그 자본을 부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영화 <시리아나>. 2001년 가을에 시작된 영화가 어떻게 태어나고 자라왔는지 되짚어본다.

외국인 노동자 캠프를 찍기 위해 두바이 외곽으로 나간 배우 마자르 무니르는 계약노동자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우리가 묵는 별 다섯개짜리 호텔을 지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은 주급 3달러를 받으면서 침대 네개가 있는 방 한칸에 열두명이 살고 있었다.” 파키스탄 이민자의 아들인 마자르 무니르는 석유회사에서 해고된 다음 자살테러범이 되는 파키스탄 소년 와심을 연기했고, 그 캠프는 와심 같은 아이들이 정말 살고 있는 장소였다. 그들 발밑에는 세계 최고의 부를 보장해주는 자원이 매장돼 있지만, 그걸 파내는 아이들은 누가 그 부를 가져가는지, 어째서 석유 귀족과 외국인만이 별 다섯개짜리 호텔에 묵을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시리아나>는 국가와 국가, 정치와 경제와 군사적인 상황이 뒤엉켜 빚어낸 그 비밀을 보여주고자 하는 영화다. 네 가지 줄기로 나뉘는 이 영화는 미국 석유 기업의 합병과 파키스탄 소년의 죽음이 어떻게 한 지점에서 만날 수 있는지 끈질기게 파고든다.

<시리아나>는 CIA와 테러리즘을 다룬 로버트 베어의 논픽션 <악을 외면하다>(See No Evil)에서 힌트를 얻은 영화다. 스티븐 소더버그는 <트래픽>의 작가였던 스티븐 개건에게 그 책을 보여주었고, <트래픽> 자료 조사를 위해 국무성을 드나들며 테러리즘에 관심이 있었던 개건은 광범위한 취재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예상했던 중동보다 유럽에 먼저 가야만 했다. 1976년부터 1997년까지 중동지역에서 활동했던 전직 CIA 요원 베어는 개건을 프랑스 리비에라 해안으로 데려갔다. “페르시아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을 만나고 싶다면 남프랑스로 가야 한다. 페르시아만에 재산이 있는 사람이 기온이 화씨 130도까지 치솟는 8월에 그곳에 있겠는가? 모두 남프랑스에 정박한 요트에서 지내고 있다.” 그 때문에 <시리아나>는 미국과 중동을 오가면서 스페인의 휴양지도 경유해간다.

이 영화의 네 가지 에피소드를 이어주는 인물은 은퇴를 앞둔 CIA 요원 밥 반즈(조지 클루니)다. 무기밀매상 암살을 수행하던 도중 미사일 한기를 잃어버린 밥은 베이루트로 가서 그곳을 방문 중인 중동 산유국의 왕자 나시르(알렉산더 시디그)를 암살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을 꿈꾸는 나시르는 유정채굴권을 입찰에 붙여 미국의 거대 석유기업 코넥스보다 높은 가격을 부른 중국에 채굴권을 넘긴 인물이다. 제네바에서 일하는 에너지 분석가 브라이언 우드먼(맷 데이먼)은 나시르가 스페인 휴양지에서 개최한 파티에 참가했다가 사고로 아들을 잃는다. 그 죽음을 보상하고자 나시르는 브라이언에게 자신의 경제고문 자리를 제안하고, 석유로 창출된 부를 국민에게 돌리겠다는 포부를 들려준다. 나시르에게 축출당한 코넥스는 얼마 전 카자흐스탄의 유전채굴권을 획득한 석유회사 킬린과 합병을 선언하지만 뇌물거래 의혹 때문에 허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변호사 베넷 홀리데이(제프리 라이트)는 그 의혹을 제거하고 합병허가를 받아내기 위해 분투한다. 코넥스가 유전을 떠나면서 해고된 파키스탄 노동자 와심은 가난과 차별에 시달리다가 이슬람 학교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고 지적인 이집트 남자도 만나게 된다. 와심과 그 친구를 다정하게 대해주는 이집트 남자는 사라진 미사일을 이용해 테러를 계획하고 있는 테러리스트다.

일년 반 동안 취재, 다시 일년간 시나리오 작업

일년 반 동안 취재를 하고 다시 일년 동안 시나리오를 썼던 개건은 이처럼 복잡한 구성을 택해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다고 말했다. “나는 밥 반즈를 주인공으로 삼아 그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지난 몇년 동안 내 삶은 훨씬 순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거대한 이야기다. 지금과 같은 시대에, 중동과 서방의 관계가 소재인 영화를 단순한 오락거리로 만드는 건 내가 보기엔 범죄나 마찬가지다.” <시리아나>는 반(反)부패영화라고 규정짓는 개건은 부패한 세계를 방관하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세개의 대륙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신문 기사를 오려 스크랩북을 만드는 것처럼 시나리오를 써갔다. 개혁과 독립을 시도하던 중동 지도자의 암살, 거대 석유기업의 합병과 뇌물수수 의혹, 보트에 미사일을 싣고 돌진한 파키스탄의 자살테러범. 개건은 며칠 간격을 두고 신문에 실렸다면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였을 이 사건들을 하나로 모아 코넥스라는 단어를 눈여겨보도록 빨간 동그라미를 쳐주었다. 코넥스와 미국 정부는 싼값에 원유를 얻고자 몇년 사이 GNP가 60%까지 하락한 산유국 국민들의 권리와 젊은 지도자의 꿈과 미사일을 보고 신기해하는 소년의 목숨을 기꺼이 내다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 난폭한 공식은 개건이 보고 겪은 세상의 법칙을 그대로 적용했을 뿐이다.

개건은 “지금 이 순간의 세계를 묘사하고 싶었기 때문에” <시리아나>를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스타일로 찍었다고 하지만 스타일만 사실적인 것은 아니었다. 정교한 사전조사를 거친 <시리아나>는 사소한 부분에까지 현실의 흔적이 녹아 있다. 와심이 미사일로 코넥스 선박을 공격하기 전에 아버지에게 버스비를 빌리는 장면이 그 예다. 크리켓을 하면서 천진난만하게 떠들고 있던 아버지는 어린 아들이 비디오로 유언을 녹화해두었고 사지로 가기 위해 버스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개건은 비슷한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자폭한 테러범의 아버지가 인터뷰한 기사를 읽었다. 낮잠을 자고 있던 그는 아들이 자신을 깨워 35센트를 빌려갔다고 말했다. 살아 있는 아들을 본 건 그때가 마지막이었다고. 어른은 35센트처럼 적은 돈을 빌리지 않는다. 죽은 테러범은 소년, 아직 어린아이였던 것이다! 정치적인 이데올로기가 무엇이든 한 아이를 그런 방식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그 순간 고통이 나를 흔들어놓았다.”

소년들은 왜 테러범이 되었을까란 질문에서 시작되다

그 감정의 진폭에도 불구하고 <시리아나>는 죽은 소년과 와심을 위해 변명하지 않는다. 다만 폭탄이 터지기 전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여준다. 미국인들은 종교에 미친 광신도가 미사일을 배에 싣고 무고한 이들을 살해했다고 믿을 테지만, 와심은 케밥을 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슬람 학교에 갔던 평범한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왜 살인자가 되어야 했던 걸까. 스타라는 이유로 출연을 거절당하자 몸무게를 30파운드 늘린 조지 클루니는 그걸 묻기 위해 제작자이자 주연배우로 이 영화에 참여했다. “<시리아나>는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무작정 자살테러범이라는 낙인을 찍기에 앞서 무엇이 그들을 만들어냈는지 알아내고자 했다. 우리는 무엇이 이 풍요로운 땅에 증오와 극단적인 폭력을 키워왔는지 이해해야만 한다.” 영화 한편이 지금껏 눈여겨보지 않았던 현실을 완벽하게 이해하도록 도울 수는 없을 것이다. <시리아나>는 미국 정부가 일개 기업의 유전채굴권을 위해 추적위성과 미사일을 동원해야 하는 메커니즘을 설명할 여력이 없고, 풍부한 석유를 보유했던 나시르의 왕국이 경제적으로 추락하기까지의 과정도 생략한다. 그러나 <시리아나>는 권력과 언론이 차단한 상관관계를 복구해 패턴을 형성함으로써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일에 의문을 품도록 유도한다. 그 의문은 세상 누구보다 미국인들이 품어 마땅할 것이다.

클루니는 <시리아나> 때문에 반미국적인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개건은 9·11 테러를 목격하고 심리적인 후유증에 시달렸던 수많은 미국인 중 한명이고, 자신의 나라가 부패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고 말하는, 어찌 보면 애국자이기도 하다. 그는 “부패한 의원이 뇌물을 받아 산 요트에서 노닥거리는 동안 우리는 아부가립(미군이 이라크 포로를 학대하는 사진이 유출되어 파문을 일으켰던 감옥)에서 사람들을 고문한다. 그런 현실을 용납할 수 없다”면서 젊은 세대가 미국을 직시하도록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베어와 개건이 모두 동의하는 것처럼 미국은 석유와 오일머니에 중독되어 있다. 중독을 끊을 수 있는 자는 중독의 가장 큰 피해자인 자신뿐일 것이다. 미국은 산유국이 잉여생산을 하도록 조정하여 유가를 낮추고, 방탕한 재벌과 왕족에게 돈을 지불하고, 그들에게 사치품과 무기를 판매해 지불한 유가마저 도로 가져오고 있다. 그같은 사이클에 익숙해진 미국은 취약한 경제기반을 개선하기 위해 대가를 치르느니 <시리아나>에서처럼 암살과 테러로 친미적인 독재자를 옹립하는 방법을 택할 것이다. 그 때문에 개건은 이미 체제의 일부가 된 기성 세대가 아닌 젊은이들이 <시리아나>를 보아야 한다고 믿고 있다.

<시리아나>가 미국을 위한 영화인지 중동을 위한 영화인지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논쟁이다. 착취와 보복테러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는 이 폐쇄회로에선 누구도 선(善)을 자처하지 못한다. 2002년 9월11일 헤즈볼라 지도자를 방문했던 개건은 지붕마다 저격수들이 총을 겨누고 있는 살벌한 골목을 통과하여 몸수색을 받았고 펜과 노트를 압수당한 빈 몸으로 실내에 들어갔다. 그곳에 있던 TV 모니터 두대는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무너지는 화면을 되풀이해 재생하고 있었다. 수천명이 몇분 사이에 죽어간 테러를 기념하는 이들을 단지 피해자라 동정할 수 있을까 혹은 그 범인을 잡겠다며 민간인 마을에 미사일을 투하하는 행동을 복수라고 긍정할 수 있을까. 클루니는 “나는 1만5천명의 아이들을 총알받이로 이라크에 보내기 앞서 누군가 질문을 해야만 한다고 믿었고, 단지 그 때문에 비난받았다”고 말했다. <시리아나>는 그처럼 질문을 던지는 영화이고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죽음과 가난과 공포가 우리 자신에서 비롯되지는 않았나 묻는 것조차 미국에선 용기있는 행동일 것이다.

원작자가 폭로한 미-사우디의 추악한 거래 <악마와의 동침>

사소한 악이 거대한 악을 부른다

로버트 베어 지음

알 카에다와 헤즈볼라,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 등에 투입된 요원들을 관리했던 로버트 베어는 CIA를 그만둔 다음 두권의 책을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첫 번째 책이 <시리아나>에 단서를 제공한 <악을 외면하다>(See No Evil)고 두 번째 책이 2003년에 출판된 <악마와의 동침>(Sleepng with the Devil)이다.

베어가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나기 전에 자료조사를 시작한 <악마와의 동침>은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와 미국 정부의 유착관계를 파헤친 책이다. 이 책은 세계경제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는 가상 시나리오로 시작된다. 베어는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인 와하비즘을 추종하는 와하비와 수니파 교도 등이 사우디의 원유를 생산하고 수송하는 시스템 중에서 민감한 장소 몇 군데를 파괴한다면 맨해튼에서 핵폭탄이 터지는 것보다 더 큰 피해를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섬뜩한 이론을 증명하기 시작한다.

사우디 왕가는 한때 휘발유 값을 올리고 백악관에 그 이익의 상당 부분을 상납했다. 그러나 GNP가 60% 넘게 하락하고 걸프전으로 출혈을 겪은 지금 사우디는 신용과 미국에만 적용되는 저유가 정책으로 버티고 있다. 미국의 파워엘리트를 화나게 하면 왕가의 존립이 위협당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베어는 미국이 오일머니에 취해 스스로에게 칼을 들이대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부패와 사치로 원성을 샀던 사우디 왕가는 자국 국민들로부터 미국의 앞잡이라는 공격까지 받게 됐고 안전을 도모해야만 하는 처지에 몰렸다. 그 때문에 그들은 이슬람 성전을 수행한다고 자처하는 지하드 전사들에게 돈을 댔다. 인심을 얻고 지하드의 분노를 미국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잘 알려진 것처럼 오사마 빈 라덴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화씨 9/11> 등을 통해 이미 알려진 사우디와 미국의 유착보다 흥미로운 사실은 사우디 왕가의 엄청난 사치와 방탕이다. 창녀를 사기 위해 전용기를 타고 외국으로 가기도 하는 사우디 국왕의 가족들은 스페인 마르베야에 있는 왕궁을 방문해 하루에 500만달러를 소비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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